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은진(恩津). 할아버지는 송취규(宋聚圭)이고, 아버지는 송양필(宋良弼)이며, 어머니는 김성윤(金成潤)의 딸이다.
1774년(영조 50)에 식년 문과에 을과로 급제하였다. 이에 앞서 영조의 현량과(賢良科)에 특별히 급제하기도 하였다.
1778년(정조 2) 사간원정언(司諫院正言)을 거쳐 서장관(書狀官)·사간·덕천군수·대사간·우참찬·좌참찬 등을 두루 역임하였다. 정언으로서 정조 즉위 초의 당시의 폐해를 상소하였다.
즉, 이와같이 공사가 궁핍한 때 재용(財用)을 절약하고 근검을 백성들에게 가르쳐야 하는데 각 사(司)의 원역(員役: 하급서리의 하나) 및 공시(貢市: 나라에 공물을 먼저 바치고 돈을 타내는 貢契와 시장) 한량(閑良)들이 풍악이 넘치고 사치하여 과거를 한번 보는 경비가 3, 4만 냥씩이나 되니, 조정과 재야가 재물을 물쓰듯하면 하루의 즐김에도 지나지 못하며, 한 백성의 게으름으로 한 가족이 굶주린다는 내용의 폐단을 상소하였다.
또 벽파(僻派) 김구주(金龜柱)의 탄핵을 주장하여 기강을 바로 세워야 조정을 욕되지 않게 하고, 아래로는 생민(生民)들을 중히 여겨 밝은 세상을 이룩해야 한다고 주장하였다.
또 1790년에 덕천군수로 나아가서는 호구(戶口)와 군정안(軍丁案)의 허실을 지적, 그 병폐를 바로잡아야 한다고 할 정도로 강직하였다. 1803년(순조 3)에 대사간으로 있으면서 대왕대비 김씨의 옳지 않은 명을 거역하다 숙천으로 찬배(竄配: 귀양살이)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