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행이라고도 한다. 감사의 순력은 향읍의 풍속과 민생의 고락을 살피고 왕화(王化)를 선포하며, 하정(下情)을 상달하고 수령의 현부(賢否)를 살피며, 치정(治政)의 득실을 살피는데 목적이 있었다.
고려시대의 5도양계체제는 조선시대에 들어와서 8도체제로 정비되었다. 그러나 변경에 위치하고 있는 특수 지역인 평안도와 함경도를 제외한 6도는 일정하게 감사의 치소(治所)가 설치되지 않았다.
다만 순력시에 일시적으로 휴식하는 곳이 도내의 계수관(界首官) 가운데 가장 큰 고을에 설치되었고, 또 서울에서 ‘도계(到界)’하는 지점과 가까운 곳에 설치되었다. 따라서 도의 감사는 임기 1년 동안 도내의 여러 읍을 항상 순력하였다.
감사의 순력 행차는 대단한 위용을 갖춘 것이어서, 지방에서는 감사의 행차를 구경거리로 여겼다. 행차시에 따르는 인원과 장비를 보면 다음과 같다. 순행에 따르는 부대인원은 장교(將校)·군관(軍官)·나장(羅將)·도사(都事)·찰방(察訪)·심약(審藥)·검률(檢律)·반당(伴倘)·노자(奴子) 등의 몇 백인이었다.
그리고 순행 수단으로 말과 감사마교(監司馬轎)가 있으며, 물품으로는 위엄을 나타내기 위해 둑(纛)과 기(旗)를 앞세우며 나팔·태평소를 불어대고, 사모갑(紗帽匣)·인(印)·병부(兵符)·교서(敎書)·유서(諭書)·절월(節鉞) 등을 함께 가지고 떠난다.
이렇게 감사의 순력 행차는 수행인이 몇 백인, 마필이 100여 필이나 되어서 그 폐단이 매우 컸다. 정약용(丁若鏞)은『목민심서』에서 각 군현의 아전수를 줄이지 못하고, 계방(契房)을 혁파하지 못하고, 전부(田賦)를 감소시키지 못하고, 연호잡역(煙戶雜役)을 줄이지 못하고, 사찰이 황폐해지는 등 부세와 요역이 번거로워지는 모든 폐단이 감사의 순력에서 나온다고 하여 격렬히 비판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