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이 있었던 자세한 위치는 미상이다. 이곡(李穀)이 쓴 중수기에 의하면, 이 절의 창건연대는 미상이나 주변 마을이 생겼을 때부터 있었다고 하며, 그 뒤 여러 차례 폐허가 되었다고 한다.
고려 충렬왕 때 동지민장총관부사(同知民匠摠管府事) 박군(朴君)의 아버지가 사재를 희사하여 폐허화된 절을 중건한 뒤 임금의 복과 아들의 출세를 위해서 기도하였다. 그 뒤 박군은 아버지의 지극한 사랑을 기리기 위해서 이 절을 중수하였다.
공사는 1314년(충숙왕 1)에 시작하여 10년 동안 계속하였으며, 공사감독은 영구(永丘)가 맡았다. 이 때 법당과 요사채·산문·회랑 등을 모두 갖추었다.
절이 완공되자 박군은 좋은 땅 15결(結)을 시주하였고 부인 김씨는 금속화폐 500관(貫)을 시주하여 공양과 향화(香華)를 위한 재산으로 충당하였다. 이때부터 이 절은 선승(禪僧)들의 수도처로 쓰였으나, 그 뒤의 역사는 미상이며, 조선 중기까지는 존립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