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악산(浮岳山) 창락원(昌樂院)이라고도 한다. 이 절의 창건에 대한 사실은 명확하지 않으나 고마[拍]라는 지명과 현재까지 전해지고 있는 연기설화(緣起說話)를 통하여 고구려 또는 백제에서 건너간 이주인들에 의하여 세워진 것으로 추정된다. ‘고마’라 함은 고구려를 생략한 이름인 ‘고려’를 가리키는 음(音)을 빌려서 표기한 차자(借字)이다.
그러므로 이 지역은 예로부터 고구려 계통의 이주인들이 정착하였던 곳으로 일컬어지고 있다. 그러나 창건 연기설화에는 고구려뿐만 아니라 백제와 신라 계통의 사람들도 가담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연기설화는 다음과 같다.
옛날 나라시대[奈良時代]의 쇼무왕[聖武王:724∼749] 때, 이곳 마을에 백제의 지역인 충청남도 온정리에서 이주했다는 온세이[溫井右近]라는 자가 정착하여 살았는데, 그는 이 지역의 처녀인 호녀(虎女)와 혼인을 하였다. 그리고 이 두 사람 사이에서 딸이 태어났다. 이 딸이 13세 가량 되었을 때 고구려 계통의 사람인 복만(福滿)이라는 청년과 열렬한 사랑을 하게 되었다.
이 소문이 마을 전체로 퍼지자 화가 난 딸의 부모는 자신의 딸을 호수 안에 있는 조그마한 섬에 집을 짓고 그 속에 가두었다. 이 사실을 안 복만이라는 청년은 그녀 만나기를 학수고대했으나 섬으로 건널 수 있는 배도 뗏목도 없었다. 그리하여 하는 수 없이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수신(水神)인 심사대왕(深沙大王)에게 빌고 또 빌었다. 그러자 물 속에서 한 마리의 거북이 나타났다. 그리하여 그는 거북이의 등을 타고 섬으로 건너가 그녀를 만날 수 있었다.
이윽고 두 사람은 결합하여 남자아이를 낳았는데, 이 아이는 총명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아이는 자라서 불문(佛門)에 출가하였으며, 그 뒤 중국에 건너가 법상종(法相宗)을 배운 다음 귀국하여 이 절 심대사(深大寺)를 창건하였다고 한다. 개산(開山)의 만공상인(滿功上人)이 바로 이 사람이다.
그 뒤 만공상인은 749년에 부친과 약속한 대로 수신을 권청하여 모시고자 하였으나 수신의 모습을 알 길이 없어 고민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신라에서 건너온 수신의 화상이 있었기 때문에 이를 표본으로 삼아 상을 조각하여 안치하니 그것이 본존의 심사대왕이다. 이 전승에서 알 수 있듯이 사찰의 창건은 고구려계의 사람이나 그의 외조부는 백제계이며, 또 그의 부모를 결합할 수 있도록 도와 준 수신은 신라 신의 모습이었다.
그러므로 이 절은 이 지역에 살던 고구려계의 이주인들이 창건하려 했을 때 백제와 신라 계통의 이주인들도 협력했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이와 같이 사찰 창건을 고구려계가 단독으로 한 것이 아니라 다른 한반도 지역에서 건너간 이주인들과 협력하여 이루어졌음은 이 지역의 구가(舊家)인 이시이(石井) 집안의 문서를 보아도 알 수 있다. 즉, 그 문서에는 고구려와 백제에서 이주한 자들이 심대사의 국보도 가지고 온 것으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현재의 당우로는 절 입구의 산문(山門)과 본당인 대사당(大師堂)을 비롯하여 고리(庫裡)·서원(書院)·종루(鐘樓) 등이 있다. 그리고 보관하고 있는 보물로는 국보로 지정되어 있는 금동석가여래상(金銅釋迦如來像)과 「연기회권(緣起繪卷)」 등이 있다. 「연기회권」은 1650년에 57대 주지인 변성상인(弁盛上人)이 제작한 것이며, 석가여래상은 관동지방에서는 유일하게 남아 있는 7세기의 작품으로 유명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