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진이 ()

고대사
인물
삼국시대 때, 일본의 유학과 문학 발전에 기여한 백제 왕족 출신의 학자.
이칭
이칭
왕지인수(王智仁首)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미상
사망 연도
미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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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삼국시대 때, 일본의 유학과 문학 발전에 기여한 백제 왕족 출신의 학자.
개설

일명 왕지인수(王智仁首)라고도 한다. 『속일본기(續日本紀)』 연력(延曆) 9년(790) 7월조의 백제왕 인정(仁貞)의 상표문에 의하면, 조상은 백제귀수왕(貴須王 : 근구수왕)의 손자인 진손왕(辰孫王)이며, 오진왕(應神王) 때 왜로 건너왔다고 한다.

생애와 활동사항

진손왕의 큰 아들인 태아랑왕(太阿郎王)은 닌도쿠왕(仁德王)에게 근시(近侍)하였으며, 그 아들이 해양군(亥陽君)이다. 해양군의 아들이 오정군(午定君)이며, 오정군의 둘째 아들이 왕진이이다. 그는 왜로 건너간 백제왕족출신의 집안에서 출생하였다.

553년(欽明王 14) 당시 실권자인 소가(蘇我稻目宿禰)의 명을 받고 배〔船〕에 관한 세금을 기록하였으므로 후네노쓰가사(船長)가 되었다. 또, 이로 인해 후네노후비토(船史)라는 성을 하사받았다.

572년 고구려에서 보내온 외교문서의 내용이 난해하여 왜왕이 그것을 손수 대신에게 주면서 여러 후비토(史 : 문필에 의한 업무를 전문적으로 하는 가문의 사람들)를 불러 모아 해독하게 하였다. 그러나 이들은 3일 안에 모두 해독하지 못하였고, 왕진이만이 훌륭하게 해독하여 왜과 대신 모두로부터 크게 찬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왜왕이 거처하는 전중(殿中)에 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고구려의 외교문서 중에 글자를 까마귀 깃에 써서 보낸 것이 있었으나 아무도 해독하지 못하였다. 그러나 그가 까마귀 깃을 밥김에 쐰 다음 흰 비단 위에 박으니 글자가 또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조정에서 다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그의 박식함과 기지를 잘 보여주는 사화라고 할 수 있다.

유학과 문학으로서의 그에 대한 명성과 기여는 한시집인 『회풍조(懷風藻)』의 첫장에서 “왕인(王仁)이 오진천황 때 몽매함을 인도하기 시작하여, 왕진이가 비다쓰천황 때 가르침을 베푸는 것을 마무리하였다. 드디어 세속으로 하여금 공자의 풍(風)에 젖게 하고, 사람들이 공자와 맹자의 학문을 재촉하게 하였다.” 고 한 평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

마쓰오카야마(松岳山)고분에서 출토된 오코비토(王後首)의 묘지명을 통해 그의 후손들은 재정이나 문필·외교면에서 활약했음을 알 수 있다. 그 후예 씨성(氏姓)인 후네노무라치(船連)의 중심 근거지는 지금의 오사카(大阪)의 가와치(河內)지역이 된다.

참고문헌

『일본서기(日本書紀)』
『속일본기(續日本紀)』
『회풍조(懷風藻)』
『日本の中の朝鮮文化』 2(金達壽 , 講談社, 1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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