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속 종파는 고야산(高野山)의 진언종(眞言宗)이다. 사호(寺號)는 청룡산(靑龍山) 덕련원(德蓮院)이며, 본존불은 약사여래불이다. 창건된 시기는 분명하지 않으나 나라시대[奈良時代]초기에 백제 계통의 이주민인 후나[船] 씨족이 자신들의 신앙을 위하여 세운 일종의 씨족사찰이라고 한다. 후나 씨족은 백제 16대 진사왕(辰斯王)의 아들인 진손(辰孫)의 후손으로 일컬어지고 있는 고대 씨족이다.
이 사찰에 관한 문헌의 기록을 살펴보면, 799년 3월에 스가노[菅野眞道]가 이 절의 남쪽 산을 후지이[葛井] · 후나[船] · 쓰[津]라는 세 씨족의 묘지로 사용할 수 있도록 조정에 요청하는 기록을 『일본후기(日本後紀)』에서 찾아볼 수 있다. 이 세 씨족은 모두 공통의 시조를 가지고 있는 백제 계통의 이주민들이다.
그리고 822년경에 성립된 『일본영이기(日本靈異記)』에는 단지히(丹治比)라는 경사(經師)가 이 절에서 『법화경』을 서사(書寫)하고 있던 중, 비를 피하여 들어온 여자와 간음하다 불교 수호신의 벌을 받아 두 사람 모두 죽음을 당하는 이야기가 수록되어 있다. 같은 내용의 설화가 11세기 초의 불교설화집인 『금석물어집(今昔物語集)』에도 실려 있다.
그 뒤 중세에 이르러 이 절에 관한 기록은 그다지 많지 않으나, 『안화전치씨군충장안(岸和田治氏軍忠狀案)』에 의하면 1337년 3월 2일부터 10일까지 이 사찰 부근에서 전쟁이 일어났으며, 이 전란으로 말미암아 사찰의 건물들이 모두 소실되었다. 그 뒤 1600여 년경에 정현(政賢)이 서대사(西大寺)의 승려인 자인(慈忍)을 초빙하여 계율도량(戒律道場)으로 다시 재건하였다.
이때 이 절의 이름을 권학원(勸學院)이라 하였으며, 주로 율종(律宗)을 고취시키는 데 주력하였다. 특히, 그때 그 지역의 유력자인 다카기(高木) · 호조(北條) · 야나기자와(柳澤)라는 세 집안을 이 절의 신자로 귀의시킴으로써 경제적인 안정을 이루게 되었다.
국가지정유산으로 지정되어 있는 경내의 방장(方丈)과 객전(客殿)은 야나기자와 씨족으로부터 기증받은 것이다. 그리고 1746년에는 에도막부(江戶幕府)의 허가를 받아 여법율종윤번소(如法律宗輪蕃所)가 되었으며, 이로 말미암아 율종을 공부하는 비구료(比丘寮) · 사미료(沙彌寮)라는 두 개의 승방을 건립하였다.
현존하는 당우(堂宇)로는 본당인 용호전(龍護殿)을 비롯하여 대사당(大師堂) · 객전 · 식당(食堂) · 지사료(知事寮) · 고리(庫裏) · 승방(僧房) · 종루(鐘樓) · 방장 등이 있다. 이들 대부분의 당우는 1720년대 전후에 세워진 것이다. 중요문화유산으로는 금동미륵보살반가상(金銅彌勒菩薩半跏像)과 지장보살입상(地藏菩薩立像)이 국가지정중요유산으로 지정되어 있으며, 승방과 객전 · 식당은 대판부 지정유산으로 되어 있다.
또한, 경내에 서 있는 산다화(山茶花)는 대판부의 지정천연기념물로 되어 있다. 한편, 옛 사적지에는 남대문(南大門) · 중문(中門) · 금당(金堂)의 유적지와 삼층탑의 초석이 현재까지 남아 있으며, 국가지정사적지로 보존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