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 역사가 깊은 재래식 자망(刺綱)의 일종으로 경상도 북부 연안에서 주로 사용되었다.
1752년(영조 28)에 제정된 ≪균역사목 均役事目≫의 해세(海稅)에 관한 규정을 보면 경상도의 어세에 세망선(細網船)의 어세가 실려 있고, 흥해·연일·장기·울산의 청어어장의 세망선은 1척 당 6냥이라고 되어 있다. 따라서 이 지방에서 청어 자망어업이 성하였다.
1894년(고종 31)에 만들어진 ≪경상도내연강해읍갑오조선염곽어세총수도안 慶尙道內沿江海邑甲午條船鹽藿漁稅總數都案≫을 보면 경상도지방에 상당히 많은 세망선이 있었음을 알 수 있다.
이를 지방별로 보면 영덕 세망선 57척, 흥해 세망선 10척, 영일 세망선 6척, 경주 양중세망선(洋中細網船) 27척, 경주어장 세망선 36척, 기장어장 세망선 31척, 동래 양중거처세망선(洋中去處細網船) 24척으로 되어 있다.
세망 중에는 어장세망도 있고 양중세망 또는 양중거처세망도 있는데 전자는 해안에 가까운 어장에서 조업하는 것을, 후자는 해안에서 제법 떨어진 곳에서 조업하는 것을 말한다. 세액은 전자가 많게 되어 있는데, 전자가 보다 많은 어군이 몰려오는 곳에서 잡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세망은 다른 자망과는 달리 명주실로 그물을 짠 데 특징이 있었다. 조선시대에 이미 사용되고 있었던 어망으로서는 발달된 것에 속한다.
≪한국수산지≫ 제1집(1908)에 청어그물 또는 청어망이라는 명칭으로 소개되어 있는 어망이 바로 이 세망을 가리키는 것이다. 가는 명주실로 망목(網目) 1촌 2기로 만든 자망이었다. 조업은 어부 4명이 승선, 출어하여 하룻밤에 2∼3회 양망(揚網:그물을 치거나 걷음)하였다.
1905년 경의 한 조사에 의하면 많이 잡힐 때에는 하룻밤에 2,000∼3,000마리의 청어를 잡았다고 한다. 세망은 일제강점기에도 사용되었으며, 1930년 초에는 경상북도에서 청어가 가장 많이 잡혔다.
그러나 청어자원이 줄기 시작하였고, 일제강점기 말기에 이르러서는 동해안 일대에서 청어자원이 격감하였다. 이에 따라 청어어업이 쇠퇴하였고 세망어업도 과거의 어업이 되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