1988년 경상북도 기념물로 지정되었다. 지정면적 16,891㎡. 탈해는 본래 왜국의 동북쪽 1,000리 되는 곳에 있다는 다파나국(多婆那國) 출신이었다.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다파나국의 왕비가 잉태한 지 7년만에 큰 알을 하나 낳았으므로 다파나국 왕이 상서롭지 못한 일이라 하여 비단으로 알을 싸서 보물과 함께 궤짝에 넣어 바다에 띄웠는데, 그것이 신라의 동쪽 아진포(阿珍浦)에 도착하였다.
바닷가에 살던 노파 아진의선(阿珍義先)이 그것을 발견하고 열어보니 아기가 있어 데려다 길러 마침내 서기 57년에 유리왕의 뒤를 이어 왕위에 올라 24년간 재위하였다. 그리고 궤짝이 바다에 떠왔을 때 까치들이 울면서 따랐으므로 까치 ‘작(鵲)’자에서 ‘조(鳥)’자를 떼내고 ‘석(昔)’으로써 성을 삼았다고 한다.
석탈해왕이 도착했다는 ‘계림의 동쪽 하서지촌(下西知村) 아진포’를 지금의 경상북도 경주시 양남면 나아리(羅兒里)로 비정하여 조선 헌종 11년(1845)에 하마비(下馬碑)와 땅을 하사하였으므로 고종 초에 석씨문중에서 유허비와 비각을 건립하였는데, 비문은 정헌(定軒) 이종상(李鍾祥)이 지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