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창녕(昌寧). 자는 측생(則生). 성몽선(成夢宣)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성예원(成禮元)이고, 아버지는 예조참판 성수익(成壽益)이며, 어머니는 최세신(崔世臣)의 딸이다.
1594년 형 성진선(成晋善)과 함께 정시 문과(庭試文科)에 병과로 급제, 형제등제(兄弟登第)로 이름을 떨쳤다. 괴원분관(槐院分館: 문과에 급제한 사람 가운데 실무를 익히기 위하여 승문원에 분속시킴)에 있다가 내외직을 역임하고, 1601년 병조좌랑에 승임되었다.
이어 호조·예조·형조의 좌랑(佐郎)을 역임하고 성균관전적(成均館典籍)을 지낸 뒤 1604년 서천군수(舒川郡守)가 되어, 청렴하고 엄정한 정치를 행하는 목민관(牧民官)으로 표창을 받았다.
그러나 그 이듬해 부사직(副司直)으로 재임 중 아들의 과거급제를 위하여 글씨에 능한 사람을 과장(科場)에 들여보내 대리시험을 기도하였다가 탄로되어 파직되었다.
1606년 순천부사로 임명되었으나 신병으로 정사를 향리에게 위임하여 백성들의 원성이 발생하자 1607년 7월 사헌부의 탄핵으로 다시 파직되고 이듬해 43세에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