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태조왕건이 창건하였다. 왕건이 후삼국을 통일하고 송악산의 남쪽에 도읍을 세웠을 때 술사(術士)로부터 도읍의 삼재(三災)를 막기 위해서는 석당(石幢)을 극암(戟巖)에 세워야 함을 권고받았다.
이에 왕건은 극암의 남쪽 벼랑 큰 돌 위에다 돌기둥을 사방으로 벌여 세우고 집과 같이 하였으며, 장명등(長明燈)을 설치하였다. 그리고 극암의 삼재를 진압하여 밝은 임금이 대대로 계승하고 충신이 끊이지 않게 하여줄 것을 기원하였다.
그 뒤 태부시(太府寺)에서는 대대로 장명등의 기름을 제공하였다. 충숙왕 때는 시중 윤석(尹碩)이, 충혜왕 때는 시중 한악(韓偓)이 기름을 제공하였고, 1383년(우왕 9)에는 시중 조민수(曺敏修)가 쌀과 포목을 시주하여 그 용도를 계속하게 하였으며, 첨서 유순(柳珣) 등은 집을 짓기도 하였다.
1398년태조의 명으로 중창에 착수하였고 1399년(정종 1)에는 불전 3칸을 건립, 석가삼존·16나한·5백나한을 함께 그린 영산회상도를 봉안하였고, 승방 3칸과 부엌 3칸을 신축하였으며, 밭 100결(結)과 노비 16명을 주었다.
그 뒤 이 절은 조선 중기 이후에 폐허화된 것으로 추정된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에 대한 권근(權近)의 기문이 상세히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