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조선 전기에,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책들을 나라에 기증하였으며, 흉년이 들자 수로 건설을 건의하여 농민 생활 안정에 기여한 학자.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향리의 사람들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용화산(龍華山)에 작은 성을 쌓아 향토 방위에 참여했으며, 난 후 국정 전반에 관한 시무책(時務策)을 조정에 올려 가납(嘉納)되기도 하였다.
1601년 학행으로 천거되어 희릉참봉(禧陵參奉)에 제수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에 돌아와 수천 권의 서책 속에 묻혀 후진 교육에 진력하였다. 1605년 김장생(金長生)이 익산군수로 있을 때 매번 그의 방문을 받아 군정자문(郡政諮問)에 응하였다.
이와 아울러 자신이 소장하고 있던 경전(經典)·사서(史書) 등 귀중한 전적(典籍)들을 나라에 기증하여 궁중의 비서각(祕書閣)에 비치하도록 하기도 했다. 그 무렵 향리 일대가 한해로 매년 흉년을 겪게 되자 40여 리에 달하는 수로 건설을 건의, 농민 생활 안정에 크게 기여하였다.
경학(經學)뿐만 아니라, 천문·지리·의복(醫卜)·병법(兵法)·관방(關防) 등에 이르기까지 널리 통했으며, 성혼에게 종유(從遊: 좇아 사귐)하는 한편, 조헌(趙憲)·정경세(鄭經世)·한백겸(韓百謙)·황신(黃愼) 등과의 친교가 두터웠다.
광해군 때 조카 소명국(蘇鳴國)이 대북·소북간의 당쟁에 관여, 몰락하자 이에 연좌되어 대명(待命) 중에 질병을 얻어 죽었다.
참고문헌
- 『이계집(耳溪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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