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밀양(密陽). 이름은 손정식(孫正植), 자는 화중(華仲 · 和中 · 化中), 호는 초산(楚山).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출생. 손호열(孫浩烈)의 아들로, 어머니는 평강 채씨(平康蔡氏)이다.
1881년(고종 18)에 처남 유용수(柳龍洙)를 따라 지리산 청학동에 갔다가 동학에 입도(入道)하여 수도하다가, 1883년에 고향으로 돌아와 포교하였다. 정읍군내 농소리(農所里) · 입암리(笠巖里) · 신면리(神綿里) · 음성리(陰城里)를 전전하다가, 전북 무장(茂長)에 가서 김모(金某)의 집에 포교소를 설치하였다.
언제 접주가 되었는지 알 수 없으나, 1892년 전북 삼례의 교조신원운동(敎祖伸寃運動)에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였다. 1893년에는 광화문 복합상소 때 호남 대표의 한 사람으로 참가했으며, 충북 보은 장내리(帳內里) 집회에서도 많은 교도들을 동원하는 뛰어난 지도력을 발휘하였다.
1894년 동학군의 전주화약 후에는 전남 나주 지방으로 가서 폐정개혁(弊政改革)을 지도하였다. 그리고 제2차 동학혁명운동이 일어나던 10월 일본군의 배후상륙에 대비, 최경선(崔景善)과 같이 나주 부근에 주둔하였다. 전봉준(全琫準)이 공주를 공략하다가 실패한뒤, 나주성을 공격했으나 지형관계로 실패하고 말았다.
그 해 12월 일단 광주로 후퇴, 입성하였다가 전북 흥덕(興德)에 있는 이모(李某)의 재실(齋室)에 숨어 있었으나, 1895년 1월 6일 재실지기 이봉우(李鳳宇)의 고발로 체포되었다. 전주감영으로 압송되었다가 서울로 이송, 여러 차례의 심문 끝에 전봉준 · 김덕명(金德明) · 최경선 · 성두환(成斗煥)과 함께 최후를 마쳤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