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는 국제사회에서 교섭을 통해 국가간에 맺는 일체의 관계이다. 전통시대 우리의 외교는 중국과의 조공외교가 주를 이루었다. 조공제도는 중국이 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특수한 제도로, 외국의 왕을 책봉하고 조공을 받는 의례적 성격이 강한 것이었다. 근대적인 외교관계가 본격화하기 전까지 우리는 조공외교의 틀 안에서 자주적인 외교를 펼쳐왔다. 원나라 간섭기와 일제강점기에 자주적 외교권이 일시 박탈된 적도 있지만 광복 후 눈부신 경제발전과 더불어 나라의 위상이 높아지면서 현재는 국제사회의 주요 외교 주체로서 활발한 외교활동을 펴고 있다.
외교는 극히 다양한 의미를 가지지만 여기서는 한 나라의 대외관계의 처리방법, 혹은 대외정책 그 자체를 가리키는 용어로 볼 수 있다.
선사시대 한반도의 문화는 주로 북아시아와 관련이 깊었으나 차츰 중국대륙과의 관련이 깊어졌고, 특히 위만(衛滿)과 한무제(漢武帝)의 침입으로 중국과 접촉이 많아지면서 한사군의 하나인 낙랑군(樂浪郡)에는 중국식 문화가 이식되었다.
고조선의 여러 종족을 포함하여 중국의 동쪽에 있던 여러 민족을 중국인들은 주로 동이(東夷)라고 불렀으며, 중국 선진(先秦)의 문헌에는 동이와의 관계에 대한 많은 기록이 있어서 고조선의 여러 민족도 일찍부터 중국과 접촉하고 있었으리라고 생각된다. 특히, 고조선의 여러 종족 중에서 예맥(穢貊)은 다른 종족보다 일찍이 중국의 기록에 나타나는데, 중국의 금문(金文)에 맥(貊)에 관한 기록이 보이며 이 맥인들은 중국의 동부에도 살고 있었다고 한다. 고대의 중국인은 동이를 대하여 다른 이민족에 비하여 문화의 수준이 높다고 생각해 친근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공자(孔子)도 『논어』에서 “동이가 있는 곳에 살겠다(欲居九夷).”고 하였고, 『맹자』에서는 중국의 전설적인 현군 순(舜)도 동이 사람이라고 하였다.
‘조선’이라는 이름이 중국의 기록에 처음 보이는 것은 전국시대(서기전 403∼221)에 이루어진 『전국책(戰國策)』 · 『관자(管子)』 등이며, 이들 기록에 따르면 조선은 전국시대의 연(燕)나라의 동쪽에 있고, 호랑이와 표범의 가죽을 산출하여 그것을 중국에서 소중히 생각하였다고 한다. 중국의 은(殷)나라가 망한(서기전 11세기 말) 뒤에 주(周)나라의 무왕(武王)이 은나라 왕실의 친척인 기자(箕子)를 조선에 봉하였다고 하여 이것을 기자조선이라고 한다.
그런데 기자가 봉하여졌다는 기록은 전한(前漢) 때의 문헌인 『상서대전(尙書大傳)』과 『사기』에 처음 보이는데, 이것은 은나라가 망하고 800여 년이 지난 후의 기록이며, ‘조선’이라는 명칭도 은나라가 망한 뒤 적어도 600년 이후의 기록에 보이기 때문에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것은 후대에 조작된 전설일 가능성이 많다. 또 중국의 금문에 ‘기후(箕侯)’와 ‘고죽(孤竹)’의 명문(銘文)이 보이며, 고죽국은 옛날 조선의 지역과 가까워서 이것을 기자조선에 대한 긍정적 자료로 삼으려 하는 견해도 있으나, 여기서도 기자가 조선에 봉하여졌다는 정확한 증거는 없다.
전한의 초기에 한의 제후국인 연나라 사람 위만이 조선에 와서 기자조선을 멸망시키고 서기전 194년 위씨조선을 세웠다. 그가 멸망시킨 나라가 기자조선이라는 것은 믿기 어려우나 새로 나라를 세운 것은 사실이며, 위만이 조선에 올 때 상투를 틀고 있었기 때문에 그도 동이계통의 사람일 것이라는 설도 있다. 위씨조선은 80여 년 계속되다가 한무제의 침입으로 멸망하였다. 한무제는 정복욕이 강하여 자주 북쪽의 흉노(匈奴)를 정벌하고, 남으로 남월(南越) · 서남이(西南夷)를 정복하고, 드디어 조선에 침입하여 위씨조선을 멸망시키고 이곳에 한의 4군(四郡)을 두었다.
한의 침입군은 실전에서 패하여 그 장군들은 다 처형되거나 처벌을 받았는데, 오히려 조선측의 내분으로 위씨조선이 망하였으며, 한무제는 조선의 세력을 경시하기 어렵다는 것을 알고, 이를 견제하기 위하여 조선의 대신들을 5명이나 한나라의 제후(諸侯)로 봉하였다. 조선 땅에 설치되었던 4군은 조선의 세력에 굴복하여 설치된 지 20여년 만에 4군 중의 2군은 폐지되고, 현도군(玄菟郡)은 쫓겨서 서북으로 옮겨갔으며, 한반도 안에는 겨우 낙랑군만이 그 서북쪽에 남게 되었다.
한반도는 선사시대로부터 만주를 통하여 북아시아의 선사문화를 받아들여서 한반도 각지에서 발견되는 청동기 · 토기, 그리고 석관묘(石棺墓)는 북방계통으로 알려지고 있다. 한편 벼농사는 중국에서 전해졌으며, 이와 관련하여 석기 · 청동기의 농구는 중국에서 전하여진 것으로 생각되는 것이 많다. 철기는 기원전 6세기경에 중국에서 사용되기 시작하였으며, 전국시대에는 한반도에서도 철기, 특히 철제의 농기구가 사용되어 농업생산이 증대하였다. 그리하여 부(富)의 축적은 정치체제에도 영향을 미쳐서 한반도의 성읍국가(城邑國家)가 통합되어 연맹체(聯盟體)로 발전하게 되었다.
한편, 낙랑군은 지금의 평양 서남쪽에 군치(郡治)를 두고 중국식 행정관리를 임명하였으며, 중국의 상인들이 내왕하여 중국식 도시를 건설하였다. 그리하여 낙랑의 유적과 출토된 유물들은 당시 중국문화의 일면을 잘 나타내고 있다. 낙랑군은 인접한 한(韓) · 예(濊)의 지역에 대하여 어느 정도 정치적 영향을 미치고 또 경제적 교류도 있었으나, 주변에 대한 영향력은 큰 것이 아니었다. 낙랑군의 세력은 3세기 중기에는 약화되고, 이보다 앞서서 요동(遼東)의 공손씨(公孫氏)가 낙랑군의 남쪽에 대방군(帶方郡)을 두었으나 그 규모와 세력이 낙랑군에 미치지 못하고, 2군이 다 4세기 초에 소멸되고 말았다.
우리나라 고대 3국 중에서 고구려는 이미 서기전 1세기에 국력이 성장하여 자주 중국을 괴롭혔으며, 부여는 중국과 대체로 우호적인 관계에 있었다. 중국 3국의 위나라(魏, 220∼265)는 한때 고구려의 수도를 함락시키고 한반도에 침입한 일이 있으나 4세기 초에 고구려는 한반도에서 한의 4군의 여세를 몰아내고, 그 영역은 서쪽으로 만주의 요하(遼河)까지 이르고 중국의 통일국가인 수(隋)나라의 침입을 여러 번 격퇴하여 우리나라의 대외항쟁의 역사를 빛나게 하였다. 그러나 고구려 · 백제 · 신라 3국의 오랜 항쟁으로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의 연합군에 의하여 663년 백제에 이어서 668년 고구려가 망하고, 신라가 한반도를 통일하기에 이르렀다.
약 7세기에 걸친 이 시기의 중국과의 접촉에서 중국의 문화를 받아들였다. 그리하여 한문화가 수용되고 중국문화의 핵심인 유교문화, 그리고 중국을 통하여 불교를 받아들여서 후대 우리나라 문화의 큰 바탕을 이룩하였다. 한편, 우리나라는 일본의 초기 국가에 많은 영향을 미쳤고, 한문화와 불교를 전하여 문화적으로 많은 은혜를 베풀었다.
부여는 일찍이 국가의 체제를 정비하고 중국과 접하고 있어서 기원전 1세기의 기록인 『사기』에 그 이름이 보이고, 서기 49년에 부여왕이 후한(後漢)의 광무제(光武帝)에게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부여왕은 낙랑군과 현도군을 공격한 일도 있으나(111 · 167), 중국과는 대체로 우호적이었으며, 122년 고구려가 현도성을 포위하였을 때 부여왕은 원병으로 이를 구원하기도 하였다. 200년경 부여왕 위구태(尉仇台)는 공손탁(公孫度)과 혼인관계를 맺고, 244∼245년 위나라의 관구검(毌丘儉)이 고구려를 칠 때에 위나라 군사를 환영하고 군량을 공급하였다. 그러나 3세기 말에는 서쪽으로부터 선비족(鮮卑族) 출신의 모용씨(慕容氏)의 침략을 받고, 이어서 남으로 고구려의 침략을 받아서 4세기 말에는 고구려에 속하게 되었다.
고구려는 부여족의 일파로 처음에는 송화강(松花江) 유역에 살고 있다가 기원전 2세기경에 예맥족이 살고 있던 압록강 중류유역으로 남하하였다. 예군(濊君) 남려(南閭)는 기원전 128년에 인구 28만을 거느리고 한나라에 투항하여, 한은 이곳에 창해군(蒼海郡)을 설치하였다고 하나, 2년 뒤에 창해군이 폐지된 사실로 미루어보면 중국식으로 과장된 기록이라고 믿어진다. 『삼국사기』에 고구려의 건국을 기원전 37년이라고 하고 있는데, 아마 이 무렵에는 고구려의 세력이 커져서 나라의 체제가 잡히고 또 왕호(王號)를 쓰게 될 정도로 발전하였다고 생각된다.
이 무렵에 한나라의 국력은 약하여지고 서기 8년 드디어 외척인 왕망(王莽)은 나라를 빼앗아 신(新)왕조를 세웠다. 그러나 예맥과 흉노들은 계속하여 중국의 변방을 침범하였으므로 왕망은 흉노를 정벌하기 위하여 고구려에 원병을 청하였으나, 고구려가 이에 응하지 않으므로 왕망은 일방적으로 고구려를 하구려(下句驪)로 개칭하고 고구려의 왕을 후(侯)로 격하하였으나 예맥의 침범은 더욱 심하여졌다.
고구려는 1세기 중기에는 한사군의 현도군과 임둔군의 명목상의 지배하에 있던 옥저(沃沮)와 동예(東濊)를 그 지배하에 넣고, 요동지방으로 진출하여 후한의 요동군과 현도군을 계속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앞서 함경도 방면에서 서북방 소자하(蘇子河)유역으로 옮겼던 이른바 제2현도군은 106년 다시 서쪽으로 이동하였다. 그 후에도 현도와 요동의 군사를 격파하고, 121년 요동태수(遼東太守) 채풍(蔡諷)을 죽이고, 또 요동의 서안평(西安平)을 침범하여 146년 대방령(帶方令)을 죽였다. 그 뒤 172년에 후한은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에 침입한 일이 있었으나 격퇴당하였다.
중국은 후한 말에, 밖으로는 고구려 · 선비 · 흉노 등의 침입이 잦고, 안으로는 이른바 군웅이 일어나 난세가 되었으며, 요동지방에서는 공손씨가 하나의 독립세력을 이루고 고구려와 싸우고 한(韓)나라와 예(濊)를 침입하기도 하였다. 후한의 뒤를 이은 3국의 하나인 위나라 정시연간(正始年間, 240∼249)에 고구려가 여러 번 위나라를 침범하였는데 정시 5년, 즉 고구려의 동천왕(東川王) 18년(244)에 위나라의 유주자사(幽州刺史) 관구검이 2만 명의 병력으로 현도군치(撫順)를 떠나 비류수(沸流水)에서 고구려군과 싸우고 수도 환도성(丸都城)을 함락하였으나 왕은 피신하여 화를 면하였다. 다음해 다시 현도태수 왕기(王頎)가 침략하여 왕은 멀리 옥저로 피난하였으며, 왕기의 군은 옥저에까지 이르렀으나 고구려의 장수 밀우(密友)와 유유(紐由)의 분전으로 침입군은 격퇴되었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晋)나라는 위나라와 마찬가지로 적극적인 동방정책을 펴려고 하였으나 선비 · 흉노 등 여러 북방민족의 침입으로 곤경에 빠졌으며, 고구려도 302년 현도군을 공격하고, 311년 서안평을 쳤으며, 313년 낙랑군 또 이듬해 대방군을 몰아내어 옛날의 고조선 땅을 회복하기에 이르렀다. 진나라가 망하고 그 일족이 317년 양자강(揚子江) 남쪽에 동진(東晋)을 세운 뒤 북중국에는 5호16국이 난립하고, 이어서 북위(北魏) · 북제(北齊) · 북주(北周)가 일어나고, 남중국에는 동진의 후예 송(宋) · 제(齊) · 양(梁) · 진(陳)이 흥망하는 남북조시대가 되고, 581년 수나라가 일어나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한반도에서도 고구려 · 백제 · 신라의 3국이 정립하고 있었다.
5호16국의 하나인 선비족 모용씨의 전연(前燕)은 342년(고국원왕 12) 고구려의 수도를 약탈하고 고구려왕을 책봉하는 조공관계를 가지게 되었다. 조공제도는 중국이 외국과 우호관계를 유지하는 특수한 제도로, 외국의 왕을 책봉하고 조공을 받는 매우 의례적인 것으로 19세기에 이르러 근대적인 대외관계를 가질 때까지 인접국가와의 사이에 유지한 중국 특유의 제도인데, 남북조시대에 차츰 제도화되고 있었다. 전연이 망한 뒤 북중국에 세력을 펴고 있던 전진(前秦)과 고구려는 친선관계를 맺었으나, 모용씨가 새로 세운 후연(後燕)과는 다시 적대관계에 놓이게 되었다. 고국양왕(384∼391)은 대군을 보내 385년 요동성과 현도성을 함락시켰다. 고국양왕 다음에 왕위에 오른 광개토왕(391∼412)은 후연을 요하의 서쪽으로 몰아내고, 후연은 드디어 고구려 출신의 신하 고운(高雲)에게 나라를 빼앗기기에 이르렀다.
장수왕(413∼491)의 시기는 고구려의 전성기로서, 북중국을 통일한 북위와 처음에는 우호와 적대의 관계가 일정하지 않았으나 5세기 후기에 와서는 평화적 관계가 유지되었다. 그러나 장수왕은 한편으로는 북위를 견제하기 위하여 남조 송나라의 청에 의하여 군마(軍馬)를 보낸 일도 있고, 북위와 적대하고 있던 흉노의 별종인 유연(柔然)과도 통하였다. 고구려는 6세기에는 중국 북조의 북제 · 북주와 통교하고, 남조의 양 · 진과도 평화관계를 유지하였다.
한편, 백제는 4세기 후기에 그 세력이 커져서 남조의 동진과 통하여 북의 고구려를 견제하고 동남의 바다 건너 구주(九州)에 세워진 왜(倭)의 여러 나라와도 통교하였다. 이 왜의 나라들은 백제의 유망민들이 세운 나라로 추측된다. 백제는 가야와 신라를 치기 위하여 왜의 군대를 이용하였으며, 그러한 목적으로 397년 왕자(뒤의 腆支王)를 왜에 보내기도 하였다. 같은 무렵, 신라도 왕자를 왜에 보냈다. 현재 일본 나라현(奈良縣)의 한 신궁(神宮)에는 칠지도(七支刀)가 보관되어 있는데, 이것은 4세기 후반에 백제왕이 왜에게 하사하기 위해 만든 것이라고 믿어지며, 당시의 백제와 왜와의 관계를 이해할 수 있는 좋은 증거이다.
일본의 문헌에는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라는 것이 보이며, 일본의 학자 중에는 당시 일본세력이 가야를 중심으로 한반도의 남쪽을 지배한 것처럼 꾸미는 사람도 있었으나 근래에는 일본인 학자들도 그것을 부정하며, 당시의 한반도 실정으로 보아 그런 가능성은 없었다. 중국의 역사 기록인 『송서(宋書)』 · 『양서(梁書)』 등에는 고구려가 요동지방을 차지하고, 백제가 요서(遼西)지방을 차지하였다고 하며, 또 우리나라의 학자들 중에서도 백제가 수군으로 중국 동부의 강소(江蘇) · 절강(浙江)지방을 차지한 일이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이 있다. 이것이 요서경략설(遼西經略說) 또는 화북진출설(華北進出說)인데, 이에 대하여 기록의 착오라며 반론을 제기하는 입장도 있다.
한반도에서 3국이 서로 각축하고 있을 때 중국도 남북조의 혼란기였는데, 581년 드디어 수나라가 중국을 통일하게 되었다. 이 무렵 바이칼호 근방의 오르콘하(Orkhon河) 유역에서 일어난 터키족의 돌궐은 유연을 대신하여 북쪽에서 만주와 몽골에 걸친 큰 제국을 건설하였다. 한편, 백제는 표면상 수나라와 친화를 유지하면서 내용적으로는 이를 경계하고 왜와 연결하였는데, 고구려도 왜에 사신을 보내 접근하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고구려 · 백제와 돌궐 · 왜의 세력이 수나라에 대항하여 연결되는 반면 신라는 오히려 수나라에 접근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와 그 뒤를 이은 당나라의 여러 번에 걸친 고구려 침입이 시작되었다.
수나라가 고구려를 침입하기에 앞서 고구려는 598년(영양왕 9)에 말갈의 군사를 동원하여 요서지방을 공격하였다. 그리하여 수나라 문제는 30만의 대군으로 고구려를 원정하였으나 큰 타격을 받고 철수하였는데, 생존자는 그 10분의 1밖에 되지 않았다. 문제의 뒤를 이은 양제는 더욱 원정준비에 주력하였다. 양자강과 황하를 연결하는 대운하의 수리는 이미 문제 때에 시작한 것인데, 양제도 계속 수리하여 남방의 양곡과 군대를 수송하여 원정에 대비하였다. 여러 해에 걸쳐 준비한 결과 612년에 113만여 명의 대군으로 요동성을 공격하였으나 실패하고, 따로 수군 4만 명을 파견하여 평양성을 공격하고 또 30만을 이에 가담시켰다. 그러나 평양성의 공격에도 성공하지 못하고 회군하기 시작하였는데, 고구려의 명장 을지문덕의 살수대첩(薩水大捷)은 이 때의 일이다.
다음해에 수는 요동성을 20여 일에 걸쳐 공격하고 평양으로 진격하였으나 마침 국내의 반란으로 철수하고 말았다. 오히려 이 때에 수나라의 병부시랑(兵部侍郎: 국방차관격)이 고구려로 망명하였다. 다음해인 614년 수양제는 제3차 원정군을 보내어 평양성으로 향하였으나, 망명한 병부시랑을 돌려보내는 조건으로 화의가 성립되었다. 다음해에도 양제는 원정을 계획하였으나 결국 단념하고 말았다. 고구려 침입의 실패가 큰 원인이 되어 수나라는 망하게 되고 당나라가 이를 대신하였다.
당나라 고조 때에는 고구려와 당나라가 평화를 유지하였으나 태종은 야심이 많은 인물이었다. 이에 대비하여 고구려는 요동지방에 1,000리에 걸치는 장성을 16년이나 걸려서 쌓기도 하였다. 드디어 태종은 오랜 준비 끝에 644년 요동에 침략군을 보내고, 다음해에 대군을 이끌고 침입하여 요동성을 함락시켰으나, 작은 산성인 안시성(安市城)을 50만 대군으로 2개월이 지나도록 굴복시키지 못하고 결국 철군하고 말았다. 2년 뒤에 태종은 다시 고구려를 침입할 계획이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장기전을 택하기로 하였다. 그 뒤 당나라 고종은 거듭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663년 드디어 신라와 당나라 연합군은 백제를 멸망시키고, 이어서 668년 고구려도 멸망시켰다.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나라는 고구려의 옛땅에 9도독부(九都督府)를 두었고 또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었는데, 그것은 고구려의 옛땅뿐만 아니라 백제의 땅과 신라까지 그 지배하에 두기 위한 것이었다. 그러나 신라가 그것을 용인하지 않았다. 고구려가 망한 직후로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고구려의 옛땅을 지배하기 위한 분쟁이 일어났다. 신라는 고구려를 부흥하려는 검모잠(劍牟岑)을 도와서 당나라의 세력을 쫓아내려고 하며, 고구려의 왕족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봉하기도 하였다. 또, 백제 땅에 주둔한 당나라 군사와 싸워서 이를 격파하였다. 드디어 고구려가 망한 8년 뒤인 676년에 신라는 당나라 군사를 한강유역에서 몰아내니, 당나라는 안동도호부를 만주로 옮겨서 대동강 이남지역을 신라가 지배하는 것을 인정하여 한반도의 통일이 대체로 이루어지게 되었다.
우리나라 삼국시대의 한중간의 문화관계를 보면, 첫째로 한자(漢字)문화가 계속하여 들어왔다는 사실이다. 한중간의 교류가 이때부터 이루어졌고, 고구려 초에 편찬된 『역사』는 한문으로 된 것이라고 생각되며, 따라서 한자문화의 보급이 일찍부터 널리 행하여졌음에 틀림없다. 삼국은 모두 그 가족제도와 국가체제상 유교적 이념과 제도, 그리고 그 윤리가 요청되어 고구려에서는 이미 4세기 후반에 태학(太學)을 세우고 유학을 교육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유교의 경전을 비롯하여 『사기』 · 『한서(漢書)』 등의 역사서적, 사전과 문자에 관한 서적이 들어왔다. 백제에서도 중국 한나라와 같이 오경박사(五經博士)를 두었으며, 한편 일본에 한문과 유학을 전하여주기도 하였다. 또, 한자를 이용하여 우리 고유의 명사나 용어를 표기하는 방법도 고안하였다.
한자 및 유교문화와 더불어 중국에서 들어와 우리 문화에 크게 영향을 미친 것이 불교이다. 불교가 처음 우리나라에 전하여진 것은 고구려에서 태학이 세워진 것과 같은 해인 372년이며 중국의 전진에서 이때에 불상과 불경이 전하여졌다. 또한 12년 뒤에는 동진으로부터 백제에 승려가 와서 불교를 전달하였다. 신라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은 그보다 늦으며, 처음에는 불교 수용에 반대가 있어서 이차돈(異次頓) 같은 순교자도 나타났으나, 3국에서 다 불교가 성하게 되었다. 불교는 토속신앙과 결부된 점도 있으나 호국신앙으로서의 불교의 구실은 매우 크며, 불교미술을 중심으로 하는 불교문화는 우리 문화의 유산 속에서 매우 큰 비중을 차지한다.
고대의 중국은 이민족의 내왕과 문물교류에 있어서 비교적 개방적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의 많은 승려와 학자가 중국에 가서 불교와 유학을 배우고, 그 경전을 가져왔으며, 최치원(崔致遠)과 같이 그곳에 가서 수학하여 과거에 합격하고 문필로 활약한 인물도 많으며, 고선지(高仙芝)와 같이 무장으로 용명을 날린 사람도 있다. 그가 멀리 파미르고원 서쪽으로 원정하였을 때 그의 부하들이 중국의 제지술(製紙術)을 서방에 전달하여, 서방의 문화발전에 큰 공헌을 한 것은 유명한 사실이다.
진(秦) · 한(漢)의 통일 이후로 중국의 이민족에 대한 조공관계는 서서히 제도화하여 갔는데, 조선의 3국과 중국의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4세기 이후에 점차 정비되어 갔다. 중국의 조공제도는 오랜 세월을 거쳐서 명(明) · 청(淸)시대에 이르러 완비되는데, 그 완비되는 과정에서 여러 가지 특징의 일부가 중국의 3국에서 남북조를 거쳐서 수 · 당에 이르는 시기, 즉 우리나라의 3국과 통일신라의 시기에 나타난다. 고구려는 주로 중국 북조의 여러 나라와, 백제와 신라는 주로 남조의 여러 나라와 조공관계를 가졌으나, 그것은 계속적인 관계가 아니었으므로 조공관계가 아닌 일반적인 관계의 시기가 많았으며, 특히 고구려는 중국과 자주 전쟁을 했기 때문에 더욱 그렇다.
당나라가 개방적이었던 관계로 중국의 산둥반도와 그 밖의 지역에는 신라인의 거류지, 즉 신라방(新羅坊)이 있었고, 그들 거류민은 오늘날의 치외법권과 같은 특권을 누리고 있었다. 이들 거류민과 그 밖의 인물의 내왕은 신라의 선박에 의하였으며, 일본인의 중국 내왕도 유명한 장보고(張保皐) 부하의 선박에 의하였으니 당시의 중국과 한국 및 일본 사이의 해상권은 신라인이 잡고 있었던 것이다. 『입당구법순례행기(入唐求法巡禮行記)』라는 책을 남긴 일본 승려 엔닌(圓仁)도 두 차례 중국을 내왕하는 데 신라인의 배를 이용하였다.
한편, 한반도와 일본열도 사이의 접촉은 선사시대나 초기 부족국가시대로부터 시작되었다. 한반도와 서부 일본에서 발견되는 고고학상의 유물 중에서 특히 지석묘(支石墓) · 옹관(甕棺), 그 밖에 도검(刀劍) 등 많은 금석기의 출토로써 고대의 문물교류를 알 수 있고, ‘구니비키[國引]’의 전설을 비롯한 여러 전설로써도 피차의 교류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 또 일본의 북구주(北九州)와 야마토[大和]지방의 부족장들이 한사군과 접촉한 사실과 일본의 국가기원에 관한 기마민족설(騎馬民族說) 등도 두 지역의 내왕 · 교섭을 알려주고 있다. 일본의 초기 부족국가의 지배층에는 한민족 출신이 많았으며, 그 초기의 집권국가에서 중추적 역할을 한 것은 고도의 문화수준에 이른 한민족이었다.
당시 일본은 주로 우리나라를 통하여 대륙의 발달한 토목기술을 수입하고 개간사업을 일으켰으며, 쇠붙이 농구를 이용하여 농업을 발달시키고, 쇠붙이를 달구어 온갖 기구를 만드는 법과 조선술 · 양조법 등을 배워, 한반도의 여러 가지 공장(工匠)들에 의하여 기술상으로 야마토 정권의 기초를 이루었다. 유교문화의 전달에 있어서도 백제의 아직기(阿直岐) · 왕인 등은 『논어』와 『천자문』을 전하고, 백제의 오경박사가 일본 유학발전의 터전을 마련하였으며, 유교의 정치사상은 당시 일본 집권국가의 정책으로 채용되었고, 뒤에 일본의 율령국가(律令國家)의 정치이론을 마련하게 하였다. 한(漢)문화와 유교뿐만 아니라 불교의 교리와 그 미술 · 건축도 백제와 고구려를 통하여 전달되었다. 그 밖에 여러 가지 학술과 기술에 관한 전문가와 기술자, 그리고 서적 · 기구가 동류하여 일본의 정신문화 · 기술문명의 바탕이 이루어졌다.
이렇듯 일본의 통일국가 형성과 문화발전에 있어서 한민족이 결정적 영향을 미쳤는데 한민족의 정치적 · 문화적 우세는 절대적이었으며, 일방적인 문화전파였다. 그러나 정치적 · 문화적 우세에도 불구하고 한민족은 그것을 이용하여 일본을 위압하거나 강요하는 일이 없었다. 오히려 정치적 · 문화적 선진국으로서의 긍지로 후진국을 선도하였다.
그 뒤 일본이 동아시아 문화권의 중심지였던 수나라와 당나라에 직접 조공사신을 보내어 그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게 되면서 우리나라와의 교섭은 줄었다. 당시 일본의 수도였던 헤이안(平安: 지금의 京都)을 중심으로 나타난 정치와 문화의 양상은 마치 당나라의 그것을 축소시켜 놓은 듯이 중국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일본의 중국화는 오래 계속되지 않고, 점차로 일본 고유의 것을 되찾게 되었다. 한편, 일본의 왜구가 우리나라의 동남해안에 침구하여 노략질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고려가 건국하였을 시기에 중국에서는 오대(五代) 혼란기의 왕조인 후량(後梁)의 시기였으며, 그 뒤 반세기를 거치는 동안 후당(後唐) · 후진(後晋) · 후한(後漢) · 후주(後周)의 여러 왕조가 흥망하고 난 다음에 송나라가 건국하였다. 이와 같이 한반도와 중국에서 새로운 왕조가 일어났으나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는 근본적인 변화가 없이 전통적인 관계가 계속되었다. 여기서 전통적인 한중간의 관계라고 하는 것은 유교문화를 중심으로 한 제반문물의 계속적인 접촉과 중국에서 이루어놓은 특수한 대외적 접촉방식, 이른바 조공제도에 의한 관계를 뜻하는 것이다.
한중간의 전통적 관계에 있어서 근본적인 변질이 없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가 시작되었다고 하나, 어떠한 변화가 일어날 가능성은 있었다. 대외관계의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왕조가 한족의 왕조인가 또는 이민족의 왕조인가 하는 점이다. 오대의 여러 왕조 중의 일부는 이민족의 왕조였으나, 그들이 중국을 지배하는 기간은 매우 짧아서 역사의 큰 흐름으로 볼 때 송 초의 대외관계는 그 앞의 오랜 한족의 통일왕조였던 당나라의 대외관계와 같은 성격이었다. 이 점은 요(遼)나라나 금(金)나라의 고려와의 관계와 비교하거나, 특히 몽골과 고려와의 관계와 비교하여 보면 크게 다르다는 사실을 쉽게 알 수 있다.
한중간의 관계에 변화를 가져올 수 있는 또 하나의 중요한 요소는 중국의 개방성 또는 폐쇄성에 대한 문제이다. 당나라는 개방적인 국가이며 이질적 요소에 대하여 관용적인 태도를 취하여 그 이질적인 것을 흡수하고 동화시킬 수 있었다. 송 초에는 그러한 개방적인 태도가 계승되었으나 북방의 요 · 금 등 이민족 국가의 성장으로 그 개방성이 점차 폐쇄성으로 옮겨갔다. 송나라가 북송과 남송을 합하여 3세기 이상 계속하는 동안 북방민족 세력의 영향으로 그 대외관계가 개방성에서 폐쇄성으로 옮겨 갔으며, 송 · 고려 관계가 질적으로 변화를 일으킨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고려의 송나라와의 관계를 살펴보기에 앞서서 고려와 오대의 여러 왕조와의 관계를 들어 본다. 고려가 처음 중국과 교섭을 가진 것은 923년(태조 6)의 일이며, 복부경(福府卿) 윤질(尹質)이 오대의 첫 왕조인 후량(後梁)에 가서 오백나한상(五百羅漢像)을 가져온 일이다. 3년 뒤에는 장빈(張彬)이 다음 왕조인 후당에 사신으로 간 뒤 여러 번 사신내왕이 있었으며, 형식적으로 그 책봉을 받고 연호를 사용하였으며, 937년 이후에는 후진(後晋)과 사신의 내왕이 있었다. 후한(後漢)을 거쳐 후주(後周)와의 사신내왕도 빈번하였다. 사신이 내왕할 때에는 조공 · 사여의 형식으로 두 나라의 조정 사이에 물품교환이 있었다.
한편, 두 나라 사이의 물품교환은 조공 · 사여의 형식을 벗어나 일반적인 교역이라고 할 수 있는 경우가 많았다. 그 예로 929년에 후당(後唐)으로 간 장분(張芬) 등 53인의 사행은 향로(香爐) · 도검(刀劍) · 마필(馬匹) · 백저(白紵:흰 모시) · 백전(白氈: 흰 모포) · 두발(頭髮) · 인삼 · 향유(香油) · 전도(剪刀: 가위) · 송자(松子: 잣) 등 광범한 종류의 물자를 가져가고, 후당으로부터 역서(曆書) · 은기(銀器) · 비단 등을 가져왔으며, 때로는 중국의 청주(靑州)에서 무역을 한 일도 있다. 958년에는 후주의 상서원외랑(尙書員外郎) 한언경(韓彦卿)이 비단 수천 필을 가지고 와서 동(銅) 5만 근과 자수정 · 백수정 각 2,000개를 받아간 일도 있다.
이와 같은 조공관계의 사신내왕과 그에 따르는 물품교환 이외에 두 나라 사이에는 일반적인 접촉과 교류도 자주 있었다. 이미 고려의 태조가 즉위한 다음해인 919년에 중국 남쪽에 있는 오월(吳越)의 백성이 고려로 건너온 일이 있었고, 956년에는 후주 사신의 한 사람인 쌍기(雙冀)가 병으로 귀국하지 못하고 고려에 남아서 관리로 임명되었으며, 이어서 그의 아버지 쌍철(雙哲)도 고려에 귀화하였으며, 많은 중국인이 귀화하였다.
대체로 문화적으로 중국이 선진국이어서 유교나 불교의 경전도 중국에서 우리나라로 들어오는 일이 많았으나 때로는 그 반대현상도 나타난다. 즉, 중국에서는 당 말과 오대(吳代)의 혼란기에 많은 서적이 없어져서 959년에는 고려에서 별서효경(別序孝經)을 비롯한 여러 가지 서적을 후주에 보낸 일이 있었다. 또 송나라가 건국한 960년에 오월의 국왕은 천태종의 교권(敎卷)이 없어서 그것을 고려에 구하여, 고려에서는 승려 제관(諦觀)을 보내어 천태종의 논소(論疏) 등을 전함으로써 중국에서의 천태종의 고려가 다시 밝혀지게 되었던 것이다. 이 때 오월의 왕은 이를 구하기 위하여 50종의 보물을 보내왔다고 한다.
고려와 오대의 여러 나라와의 관계는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로 연장되었다. 고려와 송나라가 국교를 열게 된 것은 송나라의 태조 조광윤(趙匡胤)이 선양(禪讓)의 형식을 빌려서 후주를 멸망시키고 건국한 2년 뒤인 962년에 고려의 광종이 광평시랑(廣評侍郎) 이흥우(李興祐)를 송나라에 사신으로 보냄으로써 시작된 일이다. 그 뒤 약 30년 동안 사신이 내왕하며, 형식적인 책봉과 연호의 사용이 행하여지며, 또 공물과 사여의 교환이 있었다.
이 기간에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에 있어서 발생한 중요한 사건은 송나라가 고려에 대하여 원병을 청하여 고려가 이에 응하였던 일이다. 송나라가 고려와 국교를 맺게 된 것은 일반적으로 전통관계의 계속이라고 할 수 있으나, 송나라로서는 특수한 이유가 있었다. 후당을 세운 석경당(石敬塘)은 거란의 원조에 대한 대가로 중국 북부의 연운(燕雲) 16주를 거란에 양도하였던 것인데, 송나라 태종은 979년에 이 지역을 회복하려다가 크게 패하였고, 다시 회복할 기회를 엿보면서 고려의 환심을 사기 위해 노력하였다. 드디어 986년에 거란의 연소한 황제 성종(聖宗)의 즉위를 이용하여 원정군을 일으켰는데, 이 원정에 앞서서 송나라는 한국화(韓國華)를 고려에 보내어 원병을 청하였던 것이다. 고려는 드디어 그 청에 응하였으나 고려군은 적극적인 활동은 하지 않았던 것 같다.
한편, 고려는 거란의 침구로 거란과의 관계를 끊고 1016년에는 그 사신이 압록강에 이르렀으나 이를 받아들이지 않고 거란의 연호 대신 송의 연호를 다시 채용하기에 이르렀다. 그러나 당시 고려는 이념상으로는 송나라와 관계를 유지하려고 하였으나, 현실적으로는 거란의 압력에 대항하기 어려워서 2년 후인 1018년에는 다시 거란에 사신을 보내어 화의를 청하기에 이르렀다. 거란은 이에 응하지 않고 또다시 제3차 고려침입을 감행하여 드디어 고려와 거란과의 국교가 성립되었고, 이에 따라 고려와 송나라의 공적인 관계는 단절되고 말았다. 두 나라의 국교단절은 그 뒤 약 50년간 계속되었다. 이와 같이 고려와 송나라의 관계는 993년 거란의 제1차 고려침입 이후 거듭 단속(斷續)되고 드디어 제3차 침입으로 단절되었으나, 공적인 국교가 단절되었다고 하여 모든 접촉과 교섭이 끊어진 것은 아니었다.
송 초에 고려와 국교가 열렸을 때 고려의 국자감(國子監)에 입학하고, 송나라에서 과거에 합격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김행성(金行成) · 최한(崔罕) · 왕림(王琳) 등이 그 예인데, 국교가 끊어진 뒤에도 김성적(金成積)이 송나라의 과거에 등제한 일이 있다. 한편, 중국인이 고려에 귀화하는 일도 자주 있었으며, 특히 남부 중국으로부터의 귀화인이 많았는데 그 중에는 상당한 문재를 가진 사람들도 있었다.
공물 · 사여 형식의 물자교환도 초기와 마찬가지로 매우 광범하게 행하여졌으며, 1030년 송나라로 간 민부시랑(民部侍郎) 원영(元穎) 등 일행 293인의 사신이 가지고 간 것은 금은동기 · 도검 · 안마(鞍馬) · 향유 · 인삼 · 세포(細布) · 유황 · 청서피(靑鼠皮) 등이었으며, 그들이 다음해 귀국할 때에는 각종 비단 · 의대(衣帶) · 금은기 · 안마 · 유교와 불교의 경전 · 역서(曆書) · 의서(醫書) 등 다수의 물품을 가져오기도 하였다. 이와 같은 조공제도에 따른 물자교역 이외에 일반교역도 매우 활발하였다. 송나라는 무력으로는 약하여 그 점에서는 폐쇄적인 경향을 벗어날 수가 없어서 이것이 고려와의 국교를 단절하게 된 중요한 이유가 되었다.
한편으로는 재정적 수입을 위한 무역의 장려책을 써서 송나라의 상인은 동남아시아의 연해를 중심으로 활발하게 해상무역에 종사한 것은 이례적이다. 송나라의 해상무역의 중심지는 남부 중국의 광주(廣州) · 천주(泉州) · 명주(明州) 등지였는데, 고려와의 교역에서는 등주(登州) · 밀주(密州)가 이용되었다. 고려의 항구로서는 될 수 있는 대로 거란의 눈을 피할 수 있는 곳으로 예성강(禮成江)이 이용되었다. 예성강의 무역은 매우 성하였던 까닭에 고려의 가요에 「예성강곡」이 있고, 또 문인들의 시에서도 당시의 번영을 읊고 있다. 당시 송나라의 상인들에 끼어서 아랍상인들도 고려에 몇 차례 온 것으로 보아도 고려와 송나라의 무역이 매우 성하였던 것을 알 수 있다.
거란과의 관계로 고려와 송나라의 공적 국교가 끊어졌다가 다시 시작된 것은 문종 말년의 일이다. 본래 국교가 단절된 데에는 그 까닭이 있다. 고려가 중국의 문화를 중시하여 송나라와의 통교를 원한 것이 사실이나 거란의 강압적인 태도로 부득이 송나라와 단교할 수밖에 없었고, 또 송나라도 명목상 종주국으로서 고려와 단교할 것을 원하지 않았으나 문약한 송나라로서는 거란의 위력에 눌려 하는 수 없이 고려와 관계를 끊게 되었다. 그러나 11세기 말에 이르러 고려와 송이 다시 통교하게 된 데에는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즉, 고려의 문종이 송나라의 문화를 중히 생각하여 친송책을 쓴 것과 시기를 같이하여 송나라의 신종(神宗)도 또한 연려대료책(聯麗對遼策)을 택하게 되었다는 점과, 거란의 세력이 기울어지기 시작하였다는 사실이다.
거란은 제3차 고려침입 후에도 1037년에는 그 수군이 압록강변을 침범한 일이 있고, 1042년에는 송나라로부터 받는 세폐(歲幣)를 증액하고 서하(西夏)를 정벌하여 그 세력이 매우 팽창하였으나, 한편 같은 시기에 중국적 국가체제의 도입을 추진하는 혁신파와 국수적인 보수파 사이에 파쟁이 심하여지고, 종실 내부의 권력쟁탈이 겹쳐, 드디어 1063년에는 종실 내부의 반란이 일어나고 다시 황후와 황태자가 피살되는 일이 일어나 국력은 기울어져가고 있었다.
한편, 고려의 문종 때에는 고려와 요나라의 관계도 표면상 심한 마찰 없이 의례적인 사신내왕이 순조롭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1063년에는 거란이 고려에 대장경을 보내온 일도 있었다. 이러한 가운데 문종은 적극적인 친송책을 쓰고 있었다. 그의 정책이 곧 구체적으로 나타나지는 않았으나 이미 1058년(문종 12)에 표면화된 일이 있었다. 즉, 그는 제주와 영암 등지의 목재를 베어서 큰 배를 만들어 송나라와 교통하려고 하였는데, 신하들은 그 때문에 요나라와의 관계가 악화될 것을 우려하며, 제주의 가난한 백성을 피폐하게 함으로써 어떤 변란이 일어날까 염려하였다. 또 고려는 문물제도가 흥하고 외국상선의 내왕이 빈번하여 굳이 송나라에 기대할 바가 없다고 반대하여 문종의 의도는 한때 중지되었다.
그런데 송나라 신종은 안으로는 신법(新法)의 실시로 재정개혁을 추진하며, 밖으로는 거란에 대항하기 위하여 고려와 제휴하려고 하여 드디어 1068년에 도대제치발운사(都大制置發運使)인 나증(羅拯)에게 명하여 상인 황신을 보내왔다. 문종은 그를 우대하여 귀국시켰는데, 2년 뒤 황신이 같은 목적으로 다시 고려에 오게 되자 문종은 정식으로 송나라에 사신을 보낼 뜻을 전하였다. 이 시기에 송나라에 보낸 예물에는 많은 진귀한 물건들이 있었다. 즉, 어의(御衣) · 금대(金帶) · 금반잔(金盤盞) · 금주자(金注子) · 은장장도(銀裝長刀) · 안구세마(鞍具細馬) · 향유(香油) 220근 · 송자(松子) 2,200근 · 인삼 1,000근 · 포(布) 4,000필 등이었다. 이렇게 하여 약 50년 동안 끊어졌던 고려와 송나라의 국교가 다시 열리게 되었다.
다음해 송나라의 의관(醫官) 왕유(王愉) · 서선(徐先) 등이 고려에 왔는데, 이것은 문종의 병을 치료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 뒤에도 송나라의 의관이 자주 고려에 왔다. 다시 국교가 열리게 되었으나 문제가 있었다. 당시의 송나라와의 왕래 항로는 예성강 하류에서 중국 산둥의 등주 · 내주(萊州) 등에 이르는 것이었는데, 이 항로는 북쪽에 치우쳐서 거란이 알게 될 것을 염려하여 이를 변경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1073년에 태복경(太僕卿) 김양감(金良鑑) 등을 보내자 송나라에서는 상륙지를 남쪽 절강(浙江)의 명주(뒤에 닝보)로 옮길 것을 청하여 그렇게 정하였다. 그리하여 새 항로는 예성강 하류에서 출발하여 자연도(紫燕島) · 마도(馬島) · 고군산열도(古群山列島) · 죽도(竹島: 전라북도) · 흑산도(黑山島) 등 서해안의 여러 섬을 거쳐서 서남으로 향하여 명주에 이르는 것이었다.
문종을 비롯하여 고려의 문신들은 한문화를 깊이 이해하여 사신으로 송나라로 간 인물들은 대부분 문재에 능한 사람이 많았으며, 그들의 시와 문장을 엮어서 송나라에서 『소화집(小華集)』이라는 이름으로 간행한 일도 있다. 송나라도 사신을 고려에 보낼 때에는 신중을 기하였다. 그리하여 송나라의 신종은 국서를 고려에 보내려 할 때에 여러 사신(詞臣)들에게 국서를 짓게 하여 그 중에서 가장 우수한 것을 택하여 보냈다고 한다. 또, 고려의 문종이 죽었을 때에 송나라 신종은 조위사(弔慰使)의 서장관(書狀官)을 선정함에 있어서 그 정사가 추천한 서장 후보는 문장이 뛰어나지 못하다고 하여, 중서성(中書省)에 하명하여 문장을 고시하여 선정한 일도 있다. 이와 같이 송나라는 고려와의 통교에 있어서 충분한 예를 갖추려고 노력하였다.
그러나 내왕하는 사행(使行)과 관련하여 불미로운 일도 있었다. 1078년에 송나라 사신으로 온 안도(安燾)는 고려에서 제공하는 음식을 먹는 대신 그 대가를 은으로 받고, 그가 받은 많은 선물 또한 은으로 바꾸어 간 일이 있다. 뒤에 송나라의 조정은 그것을 알고 안도를 문책하고 고려에 대하여 사과한 일이 있다. 송나라의 사신에게 주는 물품뿐만 아니라, 여러 가지 폐단이 있었다. 앞에서 말한 안도 등은 명주에서 건조하여 신주(神舟)라고 명명한 큰 배 두 척에 많은 예물을 싣고 고려에 왔는데, 이들을 맞이하는 고려의 조야는 열광적이었다.
송선이 흑산도에 이른 뒤 예성강에 이르기까지 서해의 여러 항구에서 고려의 관리들이 이를 맞았고 밤에는 산에서 봉화를 올려 예성강까지 배를 안내하였다. 송나라의 사신과 상인들이 입경한 뒤의 숙소접대도 융숭하였으며, 그들에 대한 사례품 · 증여품도 막대하였다. 그들의 사무역(私貿易)을 위하여 특별히 시장을 마련하기도 하였다. 사신들의 숙소로 개성에 순천관(順天館)이 있고, 상인들을 위하여 영빈관(迎賓館) · 회선관(會仙館) 등 10개의 객관(客館)이 있었다.
송나라와 고려가 교환한 예물의 품종과 수량은 실로 막대한 것이었는데, 앞에서 말한 안도가 왔을 때는 100종을 넘으며, 건수는 총 6,000건에 이르는 것이었다. 그 품목을 대별하면, 의대 · 옥(玉) · 안마 · 채단(綵緞)을 비롯하여, 차(茶) · 촉(燭) · 주(酒) · 칠갑(漆匣) · 악기 · 금은기 등이다. 한편, 고려에서 송나라에 보낸 조공품목도 보통 수십 가지에 이르렀다. 공식적인 조공과 예물 등 증여품만이 아니고 공무역(公貿易)도 성하였는데 왕공 · 귀족, 그리고 관인들은 신변의 장식품 · 사치품을 비롯하여 여러 가지 약재와 서적을 수입하였다. 예를 들면, 1079년 사여품의 형식으로 송나라에서 보내온 약재는 침향(沈香) · 목향(木香) · 철분(鐵粉) 등 100종과 우황(牛黃) 50냥, 용뇌(龍腦) 80냥, 사향(麝香) 50개, 법주(法酒) 10병이었다.
송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이 고려에 들어왔는데, 송판대장경을 비롯하여 『문원영화(文苑英華)』 · 『책부원귀(冊府元龜)』 · 『자치통감(資治通鑑)』 · 『태평어람(太平御覽)』 · 『신의보구방(神醫補救方)』 등 송대에 이루어진 방대한 출판물과 유교의 경서, 제자(諸子)의 책, 역사서적 · 역서(曆書) · 음양서 · 형법서 · 의약서 · 불전(佛典) 등이었다. 대각국사 의천(義天)이 1086년(선종 3) 송나라에서 귀국할 때에 가져온 불교의 교소(敎疏)는 3,000여 권이었고, 귀국 후에도 계속 불서를 구입하여 그 수가 5,000권에 가까웠다.
이와 같이 고려는 많은 귀중한 서적을 수집하여 중앙의 비서성(秘書省)을 비롯하여 궁궐 안의 각 전각과 국자감, 서경(西京)의 각지에 수장하였다. 고려에 많은 진서(珍書)와 선본(善本)이 있다는 소식은 중국으로 전하여져서, 송나라의 철종(哲宗)은 『백편상서(百篇尙書)』를 비롯한 백수십 종의 서적목록을 고려에 보내어 잔권(殘卷)이라도 무방하니 전사(轉寫)하여 보내줄 것을 요청하여 고려에서는 부분적이나마 그 요청에 응하였다.
고려와 북송과의 관계에 있어서 특기할 것은 송의 민간상인의 내항이다. 기록에 보이는 것만도 북송의 상인이 내항한 것은 100여 회에 이른다. 1회에 내항한 인원수는 수십 명에서 100명에 이르며, 1056년에는 240명이 내항하였으니 그 규모가 매우 큰 것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중국에서 산출되는 물자뿐만 아니라 남아시아의 향료와 약재를 가져와서 무역하였으며, 개성에 1년 이상 체류하는 경우도 많았다. 무역을 행하는 것이 그들의 본래 목적이기는 하나, 고려와 송나라의 두 조정 사이의 교류가 어려울 때에는 그 중간역할을 하는 일도 있었다. 한편, 고려의 사신과 그들을 동행한 상인들이 송나라의 금령을 어기고 중국의 서적과 물품을 구하는 예가 자주 있어서 북송 말기에는 이에 대처하려는 송나라 조정의 논의도 많았다.
두 나라 사이에는 문물의 교류뿐만 아니라 서로 귀화하는 일도 자주 있었다. 고려에서 송나라로 귀화하여 높은 관직에 오른 사람으로는 김행성 · 강전(康戩) 등이 있고, 송나라의 사신이나 상인으로 고려에 귀화하여 관직에 오른 사람으로는 주저(周佇) · 장완(張琬) · 호종단(胡宗旦) 등이 있다. 이와 같이 고려와 북송과의 교류는 상당히 활발하게 진행되었으나 12세기 초에 이르러 북방에서 거란족에 대신하여 여진족이 크게 세력을 떨치게 됨으로써 동아시아의 정국에 큰 전환이 일어나게 되었다.
10세기 초에 거란이 발해국(渤海國)을 멸망시킬 무렵, 말갈족의 후예에 대하여 여진이라는 호칭이 생겨났는데, 그들은 본래 고려에 순종하여 투화(投化)하거나 또는 조공을 바치기도 하였다. 그러나 그들의 세력이 점차 커짐에 따라서 고려의 북변을 침범하게 되어, 1107년(예종 2)에는 윤관(尹瓘)이 17만의 대군으로 그들을 토벌하고, 이어서 9성(城)을 쌓았다. 그로부터 2년 뒤 고려는 여진족의, 배반하지 않고 조공을 바치겠다는 청을 받아들여서 그들과 화의를 맺고 9성에서 철수하였다. 여진족의 완안부(完顔部)의 추장 아골타(阿骨打)는 드디어 1115년 금(金)으로 국호를 정하고 건국하였다. 바로 다음해에 금나라는 고려에 대하여 형제의 나라로 국교를 맺을 것을 청하였다. 그러나 고려는 요 · 송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이에 쉽게 응하지 않았다.
1125년(인종 3) 봄에 금은 요를 멸망시켰으며, 같은 해에 고려는 금나라에 사신을 보냈으나 고려가 칭신(稱臣)하지 않는다 하여 고려의 국서를 받지 않았다. 다음해 봄에 당시 고려조정의 실권자 이자겸(李資謙)은 중의의 반대를 물리치고 금나라로 사신을 보내어 사대(事大)의 예를 취하기로 하였다. 같은 해에 금나라는 북송을 멸망시키고 북송의 마지막 두 황제를 볼모로 잡아갔다. 그 뒤 고려의 조정에서는 금나라에 대한 북벌론(北伐論)이 있었으나 실현되지 못하고, 두 나라 관계는 그 뒤 약 1세기 동안 계속되었다.
송나라의 일족은 남쪽으로 옮겨 1127년에 남송을 세웠으며, 처음에는 금나라와 대항하여 싸웠으나 1142년에 화의를 맺고 국경을 동은 회하(淮河), 서는 대산관(大散關)으로 정하고, 1165년(의종 19)에는 금에 세공을 바치기로 하여 당분간 두 나라 사이에 큰 충돌은 없었다. 남송 초에는 고려와 남송 사이에 사신내왕이 비교적 빈번하였다. 이 시기에 남송은 금나라에 대하여 고려와의 협공을 기도하였기 때문이지만, 남송이 금나라에 세공을 바치기로 정한 이후에는 고려와 남송과의 공적인 관계는 없었다. 그러나 남송 초에는 송나라의 상인을 통하여 남송 고종(高宗)의 즉위 조서가 전달되는 일도 있었다. 송나라 상인의 내항도 이와 비슷하여, 남송 초의 약 40년 동안에는 송상이 20여 회 온 일이 있으나, 그 뒤 남송의 멸망까지 1세기 이상 송상이 내항한 것은 겨우 8회에 지나지 않는다. 정치적으로나 경제적으로 두 나라의 교류는 미미하였으며, 중국의 서적이 고려에 들어오는 일도 극히 적었다.
고려와 중국의 관계는 몽골족의 흥기와 그 중원지배에 의하여 심한 변천을 겪게 된다. 금나라의 국력이 쇠퇴하여 가는 13세기 초 몽골족이 대륙의 북방에 흥기하여 급격하게 세력을 떨치기 시작하였는데, 같은 무렵에 만주방면에서는 거란족의 후예가 다시 일어나기 시작하였다. 이 거란족은 1216년(고종 3) 9만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너서 고려에 침입한 일이 있는데, 다음해 거란족의 유적(流賊)들이 개성 부근과 원주 · 제천 등지까지 이르렀다.
몽골의 징기즈칸은 1219년 고려에 원군을 보내어 거란의 유적을 무찌른 일이 있었다. 그러나 그 뒤 몽골은 고려에 대하여 많은 공물을 요구하였는데, 고려는 이에 응하지 않고 몽골의 사신을 냉대하였다. 1225년에는 몽골의 사신 저고여(著古與) 등이 고려에 왔다가 돌아가던 길에 압록강을 건넌 뒤에 도적에게 피살된 일이 있었다. 그 뒤 고려와 몽골의 관계는 악화되어 마침내 오랜 시일에 걸쳐서 여러 번의 몽골의 고려침입이 계속되었다.
몽골의 제1차 침입은 1231년(고종 18)에 있었다. 이때, 몽골의 장수 살례탑(撒禮塔)이 이끄는 병력이 개성부근에 이르렀는데 고려가 화의를 청하여 몽골군은 다음해 돌아갔으나, 물자와 인질 등의 요구가 극도로 강압적이었다. 고려의 조정은 후일에 대비하여 강화(江華)로 천도하였다. 몽골은 이듬해인 1232년에 살례탑을 장으로 다시 침입하여 한양과 수원지방에 이르렀으나 살례탑은 전사하였다. 몽골군은 고려 국왕이 강화에서 출륙(出陸)할 것을 요구하였으나 고려의 군신은 이를 거부하였다. 이 제2차의 몽골침입 때에 홍복원(洪福源)이라는 자가 반역하여 몽골을 도와서 오랫동안 본국을 괴롭힌 일이 있다.
제3차의 몽골침입은 1235년부터 1239년까지 4년에 걸친 것이었다. 처음에는 고려의 동북으로부터, 이어서 서북으로부터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이미 여진의 한 나라인 동진국(東眞國)과 금나라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서 당고(唐古)를 총수로 하여 고려의 전 강토를 유린하였다. 고종은 사신을 몽골로 보내어 철병을 요청하였고, 드디어 철병이 이루어지게 되었다. 몽골은 국왕의 친조(親朝)를 요구하였는데, 고려는 왕족으로 이에 대신하였다. 몽골의 태종이 1241년에 죽은 뒤, 황후가 칭제하여 두 나라 사이에 당분간 평화적 통교가 이루어졌다. 이 침략이 있는 동안 고려는 국난을 물리치기를 기원하여 대장경의 판각을 시작하여 1251년에 완성하였다.
그러나 1246년 몽골의 정종(定宗)이 즉위하자 다음해에 아모간(阿母侃)을 총수로 고려를 침입하게 하였는데, 1248년 정종이 죽자 철군하였다. 1253년 제5차로 야고(也古)와 아모간이 침입하여 고려조정으로 하여금 강화에서의 출륙을 요구하였다. 이 때 고종은 왕자 안경공(安慶公)을 몽골에 보내 그 철군을 요청하였고, 침략군에 대하여도 같은 요청을 하여 드디어 철병이 되었다. 이때 왕자 사행의 진공품과 증여품은 막대하고 국고는 고갈되어 관원들까지 분담하여 갹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1254년에 제6차로 차라대(車羅大)의 군이 침입하였다. 몽골군은 때때로 회군한다고 하여도 완전히 철군하지 않고 압록강변에 머물다가 수시로 침입하였다.
고종은 몽골의 출륙요구에 대하여 마침내 1256년 5월 강화도의 대안인 승천부(昇天府)에서 몽골의 사신을 접견하였으며, 몽골로 간 사신 또한 철군을 요청하여 몽골의 헌종은 이 해에 철군명령을 내리게 되었다. 고려조정은 몽골이가 요구하는 출륙과 친조에 대하여는 적극적인 반응을 보이지 않은 반면, 몽골군의 백성과 재물과 농작물에 대한 노략질은 더욱 심하여갔다. 그러나 결국 몽골의 요구에 굴복하여 1258년 12월 말 고려조정은 출륙과 태자의 친조를 약속하기에 이르렀다. 이어서 강화 내외의 성을 파하고 개성에 궁궐을 세우는 한편, 1259년 고려태자가 몽골의 쿠빌라이(Khubilai, 忽必烈)를 만남으로써 화의가 진전되었다. 다음해에 대한(大汗)이 된 세조(世祖) 쿠빌라이는 유화정책으로 고려의 요청에 응하게 되었다. 그리하여 약 30년에 걸친 침략과 항쟁이 끝나고 두 나라의 관계는 다소 원만하여졌다.
그러나 고려의 내외정세는 상당히 복잡하였다. 문무 권신들 사이의 권력다툼과 친몽(親蒙) · 항몽(抗蒙)의 문제가 복합되어 왕위의 폐립을 행하고, 최탄(崔坦) 등은 몽골에 부역(附逆)하여 자비령(慈悲嶺) 이북의 땅을 한때 몽골에 속하게 하여 동녕부(東寧府)라고 불러 그 총관(總管)이 되었다. 또, 1270년부터 1273년까지 삼별초(三別抄)의 난이 있었다. 삼별초는 최씨(崔氏)의 집권 때에 경찰 · 군사의 목적으로 조직된 사병(私兵)의 성격을 가진 것이었는데, 원종의 친몽책에 불만을 가지고 왕의 삼별초폐지에 반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진도(珍島) · 탐라(耽羅) 등을 본거로 항거하다가 패하고 말았다. 이 난을 계기로 몽골은 고려의 조정과 지방을 감시하기 위하여 안무사를 두고 또, 둔전군(屯田軍)을 주둔시키며 탐라의 관리를 강화하여 목마장(牧馬場)을 두었다.
다음으로, 국제적으로 중대한 문제는 여원(麗元)연합군의 일본 정벌이다. 1271년에 국호를 원(元)으로 고치고, 수도를 대도(大都: 北京)로 정한 몽골은 일본을 초유(招諭)하기 위하여 여러 번 사신을 보냈으나 실패하고, 일본을 정벌하기 위하여 고려에 징병과 조선(造船), 그리고 군량미공급을 요구하였다. 드디어 1274년 원나라 군사 2만 5000명과 고려의 군사와 수수(水手) 약 1만 5000명이 900척의 전함을 타고 일본으로 향하여 쓰시마[對馬島]와 이키[壹岐]를 휩쓸고 하카타[博多]에 상륙하여 승승장구하였으나, 큰 풍우로 배가 파선되고 군사가 익사함으로써 그 원정은 실패하고 말았다.
원나라는 1279년 남송을 평정하여 중국을 통일한 2년 뒤에 다시 일본을 정벌하였다. 그 군세는 약 14만 명이며, 전함은 4,000척을 넘었다. 그러나 이번에도 태풍을 만나 패퇴하고 말았다. 그 뒤에도 원나라의 세조는 일본정벌의 야망을 버리지 않았으나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원나라는 일본정벌을 위하여 임시로 정동행성(征東行省)을 두었다가 여러 번 치폐(置廢)하였는데, 1283년(충렬왕 9)에 원나라는 고려의 충렬왕을 그 행성의 좌승상(左丞相)에 임명하고, 뒤에는 평장정사(平章政事)의 직명을 주기도 하였다. 정동행성은 형식적 존재로 거의 원나라 말기까지 존속하였다.
고려에 대한 원나라의 간섭과 영향력은 고려의 왕실 · 정치제도 · 습속 등에 크게 작용하였다. 첫째는 두 왕실의 통혼으로 고려 원종의 세자이며 후일의 충렬왕이 원세조의 공주와 결혼한 것을 비롯하여 그 뒤 여러 왕이 원나라 공주나 종실의 딸과 결혼하였다. 고려의 관제와 칭호가 원나라의 제도와 상등한 것은 변경하여 원나라와의 차등을 두었다. 또 호복(胡服)과 변발 등 몽골의 생활습속과, 부분적이기는 하나 몽골어가 침투되었다. 한편, 원나라는 공녀(貢女)를 요구하여 고려는 50여 회에 걸쳐서 수백 명의 공녀를 보냈다. 이와 같은 통혼정책과 제도의 개변, 몽골의 습속과 언어의 침투에 따른 폐단이 적지 않았으며, 특히 고려 출신의 비빈과 몽골 공주 사이의 불화가 표면화되어갔다.
이에 충선왕은 이를 시정하려고 하였으나 원나라의 간섭으로 퇴위하게 되었으며, 원나라로 가서 오래 체류하였다. 원나라의 내정간섭과 심한 주구(誅求)에 대한 고려의 반감이 점차 고조되었는데, 원나라의 쇠퇴에 따라서 그 반감은 표면화되었다. 그리하여 공민왕은 원나라 순제(順帝)의 제2황후인 기씨(奇氏)의 후광으로 권세를 누리던 기씨 일족을 주멸하고, 압록강 이서와 원나라 쌍성(雙城)지방의 영토를 탈취하고 또 원나라의 연호를 중지하는 등 국권회복을 위하여 노력하였다.
다음은 고려와 원나라의 경제적 교류내용을 보기로 한다. 일반적으로 중국과 그 인접국가의 경제교류에 있어서는 어떤 의미에서 조공관계가 그 기능을 한다고 할 수 있다. 즉, 조공과 회사, 급부와 반대급부가 일종의 경제적 교류역할을 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원나라와 고려와의 관계에 있어서는 일방적인 수탈의 경향이 강하며, 특히 국도를 대도로 옮기기 전에 더욱 그러하였다.
원나라도 1291년 강남미(江南米) 10만 석을 고려에 보내온 일이 있다. 또, 여원간의 일반무역은 1262년에 호시(互市)가 2개월 동안 허가된 일이 있으나 사실상 교역이 행하여진 것 같지는 않다. 고려에서 원나라로 보낸 물자는 인삼을 비롯하여 고려특산의 약재 · 칠(漆) · 잣과 완상용 및 수렵용 매 등의 새들과, 공예품으로 고려청자 · 나전칠기를 비롯하여 장도(裝刀) · 종이 · 화문석 · 저포(苧布), 그리고 곰 · 범 · 담비의 가죽 등이었다. 원나라에서 고려에 들어온 것은 송대와 같이 여러 가지 비단과 서적, 각종 기물(器物), 그리고 남아시아의 산물인 향약과 공작 · 낙타 등이었다. 그리고 특히 고려 말기 원나라의 회자(會子)와 같은 지폐를 본받아 저화(楮貨)를 인쇄 · 발행하였으나 실용화시키지는 못하였다.
두 나라의 문화관계에서 첫째로 들 것은 성리학(性理學)의 전래이다. 원세조가 남송을 정복하고 중국을 통일하게 되자 성리학이 북중국으로 전파되었는데, 1286년 충렬왕을 따라서 원나라로 간 안향(安珦)과 뒤에 충선왕과 같이 오래 원나라에 체류하였던 백이정(白頤正)과 같은 학자들에 의하여 성리학이 고려에 전달되어 뒷날 조선시대의 성리학이 성하는 바탕을 이뤘다. 또, 충선왕은 원나라의 수도에서 만권당(萬卷堂)을 개설하여 많은 내외의 서적을 소장하고, 원나라의 조맹부(趙孟頫) 등의 학자 · 서화가와 고려의 이제현(李齊賢) 등이 교유하는 기회를 마련하였고, 이곡(李穀) · 이색(李穡) 부자를 비롯한 많은 고려 사람이 원나라의 과거를 통하여 그곳에서 높은 관직에 오르기도 하였다. 그 밖에 원나라의 역법(曆法)과 의술도 고려에 전하여졌다. 종교적 교류도 상당히 활발하여서 원나라의 라마승과 도사(道士)도 내왕하였으며, 고려인으로서 라마승 · 도사가 된 사람도 있다.
그 밖에도 고려 전기에는 일본과의 교역도 약간 있었다. 즉, 974년(광종 25)부터 1075년(문종 29)에 이르기까지 다섯 차례나 그 기록이 보인다. 고려 말년에는 왜구가 자주 고려의 해안에 나타났다. 또 고려 전기에는 아라비아[大食]의 상인이 내항하여 교역하였다는 기록도 몇 번 보인다.
조선시대의 중국과의 관계는 곧 중국의 명 · 청과의 관계인데, 조선왕조 초기 명나라와의 관계는 그리 원만하지는 않았다. 고려와 조선의 왕조교체에 대한 명나라의 소극적인 태도와 북방의 여진족에 대한 두 나라의 세력관계에 따라서 조 · 명 간에 몇 가지 어려운 문제가 있었다. 조선의 태조가 즉위한 직후의 문제인데 태조의 즉위를 명나라가 승인하는 문제, 공로(貢路)를 폐쇄한 문제, 표전(表箋)문제, 통혼문제, 명제로부터 고명(誥命)과 인장(印章)을 받는 문제, 그리고 종계변무(宗系辨誣)에 관한 문제가 있었다.
이들 대부분의 문제는 사신내왕과 교섭 결과로 몇년 사이에 해결이 되었으나, 종계변무에 관한 것은 쉽게 해결되지 않았다. 종계변무라는 것은 명나라의 중요한 문헌에 이성계의 가계(家系)가 잘못 기록되어 있는 것을 바로잡는 일이다. 즉, 이성계가 ‘ 이인임(李仁任)의 아들’이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이인임은 고려 말의 권신으로 비행이 심하여 지방에 안치(安置)되었던 인물로 이성계와는 적대관계에 있었다. 이성계의 가계에 대한 명나라측의 기록을 바로잡기 위한 조선측의 노력은 사신내왕의 기회를 이용하고, 또는 이 변무를 위한 주청사(奏請使)를 파견하여 100여 년이 지난 1588년(선조 21)에 개정된 『대명회전(大明會典)』을 명나라로부터 송부받음으로써 겨우 일단락되었다.
앞에 든 문제 외에 조 · 명간의 중요한 문제가 된 것은 여진문제, 세공(歲貢)문제, 그리고 화자(火者:조선시대에 명나라로 보내던 宦官 후보자)와 처녀의 진헌(進獻)문제였다. 여진족은 원나라의 세력이 쇠퇴하는 혼란기에 고려로 도망하는 자가 많았는데, 명나라는 고려와 북원(北元)과의 관계를 차단하고 적극적으로 요동을 개발하기 위하여 여진인의 쇄환을 고려에 요구하였다. 여진인뿐만 아니라 고려인이 요동에 가서 정주하다가 명나라 정난(靖難)의 변 등으로 다시 귀국한 이른바 요동의 만산군(漫散軍)의 쇄환을 요구하여 1403년(태종 3)에는 1만여 명을 쇄환하기에 이르렀다. 한편, 두만강 유역의 여진족 추장 멍거티물(猛哥帖木兒)은 조선에 공물을 바치며 명나라의 초무(招撫)에 응하지 않다가 결국 응하고, 명나라로 입조하였다. 그 뒤에도 여진문제는 오래 양국간의 현안으로 남았다.
조공에 관한 문제는 공기(貢期)와 그 품목에 관한 것이었다. 명나라는 고려 말에 3년 1공(貢)을 요구한 데 대하여 고려는 1년 3공을 주장하고, 실제로 많은 사신이 내왕하였다. 조선에 대하여 명나라는 3년 1공을 요구하였다. 명나라에 대한 조공품목을 보면, 각종 저포(苧布) · 마포(麻布) · 화석(花席) · 인삼 · 호피(虎皮) · 표피(豹皮) 등은 다른 시대와 크게 다를 바 없으나 금 150냥과 은 700냥은 조선에 대하여 감당하기 어려운 부담이었다. 금은의 감면을 위하여 여러 가지 대안을 제시하고 명나라와 교섭한 결과 1429년(세종 11)에 이르러 소 · 말 · 포(布) 등으로 대체하고, 금은은 감면하기에 이르렀으며, 그 뒤 명 말까지 큰 변동이 없었다.
명나라의 진헌요구 중에서 조선을 괴롭히고 또는 정치적 · 사회적으로도 큰 영향을 미친 것이 화자와 처녀의 진헌이다. 이 두 가지는 고려 후기 원나라에 진헌하기 시작한 것이다. 조선시대의 화자의 진헌에 관한 기록은 태조와 태종 때 6회에 걸쳐 약 100여 명이 보이는데, 실제는 그보다 많았을 것이다. 그들은 명정에서의 환관의 후보자였으며, 환관으로 명나라의 칙사로서 귀국하는 경우 그에 대한 직접 예우는 물론이고, 그의 많은 친척이 관직에 오르고 출신지인 부(府) · 군(郡) · 현(縣)이 승격되는 것이 예사였다.
명나라의 태조에게는 ‘고려비 한(韓)씨’가 있었는데 그는 원대에 중국으로 간 여자임에 틀림없다. 명나라 세조는 여러 번 공녀를 요구하여 그의 비빈 중 5명이 공녀였다. 공녀를 선정할 때에는 임시로 이를 위한 관아를 두고, 국내 처녀의 혼사를 금지시키고 많은 인원 중에서 선발하였다. 선발에 응하지 않는 경우에는 그 아버지가 벌을 받았는데, 선발된 공녀의 부모는 비탄에 빠지는 일이 많았다. 명나라 선종(宣宗) 때에도 공녀가 여러 번 있었으나 선종의 선덕(宣德) 10년(1435, 세종 17) 조선의 여자 53인을 송환한 뒤로 공녀의 진헌은 폐지되었다.
조 · 명 간의 경제적 관계를 보면, 조선측의 진공품은 앞에서와 같고, 명나라의 답례품으로는 각종 채안 · 자기 · 약재와 서적, 그 밖에 악기 · 보석 · 궁재(弓材) · 문방구 등이었다. 정기적인 세공과 그 답례품 외에 수시로 명나라측의 요구에 따라서 교역이 이루어졌다. 1401년(태종 1) 명나라는 조선에 말 1만 필의 조달을 요구하여 조선은 어려움 끝에 이에 부응하였고, 그 대가로 비단 · 면포 · 약재 등을 받았다. 그 뒤에도 많은 말을 요구하는 일이 자주 있었다. 또 양국의 사신이 사행으로 체류하는 기회에 사무역이 행하여졌는데, 명나라 사신들의 주구가 심하였고, 한편 명나라의 물산 특히 사치품이 조선의 경제에 미치는 영향이 컸다. 사신내왕이 빈번하여짐에 따라서 중국문물이 대량으로 조선에 유입되어 중국문화의 영향이 더욱 심하여졌다.
초기에는 조선의 고관자제가 명나라에 가서 학업을 이수하고, 조선의 거인(擧人)이 명나라의 회시(會試)에 응시하는 일이 있었는데 뒤에 중지되었다. 명나라로부터 많은 서적이 들어왔는데, 예를 들면 『원사(元史)』 · 『십팔사략(十八史略)』 · 『산당고색(山堂考索)』 · 『대학연의(大學衍義)』 · 『진서산독서기(眞西山讀書記)』 · 『주자성서(朱子成書)』 · 『통감강목』 · 『권선서(勸善書)』 · 『사서연의(四書衍義)』 · 『사서오경』 · 『성리대전』 등의 경서와 사서(史書), 특히 성리학에 관한 서적과 제자(諸子)의 서적 등이었다.
조 · 명 관계는 초기에는 알력이 있었으나 곧 원만하여지고, 문물교류가 성하여짐에 따라서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 사이에는 점차 사대(事大) 숭명(崇明)의 경향이 나타났으며, 임진 · 정유왜란 때 명나라의 원조를 계기로 그런 경향은 더욱 심하여졌다. 그러나 이와 같은 조 · 명 간의 평화적인 관계는 북방의 여진족이 다시 흥기함으로써 위협을 받게 되었다.
명대의 여진족은 야인(野人) · 해서(海西) · 건주(建州)의 세 여진으로 나누어지는데, 이들 세 집단이 서로 세력을 다투다가 16세기 말에 이르러 건주여진 출신의 누르하치(Nurhaci, 奴兒哈赤)가 세력을 펴기 시작하여 여진의 여러 부족을 통일하고, 1616년에 건국하여 국호를 후금(後金)이라고 하였다. 이에 앞서서 임진왜란 때에는 조선에 원병을 보내겠다고 한 일도 있다. 그 뒤 얼마 안 되어 조선의 조정은 신충일(申忠一)을 누르하치의 거성(居城)이 있는 노성(老城) 부근에 파견하여 누르하치와 여진족의 동정을 정탐하게 하였다. 그 보고서가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이다. 누르하치는 명나라에 대하여 일곱 가지 큰 원한[七大恨]이 있다는 구실로 1618년 정명(征明)의 군사를 일으켰다.
명나라는 조선에도 원병을 청하여 조선의 조정은 강홍립(姜弘立)을 도원수로 임명하여 원군을 보냈다. 1619년 봄 무순(撫順) 동쪽의 싸얼후[薩爾滸]산에서 양군이 대전하여 명군이 크게 패하였다. 조선의 원군은 본래 “형세에 따라서 향배(向背)를 정하라.”는 국왕의 밀지를 받고 있던 터라 강홍립은 투항하고 말았다. 그 뒤 요동에 있던 명나라의 부장 모문룡(毛文龍)이 후금의 세력을 견제하기 위하여 1622년 그의 병력을 이끌고 조선으로 들어와 철산군(鐵山郡)의 단도(椴島)를 본거지로 삼았다. 모문룡의 군은 후금의 세력을 견제하는 역할을 하였으나, 조선은 그들의 식량조달과 행패에 시달렸다. 그 뒤 모문룡이 후금에 내응하는 기세를 보이자 1629년 그는 명군에 의하여 피살되었는데 그 잔당도 4년 뒤 후금에 투항하였다.
태조 누르하치의 뒤를 이은 태종(太宗)은 호전적이어서 1627년 봄 조선에 침입하여 정묘호란을 일으켰다. 후금군의 진격을 피해 인조는 강화로 옮겼으나 얼마 안 되어 두 나라는 화약을 맺게 되어 형제의 나라가 되었으며, 조선은 후금과 명나라 사이에 중립을 지키게 되었다. 1636년 청나라의 태종은 한(汗)의 칭호를 황제로 바꾸고, 국호를 청(淸)이라고 고치며, 연호를 바꾸어 명나라를 대신하여 중국을 지배할 태도를 드러냈다. 또한 조선에 대하여 인질(人質)을 요구하고 청나라에 대한 척화론자를 그들에게 보낼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이 이들 요구를 묵살하자 그 해 겨울에 태종은 10만을 이끌고 다시 조선에 침입하여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청군의 급격한 진격으로 왕자 등은 강화로 피난하고, 인조와 세자는 황급하게 남한산성으로 들어갔다. 산성에서 혹한과 기아 속에서 40여 일 동안 항전하다가 다음해 정월 30일에 한강변의 삼전도(三田渡)에서 굴욕적인 화약을 맺었다. 그리하여 조선은 명나라와 관계를 끊고 청나라와 사대의 관계를 가지며, 세자와 또 1명의 왕자를 인질로 청나라에 보내고, 청나라가 명나라를 정벌할 때는 원병을 보냈다. 또, 조 · 명 간의 구례에 따라서 정기적으로 청나라에 사신을 보내며 또 막대한 양의 세공을 바치는 것 등을 약속하였다.
청나라 심양(瀋陽)에 인질로 갔던 세자 등은 8년 뒤 청나라가 입관한 뒤에 귀국하였다. 효종은 인질로 수모를 겪은 일이 있어서 청나라에 대한 보복의 뜻을 품고 북벌을 계획하였으나 실천에 옮기지는 못하였다. 러시아인이 청나라 북쪽 흑룡강(黑龍江) 방면에 이르러 청나라와 충돌하게 되자, 청나라의 요청에 따라서 1654년(효종 5)과 1658년에 조선의 소총부대가 원병으로 참전하여 러시아인을 정벌한 일이 있다. 이것이 나선정벌(羅禪征伐)이다.
조선왕조 초기에는 조선 동북방의 여진족과의 경계가 확실하지 않았는데, 1674년(현종 15)에 이르러 두만강으로 확정되었다. 그러나 두만강 근원 지방의 장백산(長白山: 백두산) 부근의 국경은 확실하지 않았다. 청나라는 성조(聖祖)의 강희연간(康熙年間, 1622∼1722)에 여러 번 사람을 보내어 그곳의 지리를 조사하고, 드디어 목극등(穆克登)을 보내서 1712년 조선측의 이의복(李義復) 등과 정계비(定界碑)를 세웠다. 그리하여 이 지방의 경계에 관한 문제는 일단 결정이 되었다. 이 이후 개항기에 이르기까지 조 · 청 간에는 특별한 정치적 사건 없이 조공관계가 계속되었다.
조선이 청나라에 보내는 사행은 동지(冬至) · 정조(正朝) · 성절(聖節) · 천추(千秋)의 4행을 동지사에 합하여 1행으로 하고, 그 밖에 사은 · 주청 · 진하 · 진위(進慰) · 진향(進香) · 진주(陳奏) · 문안(問安) 등과 재자(齎咨) · 역행(曆行)이 있었는데, 이들을 합한 연평균 사행수는 2.8행이 되었다. 정식 사행의 인원은 30명 내외이나 각종 수행원을 합하여 300명에 이르고, 사행에 동원된 말도 200필 내외였다. 한편, 청나라의 칙사에는 칭호의 구별이 없고, 그 사행수는 연평균 0.7행에 미달하였으며, 정식 사행의 인원수는 25명 내외였다.
조선이 청 초에 보낸 세공은 금 100냥, 은 1,000냥, 각종 포(布) 1만 4000필, 쌀 1만 포(包)를 비롯하여 실로 막대한 양이었다. 각종 포와 쌀은 청태종 말년부터 일부 감량되기 시작하고, 금과 은은 성조 때에, 그 밖의 물품도 점차 감면되어 청 세종(世宗) 이후의 정액이 19세기 말까지 계속되었다. 이때의 품종과 수량은, 종이 5,000권(처음보다 증액), 수달피와 녹피 합 400장, 요도(腰刀) 10자루, 각종 돗자리 22장, 각종 포 3,600필, 쌀 40포로 되어 있다. 이들 세폐의 가치는 순조 초년(1800년대 초)에 전(錢) 약 8만 냥 정도였다. 세공 이외에 사행은 청나라의 황제 · 황태후 · 황후 · 황태자 각 개인에 대하여 방물(方物)을 바쳤는데 그 액수가 적은 것이 아니었고, 또 동지행은 동지 · 정조 · 성절 3절의 방물을 겸하여 바쳤다.
한편, 조선국왕에 대한 청나라 황제의 답례품은 4행을 합하여 비단 52필, 담비가죽 400장, 안마 2필로 순조 당시의 그 가치는 약 4,100냥이었다. 조선의 사신에 대한 청나라의 증급(贈給)이 있었는데 그 가치가 3,000냥 정도인 데 비해, 청나라의 칙사에 대한 조선의 증급은 중앙에 있어서만 5만 냥에서 9만 냥에 이르렀다. 이상과 같이 조선의 공물과 청나라의 답례품은 그 가치로 보아 교역이라고 하기 어려운 것으로서 거의 일방적인 수탈에 가까운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는 조정이 사행에게 위탁하여 행하는 공무(公貿)와 사행원이 개인의 목적으로 행하는 후시(後市)가 있었다. 후시로는 조선 사신의 연경(燕京) 숙소인 회동관(會同館)에서 행하는 회동관후시가 있었는데 이것은 명대에도 있었다. 사신왕래의 기회에 요동의 책문(柵門)에서도 후시가 열렸다. 이들 후시는 밀무역의 성격을 띤 것이었다. 조 · 청의 국경지대에 공인된 호시(互市)가 열렸는데, 중강(中江)과 회령(會寧) · 경원(慶源)의 개시(開市)가 그것으로, 중강개시는 명 말에 시작되었다. 이들 개시장에서도 밀무역이 행하여졌다.
조 · 청 간의 관계에 있어서 특히 두드러진 것은 문화상의 교류이다. 청나라의 대외적 접촉태도는 폐쇄적 경향이 강하여서 조공관계에 의한 사행내왕 이외의 접촉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였으나, 이들 사행의 내왕 기회에 문물교류가 이루어졌다. 조선의 조정과 사대부들은 청나라 초에는 명나라를 숭상하고 청나라를 멸시하는 경향이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연경으로 가는 사신들은 중국문물에 접하고 서적을 구입하며, 나아가서는 중국을 통하여 서양의 학술과 문물에도 접할 수 있었다. 특히, 청대 학술의 전성기인 고종의 건륭(乾隆)시대는 조선의 영조와 정조에 걸친 시기에 해당되며, 영 · 정조기의 학문발달에 미친 청대 학술의 영향을 무시할 수 없다.
직접 연행한 사람은 물론이고 그들을 통하여 청대의 실학과 고증학의 성과를 알게 되고, 청나라의 문물과 사회를 보고 경세치용의 학, 특히 북학(北學)을 주장하게 되며 서양의 과학지식과 기술에 접하고 또 가톨릭도 도입되기에 이르렀다. 중국의 고전적인 문헌 중에서 중요한 것은 이미 전대에 전래되었는데, 청대에 이르러서는 고전적 문헌은 물론이고 당대의 문헌, 예를 들면 『사고전서총목(四庫全書總目)』이나 『황청경해(皇淸經解)』 등도 오랜 시일을 거치지 않고 전래되었다. 반면 우리나라의 문물도 청에 전하여져서 우리나라 금석문(金石文)에 관한 책 『해동금석원(海東金石苑)』이 제술되기도 하였다.
청 초에는 조선인으로서 청나라에 귀화한 예도 있다. 호란 때 조선에 출정하였던 예친왕(睿親王)은 뒤에 조선 공주와의 통혼을 요구하여 조정에서 신하의 딸을 보내어 결혼하게 한 일이 있고, 청태종 때 청나라로 간 김씨의 후손이 청세종 때에 대신이 되었고, 같은 문중에서 청고종의 귀비(貴妃)가 되었으며, 그의 형 김간(金簡)은 각 부(部)의 상서(尙書)를 역임하였다. 또 조선인의 후손 안기(安岐)는 서화의 수집가 · 감식가로서 유명하였다.
태조는 건국 이전부터 왜구의 토벌을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건국 이후에도 왜구에 대한 해방(海防)을 엄하게 하는 한편, 즉위한 해에 승려를 일본의 막부(幕府)로 보내서 왜구를 금지하고 무역을 시작할 것을 요구하였다. 당시 일본은 아시카가[足利]의 제3대 장군 요시미쓰[義滿]의 집권하에 있었다. 요시미쓰도 태조의 요구에 호의적 반응을 보여 사신을 보내며 포로로 끌려갔던 조선인 남녀 수만 명을 쇄환하였고, 왜구의 금압을 약속하여 왔으며, 포로를 쇄환하는 대가로 필요한 물자를 얻어갔다. 당시 조선의 일본과의 교린(交隣)의 주된 목적은 왜구의 방지에 있었고, 일본은 막부와 대마도를 비롯한 서부 일본의 호족들이 교역상의 이익을 주요 목적으로 하고 있었다.
대마도는 조선과 근접하고 있으며, 그 토지의 생산물이 적기 때문에 조선과의 교역을 원하고 있었으며, 조선의 입장에서는 대마도가 왜구의 소굴이었기 때문에 대마도의 호족 소[宗]를 우대하였다. 그 밖에 구주를 비롯한 일본 서해안의 지방관과 호족들도 해마다 조선에 배를 보내와서 무역이득을 얻으려고 하였다. 일본 막부의 후계자들도 조선의 조정에 방물을 보내고 포로를 쇄환하며, 왜구가 사라졌다고 통고하여왔다. 이와 같이 조선과 일본의 사이에는 사신내왕이 빈번하였다.
조선은 일본인에 대하여 회유책을 써서 건국 후 10여 년 동안 ‘향화왜인(向化倭人)’으로서 경상도에 거주하는 자가 2,000명에 이르고, 조선의 관직을 받은 ‘ 수직왜인(受職倭人)’의 수도 많아지고 해마다 조선에 와서 무역에 종사하는 ‘흥리왜인(興利倭人)’에게도 양곡을 지급하였다. 그러나 1418년(태종 18) 대마도의 흉년으로 많은 왜구가 다시 조선의 서해안에서 크게 노략질을 하였다. 그리하여 1419년(세종 1) 병선 227척과 병사 1만 7000명으로 대마도를 정벌하여 큰 타격을 주기도 하였다.
1422년 말 일본의 사신이 온 것을 계기로 세종은 유화책을 펴서 왜인들의 왕래를 다시 허용하였으나, 교역에 대한 통제는 점차 엄하게 하였다. 일본 상인의 교역항으로 태종 초에 부산포(富山浦: 지금의 부산진) · 내이포(乃而浦: 지금의 창원시)와 1426년에 울산 염포(鹽浦)를 지정하였는데, 이를 삼포(三浦)라고 한다. 삼포에서 교역이 끝나면 왜인은 돌아가는 것이 원칙이었으나, 이곳에 영주하는 자가 늘어나 세종 말년에는 2,000명에 이르렀다. 1443년 대마도주(對馬島主)와의 사이에 「계해약조(癸亥約條)」를 맺어 그 도주 소의 세견선(歲遣船) 수를 연간 50척, 도주에 대한 세사미(歲賜米)를 200석으로 제한하였다.
일본과의 통교는 그 뒤에도 계속되다가 1479년(성종 10)에 조선의 통신사가 풍랑으로 돌아온 뒤로 조선의 사절은 끊겼으나 일본의 사절은 여전히 내조하였다. 당시 일본의 진상물은 은 · 동 · 연(鉛) · 유황 · 도검과 약재 · 향료 등이었고, 조선의 회사품은 면포 · 저포 · 마포를 비롯하여 인삼 · 돗자리 · 표피 · 담비가죽과 서적이었으며, 대장경도 일부 유출되었다.
그러던 중 1510년(중종 5)에 이르러 대마도주는 그 사절에 대한 조선의 접대와 삼포거주 왜인에 대한 조선 관원의 처사에 불만을 품고 일부 병력을 보내어 삼포의 거류민과 합세하여 반란을 일으켰다. 그들은 조선의 관원을 살해하거나 납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이 삼포왜란은 곧 평정되었다. 그리하여 삼포는 폐쇄되고 대마도와의 통교는 끊어졌으나, 일본의 막부나 다른 호족들의 사절은 여전히 내조하고 있었다.
그 뒤 대마도주는 적도의 수급(首級)을 조선에 바치는 성의를 표시하며 무역재개를 요청하여, 1512년 제포(齊浦: 내이포)를 개방하여 여기에 왜관을 두고 교역을 허가하되, 대마도의 세견선과 세견미의 수량은 반으로 감액하였다. 이것이 임신약조(壬申約條)이다. 그 뒤에도 통교가 끊어졌다가 1547년(명종 2)의 약조로 다시 계속되었다. 그러나 1555년 왜선 60여 척이 전라도에 침입하는 대규모의 왜구가 발생하였다. 이것이 을묘왜변인데 조선의 조정은 이것을 계기로 비변사(備邊司)를 상치하게 되었다.
왜구가 다시 성하게 된 것은 아시카가막부의 세력이 약화된 것과 관련이 있으며, 일본에서 군웅할거의 전국시대가 되면서 그 경향이 더욱 심하여졌다. 일본은 군웅할거의 오랜 전란시대를 거치다가 도요토미[豊臣秀吉]가 여러 호족을 제압하고 통일을 이루게 되었는데, 그는 대륙침략의 야욕을 품고 1587년(선조 20) 조선에 수호를 청하였는데 그 의도는 조선군을 선도(先導)로 명나라를 침공하려는 데 있었으며, 이것이 임진왜란의 시초인 것이다. 그 뒤 양국간에 여러 차례 사신내왕이 있었으나 드디어 일본은 1592년 4월에 대군으로 내침하였다.
이 제1차 왜란으로 조선이 입은 피해는 말할 수 없으나, 침략군도 큰 타격을 입고 이듬해 4월에는 전군이 남하하여 화의(和議)의 진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그러나 1596년 화의는 결렬되고 다음해 정유년에 침략군의 재침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1598년 8월에 도요토미가 죽자 침략군은 다시 철수하고 말았다. 이 두 차례의 침략으로 우리나라 강토의 유린과 파괴, 살상과 나포, 재산과 문화유산의 약탈과 소실은 사상 최대의 고난이었다. 그러나 한편 명장 이순신(李舜臣)이 이끄는 수군과 각지 의병의 용전도 또한 청사에 남을 일이었다. 무모한 도요토미의 침략은 침략군의 막대한 타격과 그 자신의 파멸로 끝났다.
한편, 조선에 대한 명나라의 원조는 그 뒤 조선 조야의 숭명 · 사대의 경향을 더욱 조장시켰다. 일본에서는 도요토미의 몰락 이후 도쿠가와[德川家康]가 1603년 에도[江戶: 지금의 東京]에 막부를 열고, 다음해인 선조 37년에 화의를 요청하여 왔다. 수차의 교섭을 거쳐서 1612년 조선의 회답사(回答使)가 일본으로 파견되어 국교가 재개되었다. 처음에는 회답사라고 불렀으나 뒤에는 통신사(通信使)로 고쳐서 1811년 까지 12차 파견되었다. 한편, 일본에서 보내온 사절은 참판사(參判使)라고 하여 막부의 말기까지 50여 회에 이르렀다. 조선 · 일본 간의 통교실무는 동래부사와 대마도주가 담당하여 동래부사가 대마도에 보내는 사행도 빈번하였다.
특히, 일본 막부의 장군이 교체될 때에 가는 조선의 통신사행은 500명의 인원이 6척의 배로 바다를 건넜으며, 이들은 대마도주 이하 800명의 호위를 받으면서 대판 · 경도를 거쳐서 에도에 이르렀다. 그 연도의 환영과 접대는 매우 융숭한 것이었고, 통신사행에는 일류의 학자 · 의사 · 화가 등이 동행하여 문화적으로도 존경을 받고 또 일본문화에도 큰 영향을 미쳤다. 왜란 때 일본으로 건너간 학자와 더불어 사절로 일본으로 간 학자들이 유학을 비롯한 일본문화의 각 부문에 미친 영향은 실로 큰 것이었다.
조선왕조는 사대와 교린이라고 하여 중국 및 일본과의 관계가 그 대외관계의 주류가 되었고, 또 북방 여진족과의 관계도 중국과 관련하여 중요시하였으나 그 밖의 지역과의 관계는 많지 않았다. 그 중에서 중요하다고 할 수 있는 것이 유구(琉球: 高山國, 현재의 류큐로 추정됨)와의 관계이다. 유구는 고려 말에 사신을 보내와서 방물을 바치고 칭신(稱臣)하였으며, 고려도 보빙하여 사신을 보낸 일이 있다. 조선의 태조원년에도 사신을 보내오고 그 뒤에도 자주 내공하였다. 조선은 유구의 세견선을 공인하고 유구인에게 판직을 준 일이 있다. 유구에는 조선의 상인이 표착하는 일이 자주 있었는데, 1431년 이들을 송환하여 오기도 하였다. 또, 유구의 수도 수리(首里) 부근에 많은 조선인이 살고 있었다고 한다. 유구인이 가져온 물품은 남방의 특산물인 향료와 약재 등이었다.
섬라(暹羅), 즉 시암의 아유티아왕조 때에 고려 말과 조선 초기인 1393년(태조 2), 1397년에 사절을 보내와서 진헌한 일이 있으며, 자바(爪哇)의 사절이 1406년 이후 여러 번 와서 남방의 희귀한 새와 약재 · 향료를 헌납하였다. 기록에 의하면 이들이 타고 온 배를 남만선(南蠻船)이라 하고, 그들이 가져온 면직물을 번포(蕃布)라 하여 진중하였다.
가톨릭교가 중국을 통하여 조선에 들어오기 전 임진왜란 때 일본군 중에는 포르투갈인 선교사 세스페데스(Cespedes, G. d.)가 와서 체류한 적이 있고, 청나라에 인질로 갔던 소현세자는 연경에서 독일인 신부 샬(Schall, J. A.)을 만난 일이 있다. 이 밖에 1627년(인조 5)에 네덜란드인 벨테브레이(Weltevree, J.)가 표착하여 박연(朴淵)이라는 이름을 가지고 조선에 영주한 일이 있다. 1653년(효종 4)에 역시 네덜란드인 하멜(Hamel, H.)이 표착하였는데 하멜은 귀국한 뒤에 표류기를 저술하여 조선의 사정을 처음으로 자세히 서양에 소개하였다. 앞에서 말한 효종 때의 나선정벌에서 조선군이 러시아의 군대와 대전한 일도 있다.
조선시대의 전통적인 사대교린을 기조로 한 대외관계는 19세기 후반부터 무너지게 된다. 그것은 주로 구미세력의 팽창과 구미제국의 영향을 받아 근대화에 한 발 앞선 일본에 의해서였다. 이러한 서세동점의 정세하에서 개국외교가 전개된다. 조선의 개국외교는 구미열강과 청국 · 일본의 틈바구니에서 스스로를 지키기 위한 노력이었다. 구체적으로 청나라가 사대의 관계만으로 한반도가 일본이나 러시아의 영향하에 놓이는 것을 막기 어렵다고 생각하여 서구에서의 본국과 식민지와의 관계 개념으로 전환시키려 하고, 일본은 유구(현재의 오키나와)합병과 대만침략에 뒤이어 한반도에로 팽창의 길을 넓히려는 상황하에서 전개되었다.
당시 영국은 러시아의 진출저지를 가장 중요시하고 있었는데, 아시아에서는 청나라나 일본을 통하여 이를 달성하려고 하였다. 그리하여 영국은 청나라의 현상태를 유지하면서 일본을 후원하여 러시아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담당하게 하려고 하였다. 영국과 유럽 여러 나라들은 청나라로 진출하였고, 미국은 일본을 개국시키고 필리핀까지 세를 확장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영국의 주도권에 직접적으로 도전하지는 않았다. 러시아는 19세기 중반 크리미아(Crimea)전쟁에서 영국 · 프랑스 연합군에 패하여 한동안 구주에서 세력이 꺾인 상태에 있었다. 그러나 19세기 후반부터 기력을 회복하면서 동서에 걸쳐 간헐적으로 영역팽창을 위하여 노력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대적 상황 속에서 우리나라는 1876년(고종 13) 처음으로 일본과 병자수호조규(丙子修好條規)를 맺게 되었다. 이 조약은 일본이 미국으로부터 당한 경험을 그대로 모방한 것이다. 미국이 무력위협을 앞세워 맺은 불평등조약을 본받아, 운요호사건을 일으켜 치외법권의 인정을 규정하는 등 불평등한 수호조규를 맺게 한 것이다. 「병자수호조규」 제1조에서는 조선국이 자주지방(自主之邦)으로서 일본국과 더불어 평등지권(平等之權)을 보유한다고 규정하고 있다.
일본은 이미 1871년 청나라와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하여 유구와 대만침략의 길을 걷게 되었는데, 이때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입장을 따지게 되었다. 청나라는 이미 오랜 내우외환을 겪었고, 또 일본이 서구와 결탁하여 침공하게 될 경우를 우려하여 조선이 조공을 바치고 있기는 하지만 내치 · 외교는 자주임을 밝히게 되었다. 또, 이어 일본이 유구를 합병하고 대만을 침공하였고 이어서 1875년의 운요호사건과 이를 빌미로 한 조일병자수호조규 체결을 불안스럽게 관망하고 있었다. 따라서 일본은 우리나라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을 배제하고 한반도에 대한 독점을 확보하기 위하여 제1조에서 조선이 독립국임을 밝혀두게 된 것이다.
이러한 청일간의 대립을 바라보고 있던 서구열강, 특히 영국은 청국과 러시아간에 전쟁이 일어난다면 러시아가 유리하여질 것을 우려하여 일본의 한반도 진출을 바라고 있었다. 이리하여 조약이 체결되었고 뒤이어 부산과 원산을 개항하였으며, 수신사를 일본에 파견하는 한편 일본의 대리공사가 서울에 상주하게 되어 근대적 의미의 국교가 성립되었다. 군사제도의 개편과 문물제도의 개혁이 시도되기는 하였지만 조선측의 의식으로는 교린의 예를 두텁게 한다는 범위를 넘지 못하였다.
조선조정에서 일본과의 수교를 넘어서 적극적으로 문호를 개방하려는 개국외교는 1882년 「조미수호통상조약)」체결부터 시작된다고 하겠다. 이러한 변화는 일본에 수신사 · 신사유람단을 파견하여 일본의 근대화는 물론 서양의 문물까지 접하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청나라의 관리 황준헌(黃遵憲)으로부터 받은 『조선책략(朝鮮策略)』을 통하여 당시 세계정세 파악에 힘입어 구미제국, 특히 미국과의 수교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었다. 한편, 청나라에는 영선사(領選使)를 보내어 근대화운동이라 할 수 있는 양무운동을 보게 되었다. 또, 청나라는 조일수교 당시의 상황을 아쉬워하면서 이전의 영향력을 다시 회복하려는 노력을 보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청나라는 미국과의 수호통상조약 체결을 중개하게 되었다.
단순히 개항조약이라고만 한다면 조일조약이 처음이지만, 조약당사자가 주체적으로 개국하겠다는 의지가 있는지를 기준으로 본다면, 조미수호통상조약(朝美修好通商條約)이 최초의 개국조약이라 할 수 있겠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이 체결되는 데에는 미국의 탐험적인 적극성과 이러한 미국을 이용하여 일본을 견제하는 한편, 이 조약 체결과정에서 청나라가 조선의 종주국임을 확인하여 1876년의 잘못을 만회하려는 청나라의 노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그리고 조선측도 개국 이래 선진문물에 대한 급속한 이해와 아울러 개국의 필요성을 인식하게 되어 개국을 통한 국가의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은 1882년 5월 이홍장(李鴻章)의 알선으로 체결되었다. 그는 조약초안의 제1조에서 조선이 중국의 속방(屬邦)이라는 구절을 넣어, 조일조약의 제1조 ‘조선은 자주지방’이라는 규정을 고치려 하였으나, 미국측 대표인 슈펠트(Schufeldt, R. W.)의 반대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대신 조선의 왕이 미국 대통령에게 따로 서한을 보내어 조선은 중국의 속방이나 내치 · 외교는 자주적으로 한다는 것을 밝히기로 타협을 보았다.
조미수호통상조약에서 미국은 다른 서구제국과는 달리 상당히 공명정대한 나라임을 과시하려고 하였다. 영국처럼 아편무역의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았고, 프랑스처럼 선교의 권리를 요구하지도 않았다. 따라서 영국 · 독일 · 프랑스 등은 이 조약이 선례가 될까봐 조약의 비준을 방해하려고 하였다. 결국 영국 · 독일은 조미수호통상조약의 비준서가 성공적으로 교환되고 난 뒤인 통상조약을 체결하게 되었다. 그리고 기독교의 선교권을 요구한 프랑스와는 1886년에야 조약이 체결되었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은 미국과의 관계를 중심으로 하면서 근대화와 안정을 도모하려고 하였다.
「조미수호통상조약」 제1조는 “제3국이 체약당사국의 어느 한 나라에 대하여 부당하게 또는 억압적으로 행동할 때 다른 당사국도 권고와 주선을 다함으로써 그 우의를 표시하여야 한다.”라고 규정하고 있는데, 조선측은 이를 상호원조의 약속으로 해석하고 있었다. 그러나 ‘주선’이라는 외교용어는 ‘good offices’라는 의미를 가진 최소한의 협력방식에 지나지 않는다. 미국에 대한 기대가 커서 수호조약의 비준서를 가지고 온 푸트(Foote, L. H.) 공사에게 국왕은 관례를 넘어서는 대우를 하였다. 그리고 국왕은 공사를 자주 불러 의견을 묻기도 하고, 군사훈련관의 파견과 귀족들의 자제를 교육시킬 교사의 파견을 요청하기도 하였다.
나아가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민영익(閔泳翊) · 홍영식(洪英植) · 서광범(徐光範)을 수신사로 미국에 파견하였다. 주한 미국공사는 조선에 대한 우호적인 입장에서 활동을 전개하고 또 이를 본국에 보고하였다. 그러나 미국정부는 서울에 공사관을 설치하기는 하였지만 조선에 대하여 잘 몰랐을 뿐만 아니라 관심이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슈펠트 제독 · 푸트 · 포크(Faulk) 등 주한 공관원의 열의는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관심 차원에 머물고 있었다. 미국은 한반도를 둘러싼 국제분쟁에서 엄정 중립을 지키려고 하였다. 당시는 대영제국의 세계지배시대였기 때문에 한반도뿐만 아니라 세계정세 전반에 걸쳐 관망하는 자세를 유지하면서 미국의 상업적 이익이나 종교활동이 다른 나라보다 불리한 대우를 받지 않으면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런데 청나라는 사정이 달랐다. 조일조약 이후 조선이 문호를 개방하고 서구열강들과 계속하여 조약을 맺게 되자, 더이상의 영향력 축소를 막기 위하여 속방으로서의 지위를 분명하게 밝히려고 하였다. 그래서 임오군란이 일어나자 흥선대원군을 납치하여 감으로써 조선왕도 폐위할 수 있는 권리가 있는 것처럼 대외에 과시하려고 하였다. 또, 뒤이어 조중상민수륙무역장정(朝中商民水陸貿易章程)을 체결하였다. 이는 다른 나라들이 평등하게 혜택을 입을 수 없는 조중간의 특수한 관계를 확인하는 한편, 청국인의 독점적인 상권을 확보하려고 한 것이다.
청나라는 이 장정을 통하여 종주관계를 명백하게 하는 한편, 일방적인 치외법권과 서울을 포함한 네 곳에 거주통상의 권리와 행상, 내지유력(內地遊歷)과 연안어업권 및 특수관세설정과 해상방위담당 등의 특례적인 지위를 확보하였다. 심지어 조선국왕과 북양대신(北洋大臣) 이홍장이 대등한 지위라는 것을 규정하기도 하였다. 당시 조선은 국내정치가 극히 불안하였기 때문에 통상외교에서 앞선 청나라의 경험과 지도에 의존하려는 자세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청나라에 부탁하여 통상외교를 담당할 고문 인선을 의뢰하게 되었다. 이홍장은 외교고문으로 묄렌도르프(Möllendorff, P. G. V., 穆麟德)를, 상무담당으로는 마건상(馬建常)을 천거하여 서울에 상주하게 하였다. 이로써 조선에 대한 청나라의 영향력은 크게 강화되었다.
일본은 임오군란으로 일본공사관이 불타고 공사가 서울을 탈출하는 상황이 전개되자 이를 만회할 기회를 노리고 있었다. 청나라에 대하여 직접적인 행동을 취할 수 없었던 일본측은 조선을 상대로 제물포조약을 체결, 군란으로 인한 피해를 보상받았을 뿐만 아니라 일본공사관 경비라는 명목으로 일본군대를 주둔시킬 수 있는 권리를 가지게 되었다.
청나라의 간섭을 배제할 뿐만 아니라 근본적인 정치개혁을 추구하는 젊은 관료들이 중심이 된 이른바 개화파가 등장하였다. 그들은 일본의 메이지유신(明治維新)과 근대화를 위한 여러 정책들을 본받으려고 하였다. 아울러 일본의 힘을 배경으로 하여 민씨세력을 타도할 뿐 아니라 청나라의 세력과 간섭을 배제하여 자주독립을 이루고자 하였다. 그들은 기회를 노리다가 1884년 9월 인도차이나를 둘러싼 청국과 프랑스간의 전쟁을 기회로 삼아 일본의 원조 약속하에 1884년 12월 4일 우정국의 개국 축하연에서 정변을 일으켰다. 이를 갑신정변(甲申政變)이라 부른다. 그러나 이 정변은 3일천하로 끝났다. 청국군의 기민한 행동 앞에 일본군이 후퇴함으로써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
일본은 갑신정변의 실패를 개화파와 접촉하여 온 다케조에[竹添進一郎] 공사 개인의 잘못으로 돌리고, 조선에 대하여 한성조약을 강요, 체결하였다. 또, 이토 히로부미[伊藤博文]는 톈진[天津]으로 가서 이홍장과 담판하여 청일 양국은 4개월 내 조선에서 군대를 철수할 것과 앞으로 어느 한 나라가 조선에 파병하게 될 때에는 상대방에게 서로 사전에 통고할 것, 그리고 군사교관은 청일 이외의 외국인으로 한다는 것 등을 내용으로 하는 톈진조약을 1885년 5월 18일 체결하였다. 이로써 일본은 조선에 대한 파병권 등에서 청나라와 동일한 지위에 서게 되었으며, 이는 나중에 청일전쟁의 한 계기가 된다.
이 같은 열강의 경쟁관계 속에서 조선은 자주력의 신장을 위하여 노력하였는데, 이는 청나라의 방해를 무릅쓰고 미국에 독자적으로 사절단을 파견한 데서도 알 수 있다. 미국으로 파견된 민영익을 전권대사로 하는 사절단은 1883년 9월 18일 아서(Arthur, C. A.) 대통령에게 신임장을 전달하였다. 그런데 그 내용은 한글로 쓰여졌으며, 연호도 우리의 개국연호를 사용하였다. 이어서 청나라의 간섭에도 불구하고 박정양(朴定陽)을 주미 특파전권공사로 파견하였다. 박정양은 청나라의 간섭과 제약에도 불구하고 미국에서 독자적으로 다른 주권국가의 사절과 똑같은 행동을 취하였다. 이에 청나라는 그의 처벌을 요구하였다. 국왕은 묄렌도르프의 후임으로 이홍장이 천거한 미국인 고문 데니(Denny, O. N.)의 의견에 따라 청나라의 요구를 들어주지 않았다. 국왕은 청나라에 대하여 유화적인 태도를 보이기는 하였지만 1889년 3월 귀국한 박정양을 승지 겸 부제학에 임명하였고, 1891년에는 형조판서에 임명하였다.
한편, 러시아는 한반도에서 청국의 세력을 밀어내고 열강들의 각축 속에서 어부지리를 얻으려고 하였다. 러시아와는 1885년 수호통상조약, 1888년 육로통상장정(陸路通商章程)이 체결되어 있었다. 이러한 관계하에 함경북도 경흥(慶興)이 러시아와의 통상을 위하여 개방되었으며, 러시아인의 조차지도 허용되었다. 러시아는 원산과 절영도(絶影島)에 저탄장(貯炭場)을 얻기 위하여 노력하였으나 청국의 간섭으로 실현되지는 못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두 차례의 조 · 러밀약설이 나오게 되었다.
「톈진조약」 제1조 청일 양국군대가 철수한다는 규정에 따라, 우리 정부의 일각에서는 자주적인 입장을 굳히기 위하여 청일이 아닌 제3국, 즉 러시아의 보호와 원조에 의존하려고 하였다. 이러한 노력은 갑신정변 이후 대원군의 석방과 환국을 이용하여 내정과 외교에 압력을 가하는 청국에 대한 거부감으로 더욱 커졌다. 척화자주(斥華自主)는 인아배청(引俄背淸)의 길밖에 없다고 믿게 되었다. 그런데 이를 권고한 묄렌도르프는 이홍장의 노여움을 사서 파면당하였는데 후임으로 온 데니와 개항장의 해관업무 책임을 받고 온 메릴(Merill, H. F.)도 청나라의 조선정책과 위안스카이[袁世凱]의 오만한 행동에 저항하는 태도를 취하였다.
조 · 러 간에 성립된 밀약의 자세한 내용과 당시 러시아의 태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다. 당시 조선조정에서 청국의 고압적인 자세에 거부감을 느끼고 러시아의 도움에 기대를 걸었던 것은 사실이었다. 그러나 러시아의 이러한 기미와 관련하여 영국은 청국에 통고하고 1885년 거문도를 점령하여, 러시아의 팽창에 대응하려고 하였다. 그러자 러시아는 놀라서 조정을 통하여 항의하는 한편, 청국에 대하여서는 조선 영토를 점령하겠다고 위협하였다. 2년 동안 교섭한 결과 어떤 나라도 조선의 영토를 점령하지 않게 하겠다는 청국의 다짐을 받고 영국함대는 1887년 철수하였다.
서구세력의 무력적 위협과 종교 · 사회적 침투에 대한 위기의식, 지배층에 대한 불신과 실망은 새로운 사회적 분위기를 낳게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 중의 하나로 동학운동을 들 수 있다. 동학은 신분제의 폐지와 사회개혁을 표방함으로써 그 교세가 급속하게 커졌다. 처음에는 처형당한 최제우(崔濟愚)의 신원(伸寃: 원통한 일을 풂)에 머물렀던 운동이 1893년 보은집회(報恩集會) 이후 그 주도권이 남접(南接)파로 불리는 전봉준(全琫準) · 손화중(孫化中) · 김개남(金開南) 등에게로 넘어갔고, 운동의 목적도 보국안민(輔國安民) · 척양척왜(斥洋斥倭)로 바뀌었다. 그 성격도 단순한 종교운동에서 농민운동으로 변하였다.
당시 조정에서는 이러한 국내적인 사태를 독자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이 없는 데다가 이를 기화로 청일의 경쟁이 격화되자, 고종은 미국에 중재를 요청하였으나 미국은 현지 공관에 ‘개입불허’를 강력하게 지시하였다. 동학농민운동의 반외세 특히 반일적 성격과 1894년 4월 김옥균의 처형은 일본 국내에 상당한 충격을 안겨주었다. 한반도를 둘러싼 청일간의 경쟁에서 결전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일본은 당시 최강국인 영국의 지지를 얻으려고 노력하였다. 영국은 일본의 급속한 성장에 감명받아 일본이 러시아 세력에 대한 방파제 역할을 해줄 것을 기대하고 있었다.
한편, 조선조정의 파병요청을 받은 청국은 엽지초(葉志超)로 하여금 3,000명을 거느리고 아산만에 상륙하게 하였고, 이어 3척의 군함을 제물포에 파견하였다. 이홍장은 톈진조약에 따라, 청국의 파병이 조선국왕의 요청에 의한 것임과 국내질서가 회복되는 대로 즉시 철수할 것임을 일본과 러시아에 각각 통고하였다. 일본은 이보다 앞서 동학농민군이 우세를 보이자 수송선을 집결시키고 출동에 대비하고 있었다. 청군의 출정통고를 받자 일본은 교민보호 등의 구실로 대포로 무장한 8,000명의 병력을 서울 주변과 제물포에 주둔시켰다.
청일의 양군대가 우리나라에 상륙한 무렵에는 이미 전주화약(全州和約)이 이루어져 민란진압이라는 파병의 구실이 없어졌다. 그러나 일본은 공동으로 조선의 내외개혁을 지도하자고 제의하였고, 청국은 이를 거절하였다. 일본은 서울주재 외국대표들의 청일 양군대의 동시철병제안에도 응하지 않고 단독으로 내정개혁을 강행할 것을 통고하였다.
1894년 7월 23일 새벽 일본군은 갑자기 궁정을 점령하고 대원군을 앞세워 청국에 대한 선전포고와 청국군의 격퇴를 일본에 요청하는 선언을 하게 하였다. 이어 조선조정에 강요하여 공수동맹을 맺고 일본군의 작전 및 식량공급에 협력하게 하였다. 아산해전에 이어 평양해전, 그리고 압록강전투에서 승리를 거둔 일본은 마관조약(馬關條約)을 맺음으로써 아시아의 정세를 뒤엎어 놓았다. 「마관조약」은 제1조에서 청국으로 하여금 조선이 완전한 독립국임을 선언하게 하였고, 요동반도 · 대만 및 팽호도를 일본에 할양하고 2억 냥의 배상금을 물게 하였다.
그러나 일본의 요동반도 점유는 러시아 · 프랑스 · 독일의 이른바 삼국간섭에 의하여 좌절되고 말았다. 삼국간섭은 우리나라와 청국에 대한 러시아의 영향력을 크게 향상시켜 주었다. 청국은 러시아에게 1896년 협정을 체결하여 만주철도부설권을 주었으며, 만주 전역에 걸친 러시아의 특권을 인정하는 동맹을 맺었다. 그리고 조선조정에서는 친러시아파가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일본은 친러시아세력의 중심인물로 민비(閔妃)를 지목, 을미사변을 일으키게 되었지만, 결과는 일본에게 더욱 불리하여졌다.
서울주재 외국대표들의 항의를 받았을 뿐만 아니라 국왕이 러시아공사관으로 피신한 1896년 2월 아관파천(俄館播遷)의 결과 제3차 김홍집내각(金弘集內閣)은 무너지고, 친러시아 인사들이 지배층으로 등장하여 러시아를 배경으로 하는 제도개혁이 이루어졌다. 이러한 상황에서 러일간의 한반도를 둘러싼 교섭이 전개되고, 한반도 분할안이 논의된다. 1896년 5월 니콜라이 2세(Nicholai Ⅱ)의 대관식에 참석한 야마가타[山縣有朋]는 로바노프(Lobanov) 외무장관과의 회담에서, 한국에 대한 공동간섭과 공동파병을 제의하면서 38도선을 경계로 분계선을 설치할 것을 제의하였다. 그러나 러시아는 이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런데 1896년의 만주에 대한 러청조약의 내용이 알려지고, 1898년 러시아가 여순(旅順)과 대련(大連)을 조차하자 영국은 구룡반도(九龍半島)와 여순 · 대련의 맞은편인 위해위(威海衛)를 조차하고, 독일은 교주만(膠州灣)을 얻었으며, 미국은 필리핀을 차지하는 등 러시아의 세력증대에 적극적으로 대응하게 되었다. 뿐만 아니라 조선에서도 독립협회의 활동과 러시아에 저항하는 여론이 강해졌다. 러시아는 만주에 주력하는 한편, 한반도에서의 현상유지를 위하여 1898년 4월 「니시(西) · 로젠(Rosen)협정」에서 조선의 내정에 대한 불간섭을 내용으로 하면서 한반도를 남북으로 분할할 것을 제의하게 되었다. 이번에는 일본이 이 안을 거절하게 된다.
한편, 조선조정은 칭제건원(稱帝建元)을 실시, 1897년을 기하여 광무(光武) 원년으로 삼고 국호를 대한(大韓)이라 하였다. 독립제국임을 세계만방에 선포하기는 하였지만, 순탄한 앞날을 기대할 수는 없었다. 만주를 포함한 청국의 전영토가 러시아 · 영국 · 독일 · 프랑스 등 서구열강의 세력범위로 분할되는 사태에 이르자 1899년 반외세의 의화단(義和團)의 난이 발생하였다. 이 난을 진압하기 위하여 서구열강들은 북경을 다시 점령하게 되었다. 이때 러시아는 철도보호를 구실로 만주를 점령하였고, 난이 진압된 뒤에도 군대철수를 거부하게 되자, 영국과 일본은 이른바 영일동맹을 맺게 되었다. 1902년 1월 30일 체결된 이 조약에서 영국은 일본의 조선에 있어서의 특수이익을 인정하고, 러일이 전쟁을 하는 경우 영국은 엄정중립을 지키지만 제3국, 즉 러시아의 동맹국인 프랑스가 러시아를 도우면 영국도 일본을 돕기로 하였다.
러시아는 1902년 5월 한국의 용암포(龍岩浦) 조차를 요구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일본의 항의로 이루어지지 않았으나 10월에는 러시아가 만주철수계획을 수정하여 거기에 포대를 설치하였고, 남만주에 군대를 증강시켰다. 이에 일본도 러시아의 철군을 촉구하는 한편 일본이 한국에서 최우위의 이익을 점유하고, 만주에서 러시아의 철도경영권은 인정하나 일본인의 상업활동도 허용할 것 등을 요구하고 나섰다. 러시아는 일본이 한국을 전략적인 목적으로 쓰지 않는다는 보장하에 정치 · 경제적 우월권을 가지는 것도 인정하며, 북위38°선 이북을 중립지대로 할 것, 그리고 남만주는 일본의 이익범위 밖에 있음을 주장하였다. 그러나 러시아와의 일전을 치르기로 작정하고 있는 일본이 이러한 제의를 받아들일 리가 없었다. 또, 러시아로서는 일본을 과소평가하였을 뿐만 아니라 전통적인 남하정책을 쉽게 포기할 수 없기 때문에 일본의 요구를 받아들일 수 없었다.
러일 간의 대립은 1904년 1월 8일 일본이 러시아함대를 공격함으로써 러일전쟁으로 이어졌다. 한반도와 만주를 둘러싼 러시아와 영국 · 미국의 지원을 받은 일본의 패권다툼이 결국에는 전쟁으로 발전한 것이다. 한국은 1904년 1월 23일 국외중립(局外中立)을 선언하였다. 그러나 힘 없이는 중립을 지킬 수가 없었다. 일본은 군대를 서울에 입성시켜 각종 건물을 점거하고 압력을 가하여 2월 23일 동맹을 내용으로 하는 「한일의정서」를 성립시켰다.
「한일의정서」 제2조에서는 “한국은 일본을 믿고 시설의 개선에 관하여 충고를 받아들인다.”라고 하였으며, 제4조에서는 “제3국의 침략이나 내란으로 인하여 대한제국 황실의 안녕과 영토보전에 위험이 있을 때 일본은 필요한 조치를 취하며, 한국은 일본의 이러한 행동을 용이하게 하기 위하여 충분한 편의를 제공하기로 하였다. 일본은 전(前) 항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하여 필요한 거점을 때에 따라 수용할 수 있다.”라고 규정하고 있다. 이는 한국에 대한 침략적 의도를 처음으로 공식적으로 분명하게 나타낸 것이며, 한국을 보호국화하려는 첫 조처라고 할 수 있다. 이어 1904년 8월 22일 체결된 외국인용병협정으로 일본의 고문정치가 실시되며, 한국이 외국과 조약을 체결할 때에는 일본과 사전에 협의하도록 하여 사실상의 보호관계가 성립되고 말았다.
러일전쟁은 1905년 러시아에서 혁명이 일어나 영국 · 미국 양국의 지원을 받는 일본에게 유리하게 전개되었다. 결국 미국의 루스벨트(Roosevelt, T.) 대통령이 중재에 나서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미국은 러시아의 침투를 막기 위하여 일본이 한국을 지배하는 것이 유리하다는 영국의 입장과 같은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그리하여 1905년 7월 태프트 · 가쓰라협정(Taft · 桂協定)이 체결되어 필리핀에 대한 미국의 지배권과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상호 인정하게 되었다.
한편, 1905년 8월 영국은 일본의 승리를 기하여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일본의 한국에 대한 결정적인 지배권을 인정하여 주었다(제3조). 그리고 1905년 9월 루스벨트의 중재로 체결된 러일 간의 「포츠머스(Portsmouth)강화조약」은 제2조에서 제2차 영일동맹과 같은 내용의 한국에 대한 일본의 지배권을 인정하고 있다. 미국 · 영국 · 러시아 등 열강으로부터 한국에 대한 특수한 지위를 인정받은 일본은 한국의 보호권을 합법적으로 확립하기 위한 조약을 강요하였다. 그것이 바로 1905년 11월 17일 강압적으로 체결된 을사조약이다. 이 조약은 한국의 외교권을 빼앗고 통감정치의 실시를 강요한 것이었는데, 이로써 한국은 독립국가로서의 위신을 상실하였다. 일본은 이른바 보호권을 행사하면서 독도를 시마네현[島根縣]에 편입시켰을 뿐만 아니라, 1909년 간도를 안봉(安奉)철도부설의 교환조건으로 청국에 넘겨주고 말았다.
일본은 1906년 통감부를 설치하고 이토를 통감으로 보내 외교는 물론 내정까지 관장하게 하였다. 이에 따라 『대한매일신보(大韓每日申報)』는 을사조약이 고종의 승인한 바가 아님을 강조하여 그 무효임을 주장하고 열강의 공동보호를 구하는 고종의 친서를 발표하였으며, 상소와 연설, 시위와 철시, 그리고 분사가 잇따랐고, 의병이 각지에서 일어났다.
일본은 1907년 헤이그특사사건을 계기로 고종을 강제로 퇴위시키고 순종을 즉위하게 하였다. 이어 한일신협약, 즉 정미7조약을 맺어 모든 내정에 통감이 간섭할 수 있게 하고, 정부 각 부처에 일본인 차관을 두어 차관정치를 강행하면서 대한제국군대를 강제로 해산시켰다. 이와 같은 일련의 조처에 뒤이어 1910년 8월 이른바 「한일병합조약」이 체결되었다. 미국을 위시한 서구 열강들은 자국민의 통상권이 한반도에서 계속 존중된다는 보장을 받는 이외에 아무런 이의도 제기하지 않았다.
1910년 국권상실 직후부터 한국인들의 국권회복운동과 항일운동은 거세게 전개되기 시작하였다. 이는 그 이전부터 전개되어오던 항일의병운동의 정신을 계승한 것으로 다양한 형태로 전개되었다. 특히, 1919년의 3 · 1운동은 일제의 무단정치에 반대한 민족적 항거였으며, 거족적인 민족운동이었다. 3 · 1운동을 계기로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었으며, 이를 통하여 주권이 계승되었다고 볼 수 있다. 또, 일본제국주의는 이를 계기로 종래의 무단통치에서 문화정치를 표방하게 되었다.
일본은 1910년에 이미 토지조사국을 설치, 토지조사사업을 실시하여 1918년 끝내고 산미증식계획, 공업화 등의 식민정책을 실시하는 한편, 동양척식주식회사 · 회사령 · 일본재벌의 침투 등을 통한 경제적인 약탈을 시작하였다. 이와 같은 민족적인 억압과 경제적인 수탈이 항일운동에 한층더 박차를 가하게 되었다.
이리하여 항일운동은 국내외에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해외에서의 항일투쟁은 임시정부의 활동과 무장독립단의 활동이 그 대표적인 것이다. 3 · 1운동 이후 해외로 망명한 이승만(李承晩) · 김구(金九) · 안창호(安昌浩) · 이동녕(李東寧) 등이 중심이 되어 상해 프랑스조계에 임시정부를 세우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당시 국내외의 항일투사들의 총본산이었다. 1919년 4월 임시정부헌장이 선포되어 이동녕이 의장이 되고, 이승만 · 안창호가 각각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이 되었다. 이어 헌법이 제정되어 이승만이 대통령에, 이동녕과 김구가 국무총리와 내무총장으로 임명되었다. 그리고 정부로서 국무원이, 국회로서 의정원이 구성되었다.
임시정부는 한국의 망명정부로서 독립군을 직접 · 간접으로 도와주었고, 언론과 외교를 통한 항일운동의 통일적인 지휘탑이 되어 역할을 하였다. 또, 연통제(聯通制)라는 조직망을 가지고 국내의 국민과 연결, 항일운동을 지도하였다. 임시정부는 광복군을 조직하고 해외에서의 항일무력투쟁을 총지휘하여 1941년 대일선전포고를 한 뒤 직접 참전하였다.
한편, 만주지방으로 망명한 항일투사들은 의병출신들과 결합하여 독립군과 군정부(軍政府)를 조직하여 항일운동을 전개하였다. 그 중 북간도의 국민회(國民會)와 임시정부 산하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 및 신흥무관학교 등이 대표적인 항일단체였다. 그리고 이들에 의하여 치러진 1920년의 봉오동전투와 청산리전투는 대표적인 승리로서 무장독립군들의 사기를 높여주었다.
만주에서의 독립군은 조직적인 활동을 위하여 서간도의 참의부(參議府) · 남만주의 정의부(正義府) · 북만주의 신민부(新民府) 등 세 단체로 통합되었다가 1927년에는 군민회의(軍民會議)로 통합되었다. 이 밖에 김원봉(金元鳳)의 의열단(義烈團)은 일본인 요인암살과 기관폭파를 목적으로 활동을 전개하였다. 의열단이 해산된 뒤에는 김구가 애국단(愛國團)을 조직하였다. 그 단원인 이봉창(李奉昌)은 일본왕을 저격하였으나 실패하였고, 윤봉길(尹奉吉)은 상해 홍구(虹口)공원에서 시라카와[白川義則] 등 일본장교들을 살상하였다.
한편, 항일투쟁은 국내에서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1926년 6월 10일 순종의 장례식 때 일어난 6 · 10만세운동은 민족적인 분노를 표출한 사건이었다. 6 · 10만세운동 이후 반일감정과 신간회(新幹會)를 통한 국민의 자각은 날로 높아져, 1929년 11월 3일 광주에서 일본학생이 한국여학생을 희롱한 사건을 계기로 일어난 광주학생운동에서 폭발적으로 표출되었다. 이 운동은 신간회의 도움으로 확대되고, 당시 만연되어가던 사회운동으로서의 성격을 띠었다.
한편, 통일적이고 효율적인 항일운동을 전개하기 위하여 1927년 일부 사회주의자들과 비타협적 민족주의자들의 합작으로 신간회가 창립되었다. 민족단일체로서 활발한 운동을 전개하긴 하였지만, 일제의 탄압과 좌우의 대립으로 결국 1931년에 해체되고 말았다. 그 밖에 부녀단체로서의 근우회(槿友會)와 대동단(大同團)의 활동이 있었다. 또, 경제적인 항일투쟁도 전개되었는데 매년 급격하게 늘어나는 소작인들의 소작쟁의, 그리고 1931년 일본의 공업화정책으로 생성하기 시작한 노동자들의 노동쟁의도 일제하 사회운동의 중요한 부분이라 하겠다. 항일운동은 문화면에서도 전개되었다. 즉, 언론 · 잡지 등을 통한 투쟁, 국어를 통한 투쟁, 국사연구를 통한 투쟁 등이 전개되었다.
제1차세계대전이 종결되고 1919년 파리강화회의가 개최되었다. 대전의 종결에 앞서 미국의 윌슨(Wilson, W.) 대통령은 약소민족자결주의와 민족독립을 주요 내용으로 하는 14개 조의 세계정치원칙을 발표하였다. 이에 미국에 있던 대한인국민회는 전체대표회를 소집하여 강화회의에 파견할 한국대표로서 이승만 · 정한경(鄭翰景) · 민찬호(閔贊鎬) 세 사람을 선출하였다. 그러나 미국은 대표단의 출국을 허용하지 않았다.
한편, 중국 상해의 독립운동가들은 신한청년당(新韓靑年黨)을 결성하고, 국민대표로 김규식(金奎植)을 파리강화회의에 파견하기로 결의하였다. 김규식은 2월 1일 상해를 출발, 인도양을 거쳐 3월 13일 프랑스 파리에 도착하였다. 1919년 4월 대한민국임시정부가 수립되자 정부는 김규식을 외무총장으로 임명하고, 평화회의 대한민국위원 겸 주(駐) 파리위원으로 임명하고 신임장을 파리로 보냈다.
김규식은 국내 및 시베리아 · 하와이 · 미국 · 멕시코에 살고 있는 1870만 명의 한국인 및 세계대전 때 유럽동부전선에 참가하였던 5,000명의 한국인명의로 독립항고서를 제출하였다. 또, 각국 대표단과 개별접촉을 통하여 한국의 입장을 설명하였다. 그러나 파리강화회의는 전승제국주의열강들의 이권분할을 위한 회의에 지나지 않았고 약소국의 의견은 전면적으로 무시되었으며, 한국문제에 대하여서는 한마디 토론도 없이 종결되고 말았다.
임시정부가 수립된 초기에는 국무원 내에 외무사무를 관장하는 외무부가 있었고, 그 안에 일반 행정사무를 맡아보는 비서국과 외교사무를 관장하는 외사국, 통상관계를 맡아보는 통상국이 설치되어 있었다. 그러나 외무부가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었다. 당시 외교의 주안점이 파리강화회의와 국제연맹에 대한 활동에 있었을 뿐만 아니라 외무총장인 김규식이 정부대표로 파리에서 활동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 이승만은 워싱턴에 구미위원부를 설치하고 구미 방면의 외교업무는 그가 관장하고 있었다.
한편, 구미 이외의 지역에서의 외교활동도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임시정부는 1921년 국무총리로서 외무총장을 겸임하고 있던 신규식(申圭植)을 중국의 손문(孫文) 정부에 파견하여 외교관계를 수립하려고 하였다. 11월 18일 정식으로 접견하는 의식을 가짐으로써 한중 양국은 외교상의 정식절차를 밟았다. 그 뒤 임시정부는 외무부 외사국장 박찬익(朴贊翊)을 주(駐) 광둥(廣東)대표로 임명하여 상주시켰다. 1930년 장개석(蔣介石)의 난징정부가 통일정부를 수립하자, 임시정부의 대중국외교는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게 되었다.
임시정부는 소련과도 외교관계를 유지하였다. 초기 공산주의 지도자인 이동휘(李東輝)가 국무총리로 재임하고 있었기 때문에 소련과의 접촉은 쉽게 이루어질 수 있었다. 또, 파리강화회의에 실망한 독립운동가들이 국제연맹 밖에 있던 소련에 대하여 관심과 기대를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또, 소련으로서도 국제혁명노선상 한국민족의 독립과 피압박계급의 해방을 내세웠기 때문에 약소민족의 독립운동에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일본과의 관계를 고려하여 외교는 비밀리에 공산주의자들을 매개로 이루어졌다.
1920년 1월 22일 정부는 안공근(安恭根) · 여운형(呂運亨) · 한형권(韓馨權)을 모스크바외교원으로 임명하였다. 그리고 한형권은 코민테른 제2차 대회에 참석하였으며, 레닌정부와 교섭하여 한소비밀협약을 체결하였다. 그런데 독립운동자금으로 받아온 돈이 정부에 납입되지 않고 공산주의자들에 의하여 유용되자, 임시정부 요인들은 이동휘를 규탄하여 국무총리에서 사임하도록 하였다. 그 뒤 나머지 돈을 받기 위하여 김규식이 직접 교섭하였으나 실패로 돌아갔다. 1922년 1월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개최된 극동인민대표대회에 23개 단체에서 선발된 52명이 참가하였다. 그러나 거기에서 한국문제 결의안이 나오기는 하였으나 독립문제는 언급되지 않았고, 공산세력의 확장만을 결의하였다. 그리하여 그 뒤에는 임시정부와 소련과의 대외관계는 거의 없다시피 하였다.
1930년을 전후한 세계정세의 변동과 1931년의 만주사변이라는 배경하에 대한민국임시정부의 활동도 활발해졌다. 1933년 1월 제10회 국무회의에서는 적극적인 외교를 펼치는 한편, 극동지역의 약소민족들과 공동보조를 취하기로 하였다. 이어 외무부에 외무위원회를 설치하고 외교에 관한 중요사항을 협의결정하게 하였으며, 미국에 주미외무행서(駐美外務行署)를 설치하였다. 이어 1937년의 중일전쟁과 제2차세계대전 발발로 임시정부의 대외활동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1941년 3월 국무회의에서는 대한민국임시정부 선전위원회규정을 제정하여 한국독립의 중요성을 선전하였다. 또, 대미외교를 강력하게 추진하여 미국대통령에게 임시정부의 승인, 외교관계의 개시, 군사경제원조 등 6개 항을 요구하였으며, 이승만을 정식대표로 임명하여 대미외교를 펼치도록 하였다. 이어 정부를 충칭(重慶)으로 옮겨 전시체제에 적응하는 임시약헌(臨時約憲)으로 개칭하여 정부기구를 강화하고, 대중국외교를 강력하게 전개하여 한국광복군을 조직하였다. 마침내 임시정부는 1941년 12월 대일본 선전포고를 발표하여 동맹국의 일원으로 대일전에 참전할 뜻을 선포하였다. 하지만 미국을 위시한 강대국들은 그다지 관심을 갖지 않았다. 그러나 이승만을 비롯한 구미외교위원회는 굴하지 않고 대미외교를 계속하였다.
한편, 제2차세계대전에서 전세가 연합국측에 유리하게 돌아가자 전후의 국제정치질서와 안전보장을 위한 국제기구의 필요성이 논의되는 과정에서 한국문제가 제기되기 시작하였다. 한국의 독립문제가 처음으로 논의된 것은 1943년 3월 미국과 영국의 수뇌회담 때였고, 한국문제가 주요한 문제로 다루어진 것은 카이로선언 · 포츠담선언 등에서이다. 1943년 12월 연합국측의 승리가 굳어져가고 있을 때 미국 · 영국 · 중국의 3거두회담이 카이로에서 열렸다. 루스벨트 · 처칠 · 장개석 등이 한국의 노예상태에 유의하여 ‘적당한 시기(in due course)’에 자유와 독립을 부여하기로 하였다. 카이로선언 이후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자 1945년 2월 미국 · 영국 · 소련 3국대표자들이 얄타(Yalta)에서 종전과 관련된 회의를 열었다. 그리고 1945년 5월 독일이 연합국에 항복하자 전세는 연합국과 일본의 결전으로 좁혀졌다. 그 해 7월 미국 · 영국 · 소련 3국수뇌들이 베를린교외의 포츠담(Potsdam)에 모여 카이로선언을 재확인하였다. 이로써 연합국들은 한국의 광복을 약속한 것이다.
일본이 포츠담선언을 수락함으로써 전쟁은 끝났다. 8월 10일 대일선전포고를 한 소련은 1주일 만에 만주와 38도선 이북을 점령하였다. 미군은 1945년 9월 7일 인천에 상륙하였다. 1945년 9월 7일 점령군사령관포고 제1호로 군정을 실시한다고 발표하자, 일반 한국인들은 매우 당황하게 되었다. 이미 조선건국준비위원회, 조선인민공화국 등의 이름으로 정치활동이 전개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인민공화국이 해체되었고, 나아가서는 오랜 항일투쟁의 역사를 가진 상해임시정부의 권위마저 인정하지 않게 되었다. 한국의 사정에 자세한 정보가 없었던 미군정청은 행정의 편의를 위하여 일본인 관리의 직장복귀를 명하는 한편, 그들을 보호하는 입장에 서게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한국정치의 장래를 둘러싸고 미군정과 좌 · 우익의 대립이 생기게 되었다. 미군정은 나아가 군정장관의 고문에 한국민주당 계열의 인사를 등용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방침은 한국의 정치가 한국인들간의 정치적 갈등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38도선 이북을 점령한 소련의 전략 · 전술에 이용되기도 하였다.
한국 내의 정국이 정당의 난립과 좌 · 우익의 대립으로 혼란을 거듭하고 있는 상황에서 1945년 12월 모스크바에서 개최된 3대국 외무장관회의에서는 한국문제의 처리방안으로 4대국에 의한 향후 5년간 신탁통치를 실시하기로 결정하였다. 이 소식이 전하여지자 광복이 곧 독립임을 생각하고 있던 한국인들은 좌 · 우익를 막론하고 모두 반대하였고, 한동안 민족적 단합의 계기가 형성되는 듯하였다. 우익측에서는 정당 사회단체 연석회의를 열어 신탁통치반대국민총동원위원회를 조직하였다. 미군정청의 한국인 직원들은 반탁위원회의 지시에 따라 태업에 들어갔다. 그리고 연일 반탁데모가 계속되었다. 그러나 좌익측에서는 3상회의의 결정을 지지하기로 한 소련의 방침에 따라 갑자기 신탁통치찬성으로 급선회하게 되었다. 한국의 국내정치는 찬탁과 반탁으로 좌우가 분명하게 분열되는 상황이었다. 찬탁으로 방향전환을 한 좌익은 여론상 불리하여지자 광범한 세력규합을 위하여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였다.
이와 같은 과정에서 모스크바삼상회의의 결정에 따라 한국의 독립방안을 강구하기로 한 미소공동위원회가 1946년 3월 서울에서 개최되었다. 소련은 이미 38도선 이북에서 인민위원회를 통하여 북한사회를 공산화하여 가고 있었기 때문에, 남한의 친미세력을 제거하면 신탁통치과정에서 한반도를 소련세력권으로 장악할 수 있다고 믿고 있어 미소공동위원회를 그 수단으로 이용하려 하였다. 미군정은 한반도가 소련의 독점적인 영향권 내에 놓여서는 안 된다는 입장이었다. 그리고 미국은 소련에 비하여 막연한 입장에서 좌우의 합작 또는 중도정치를 구상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7년 5월 다시 열린 미소공동위원회에서는 합의에 도달할 가능성이 없게 되자, 이러한 상태를 더이상 계속할 수 없다고 생각하였다.
한편, 북한에서는 1946년 2월 8일 사실상의 단독정권인 북조선인민위원회가 성립되어 김일성(金日成)이 위원장에 취임하고, 토지개혁을 포함한 10개 강령을 발표하였다. 3월 23일에는 이를 확대한 20개 강령 등 북한은 이른바 ‘민주기지’로 건설할 것을 표방한 기본정책을 발표하였다. 제1차 미소공동위원회가 끝난 뒤인 7월 22일에는 북조선민주주의민족통일전선이 결성되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8월 30일 조선공산당 북조선분국과 신민당이 합당하여 북조선노동당이 결성되어 단독체제를 갖추어 가고 있었다.
제2차 미소공동위원회도 실패로 돌아가자 미국은 1947년 8월 28일 영국 · 중국 및 소련에 대하여 모스크바협정을 조속히 실현할 방법을 강구하기 위하여 4대국 회의를 제의하였다. 영국과 중국은 이를 수락하였으나 소련은 이를 거부하였다. 미국은 모스크바협정의 테두리 내에서 소련과 직접 교섭하는 방법으로 한국의 독립을 달성할 수 없다고 생각하고 1947년 9월 17일 한국문제를 제2차 유엔총회에 상정하게 되었다. 이는 당시 이승만의 단독정부 불가피론이 미국에 받아들여진 결과였다. 소련은 미국의 이러한 조처가 모스크바협정에 위반되며, 전후 처리문제의 하나인 한국문제를 유엔에 상정하는 것은 헌장 107조의 정신에 위반된다고 항의하였다.
1947년 11월 유엔총회는 유엔 감시하에 남북한 총선거를 실시하여 정부수립과 미소양군의 철수를 위한 감시 및 협의기구로 몇 개 국가로 구성된 유엔한국임시위원단(UNTCOK)을 구성, 파견한다는 내용의 미국 제안을 가결시켰다.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은 1948년 1월 8일 서울에 도착하여 남북한 양지역의 미소 양군과 접촉하였으나 위원단의 38도선 이북에서의 활동은 소련군의 거부 때문에 불가능하게 되었다. 따라서 위원단의 활동이 가능한 지역 내에서의 총선거가 1948년 5월 10일 실시되었다. 총선거를 통하여 국회가 구성되고, 이 국회는 7월 17일 헌법을 공포하였다. 이어 대통령으로 이승만을, 부통령으로 이시영(李始榮)을 선출하였다. 그리하여 마침내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의 탄생을 내외에 선포하고 미군정으로부터 정권을 이양받게 되었다.
1948년 8월 15일 제1공화국이 성립된 그 다음날부터 미군정으로부터 대한민국정부로 정권 이양업무가 진행된다. 8월 24일에는 「대한민국 대통령과 주한미군사령관 사이에 체결된 과도기에 시행될 잠정적 군사안전에 관한 협정」이 성립되어 주한미군의 계속 주둔이 결정되었다. 이어 「한미 재산 및 행정에 대한 최종협정」이 조인되어 미군정의 재산과 부채가 한국정부에 이양되었다.
미국은 대한민국정부의 정통성을 인정하고 이를 제일 먼저 승인한 국가가 되었다. 1949년 1월 1일은 대한민국정부를 승인하고, 4월 19일 미국의 주한 외교대표부를 대사관으로 승격시켜 무초(Muccio, J. J.)가 초대 대사로 임명되었다. 한국은 3월 25일 주미한국대사관을 개설하고 초대대사로 장면(張勉)을 임명하였다. 뒤이어 자유중국 · 영국 · 프랑스 · 필리핀 등 유럽과 아시아의 여러 나라들이 승인절차를 밟아 승인함으로써 한국은 독립국으로 국제무대에 등장하게 되었다.
한국은 건국과정에서부터 평화와 국제적 안정을 유지하기 위하여 창설된 유엔기구와 밀접한 관련을 맺어왔으므로 정부수립 후의 외교노선도 주로 유엔의 결의와 정신을 존중하는 것이었고, 미국을 위시한 서방국가와의 우호관계를 돈독히함으로써 안전보장을 확실하게 하는 것이었다. 유엔총회는 1948년 12월 12일 대한민국정부가 한반도 내 유엔한국임시위원단의 감독 하에 자유선거가 실시된 지역(남한)에서 유일한 합법정부임을 선언하고, 유엔한국임시위원단에 대신하여 유엔한국위원단(UNCOK)을 창설하였다. 이 기구는 한국에 있어서 대의정치의 발전 및 외국군철수 등을 실시하는 데 있어서 한국정부와 협의하도록 결의하였다.
외국군대의 철수, 간섭 없는 통일정부수립 등의 구호로 대한민국정부의 수립저지와 미군철수를 노리던 소련군과 북한은 북한지역에 이미 세워놓고 있던 공산주의 체제를 공식화하는 한편 정치적인 공세를 더욱 가열시켰다. 제주도반란사건과 여수 · 순천반란사건 등은 그 한 예이다.
한편, 미국은 대한민국정부가 수립되기 전해인 1947년 3월에 이미 트루먼독트린(Truman Doctrine)을 선언하여 세계적으로 반공정책을 펴는 한편 일본의 재무장을 추진하고 있었다. 소련은 일본의 재무장을 극동지역에서의 미소 간의 세력균형의 파괴라고 보았다. 이 파괴된 세력균형을 복원시키려면 남한까지 차지하여야 한다고 생각하였으며, 바로 그때 김일성은 남조선해방이라는 편리한 구실을 만들었다.
미국은 한국의 안보는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과 미국의 경제 · 기술 원조로 충분히 유지될 수 있다고 생각하였다. 따라서 1949년 6월 8일 주한미군을 철수할 것을 발표하였다. 미군의 철수가 한국에 대한 관심의 감소를 의미하지 않으며, 한미관계의 정상화를 위한 일보 전진이라 하고, 미국은 유엔위원단을 통하여 자유스럽고 통일된 한국을 이룩하는 데 계속 협력할 것과 한국 민주정치의 발전을 강조하였다. 이 성명에 뒤이어 6월 29일 주한미군은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모두 철수하였다. 이에 대하여 한국정부는 미군의 계속 주둔을 요청하였으나 유엔총회 결의를 구실삼아 철수를 단행하였다.
미국은 또 중국대륙이 공산화됨에 따라 아시아 지역에서의 개입선을 후퇴시키고 중국의 티토(Tito)화를 기대하면서, 1949년 말과 1950년 초에 걸쳐 중공이 대만을 점령하더라도 이는 중국의 국내문제로 본다는 태도를 표명하였다. 이어 1950년 1월 12일 미국의 국무장관 애치슨(Acheson, D.)은 미국의 극동정책연설에서 한국이 미국의 방위선 밖에 있음을 시사하였다. 또, 이 무렵 미국은 중국의 모택동(毛澤東)이 스탈린과 만주반환문제를 둘러싸고 협상하고 있었기 때문에 미국이 대만을 내놓음으로써 영토문제를 둘러싸고 중소가 대립하게 될 것으로 기대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기대와는 달리 1950년 2월 14일 중국과 소련은 동맹을 체결하고 만주는 소련이 1952년까지 반환하기로 합의하였다.
미국의 이러한 정책표명을 소련은 한반도를 다 차지하더라도 묵인할 용의가 있다는 신호로 받아들였다. 애초 소련은 한반도 전역을 소련의 영향권 내에 두고자 하였으나 대일참전의 지연 등으로 불가능하였던 것인데, 이제 기회가 왔다고 보았던 것같다. 소련의 무기공급과 군사지도를 미리 준비하고 있던 북한은 1950년 6월 25일 오전 4시 일제히 공격을 개시하여 38도선을 넘어 진격하여 왔다. 치안을 유지할 정도의 군사력밖에 없던 남한으로서는 북한의 우세한 장비와 화력을 대적할 수 없었다. 또, 5월 30일 실시된 제2차 총선거의 후유증으로 남한의 국내질서는 이미 전쟁을 치를 수 있는 형편이 아니었다. 이러한 상황하에서는 유엔과 미국의 개입으로 침략을 막을 수밖에 없었다.
1950년 6월 27일 유엔안전보장이사회는 북한의 침공을 평화의 파괴로 규정하고, 한국에 대한 지원과 아울러 유엔군사령부를 설치할 것을 결의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한국정부는 유엔군사령관에게 한국군에 대한 작전지휘권을 이양하였으며, 따라서 미국 대통령이 임명하는 유엔군사령관의 지휘하에 모든 참전국의 군대가 통합, 운영되었다. 유엔군이 38도선 이북으로 진격하여 감에 따라 유엔총회는 유엔한국통일부흥위원단(UNCURK)을 창설하여 “유엔총회의 제결의의 기본목적이 한국에 통일된 독립 민주국가를 창설하는 데 있음”을 밝히고, 유엔과 유엔군에 의한 한국의 통일달성을 결의하였다. 이어 이 결의안은 유엔 감시하에 선거실시를 포함한 통일독립정부를 세우기 위한 모든 조처를 취하며 평화회복과 경제부흥을 위한 모든 필요한 활동을 하고, 그 활동상황을 매년 유엔총회에 보고하도록 하였다.
그러나 이 유엔한국위원단의 활동은 중공군의 개입으로 전선이 다시 38도선에서 고정됨으로써 여의치 못하였다. 유엔군의 전면적인 개입은 북한이나 소련으로서는 정말 예상 밖의 일이었다. 10월 초 유엔군이 38도선을 넘어 북한으로 진격하게 되자, 중공군이 10월 24일 한국전쟁에 개입하게 되었다. 이로써 전쟁의 양상은 전혀 다른 국면으로 전개되었다. 서울은 다시 공산치하에 놓였다가 1951년 3월 14일 유엔군은 다시 서울을 탈환하였고, 그리고 4월부터 전선은 38도선 부근에서 교착상태에 빠지게 되었다. 그러는 상황 속에서 전쟁확대를 주장하던 맥아더(MacArthur, D.) 유엔군사령관이 해임됨과 동시에 남침으로 38도선은 이미 없어졌다며 북진통일을 주장하여 온 당시 이승만 대통령의 입장은 미국에 의하여 거부되었다.
1951년 6월 23일 소련의 유엔대표 말리크(Malik, J.)의 휴전제안을 계기로 1953년 7월 27일 휴전협정이 체결되었다. 말리크의 제안은 한반도에 대한 전쟁과정에서 소련의 야심이 일단은 정지된 것으로 볼 수 있다. 그러나 38도선에의 복귀를 내용으로 하는 휴전협정에 한국정부는 반대하였다. 이는 1951년 5월 이승만 대통령의 성명으로 시작되어 1953년 6월 전국포로수용소에서 2만 7366명의 반공포로를 일방적으로 석방할 때까지 계속되었으며, 한미관계는 크게 긴장되어 있었다.
결국, 미국이 휴전성립 90일 이내에 한국문제 해결을 위한 정치회담을 개최할 것과 한미방위조약을 체결하여 한국의 안전보장을 확보할 것을 약속함으로써 한국은 휴전을 묵인하였다. 그러나 한국측은 휴전협정 교섭과정에 참여하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휴정협정을 인정하지 않는다는 입장이었으므로 휴전협정에 서명하지 않았다.
제4조 60항에서는 3개월 이내 쌍방 고위대표의 정치회담을 열어 외군철수문제를 포함한 한국문제의 평화적 해결을 논의하기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규정대로 정치회담이 열리지는 않았다. 그러나 월남문제와 관련하여 1954년 4월 제네바에서 한국문제를 다루는 정치회담이 열리게 되어 한국과 참전 16개국 대표를 일방으로 하고 북한 · 중국 및 소련을 타방으로 하는 회의가 개최되었다. 이 회의에서 한국은 유엔의 권능을 확인하고 남북한 인구비례에 따른 자유총선거를 실시할 것을 제의하였다. 북한측에서는 주로 외국군대 철수와 전한위원회(全韓委員會) 등 연합전선전략을 추구하였다. 결국 처음 예상대로 아무런 합의도 보지 못하고 연합국측은 ‘참전16개국 공동선언’을 채택하고 회의를 종결하고 말았다.
한편, 한국정부는 휴전협정이 체결된 그 해 10월 미국과 상호방위조약을 서명하였으며, 「경제원조에 관한 협정」도 체결하였다. 1954년에는 「한국에 대한 군사 및 경제협력의 계속에 관한 합의의사록」에 서명하여 한국군의 작전지휘권이 계속 유엔군사령관에 남아 있도록 하는 데 합의하였다. 이렇게 하여 한국의 외교는 유엔과 미국과의 정상적인 관계유지 방향으로 전개되기는 하였지만, 이승만 대통령의 반일정책(反日政策)은 미국과 마찰을 빚기도 하였다. 미국으로서는 하와이-일본-한국을 잇는 지역은 하나의 군사전략지역이기 때문에 한일 간의 관계 정상화는 대단히 중요한 문제였다. 그리고 한국전쟁을 치러 본 미국으로서는 한국에서의 효율적인 작전수행을 위하여서는 한일 간의 원만한 관계가 필요함을 확신하고 있었다. 한미방위조약을 협의하는 과정에서 아이젠하워(Eisenhower, D.) 대통령은 한일관계의 정상화를 요구하였으나 이승만 대통령은 이를 거절하였다.
한국의 6 · 25전쟁 이후의 외교는 안보와 경제재건을 위한 협력을 우방국으로부터 받는 방향으로 전개되었다. 한일국교정상화를 거부한 제1공화국의 자유당정권이 4 · 19혁명으로 인하여 붕괴되자 한국은 급격한 변동을 맞이하게 되었다. 허정(許政) 과도정부는 효과적인 실리외교의 추진, 자유우방과의 유대강화, 중립국가와의 관계개선 등을 주요 외교정책으로 제시하였다. 1960년 6월 19일에는 아이젠하워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에 따라 한국을 계속 지원할 것을 다짐하였다.
이어 1960년 8월 하순에 설립된 장면(張勉) 내각은 유엔 감시하의 남북한 자유선거에 의한 통일, 유엔가입, 미국과의 유대강화, 중립국과의 외교활동강화 등을 외교정책으로 제시하였다. 그리고 미국의 강력한 지지하에 무엇보다 긴급한 외교문제로서 일본과의 국교정상화를 거론하고 있었다. 한편, 4 · 19혁명 이후 계속되는 사회적 혼란 속에서 군소정당들과 각종 사회단체가 속출하면서 남북협상과 중립화통일론 등 다양한 주장들이 제기되었다. 여기에 편승하여 북한은 남북교류, 남북대표자 연석회의, 미군철수, 외세 간섭 없는 자유선거를 통한 평화통일, 연방제 통일방안 등의 공세를 폈다. 결국 제2공화국은 통일문제를 둘러싼 사회적 혼란 속에서 단명으로 끝나고 말았다.
5 · 16군사정변으로 새로운 정치체제가 등장하게 되는데, 이 체제는 무엇보다 먼저 통일문제에 대한 입장을 명백히 하였다. 혁명공약에서 미국을 위시한 자유우방과의 유대를 강화할 것을 천명하고, “조국통일을 위하여 공산주의와 대결할 수 있는 실력배양에 집중한다.”라고 하여 ‘선건설 후통일’을 밝힘으로써 통일문제를 둘러싼 국민여론의 혼란에 종지부를 찍었다. 1961년 당시 국가재건최고회의 박정희(朴正熙) 의장은 케네디(Kennedy, J. F.) 대통령의 초청으로 미국을 방문, 한미정상회담을 가졌다. 공동성명에서는 유엔에 대한 신뢰와 유엔총회에서 천명되고 재확인된 원칙에 따라 평화적 수단으로 한국의 자유통일을 추구할 것을 밝혔다. 이로써 한국이 유엔을 통한 외교와 미국과의 유대를 통한 안보유지라는 종래의 외교노선이 계승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그러나 미국이 지지한 민주당 정권을 무너뜨리고 등장한 제3공화국 정부와 미국이 우호적인 관계에 이르기까지는 상당한 시간이 필요하였다. 한 · 미간에 상호신뢰의 기반이 된 것은 한국군의 월남파병과 한일국교정상화 실현이었다. 1964년 7월 월남정부는 군사지원을 요청하였고, 미국은 우방국의 협력을 필요로 하였고, 한국정부는 이를 수락하고 1965년 1월 국회에서 한국군의 월남파병에 대한 동의결의를 하였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박정희 대통령은 1965년 5월 존슨 (Johnson, L. B.) 대통령의 초청을 받아 미국을 방문함으로써 한미관계의 새로운 장을 열었다. 또, 월남전쟁과 관련하여 만들어진 아스팍(ASPAC)의 활동에서 한국이 주도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는데, 이를 통하여 한국의 외교는 더욱 활발하여지게 되었다.
일본의 36년간의 한국지배에 대한 기억과 이승만의 반일정책 등으로 지연되었던 한일국교정상화는 일부의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제3공화국 시절에 이루어졌다. 한일회담은 오래 전부터 지지부진한 상태로 이어져 오다가 1959년 11월 재일교포들의 북송문제로 중단된 바 있었다. 1964년 12월부터 한일회담이 재개되어 1965년 6월 22일 조약과 여러 협정이 서명되고, 12월에 비준서가 교환됨으로써 주권의 상호존중과 호혜평등의 원칙에 입각한 한일국교정상화가 실현되었다. 모든 구조약의 폐기와 더불어 대한민국이 한반도에서 유일합법정부임을 확인하였다. 한일국교정상화는 6 · 25전쟁 이후 미국이 계속 원하던 바였고, 또 1962년 이래 추진되고 있던 제1차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추진을 위하여서도 필요한 것이었다.
이제, 한국의 외교는 그 이전과 양상을 조금 달리하게 되었다. 단순히 미국의 원조에만 의존하던 데에서 벗어나 자립경제건설을 지향하게 되었다. 아울러 미국의 공산국가들에 대한 유화정책은 자주안보노력에도 힘쓰게 하였다. 1968년 1월 푸에블로(Pueblo)호 사건에 대한 미국 여론의 미온적인 대응과 북한의 비정규군에 의한 청와대 기습기도 등은 이러한 경향을 더욱 강화시켰다. 1968년 4월 호놀룰루에서 열린 박정희 대통령과 존슨 대통령의 정상회담에서도 미국은 한국군의 현대화 필요성을 인정하고, 거기에 대한 지원과 향토예비군에 대한 지원을 약속하게 되었다.
한편, 미국은 1969년 7월 닉슨(Nixon, R. M.) 대통령이 괌(Guam)도선언, 즉 닉슨독트린(Nixon Doctrine)을 발표하였다. “아시아의 방위는 일차적으로 아시아 국가 자신의 책임하에 이루어져야 한다.”라고 함으로써 아시아대륙으로부터 군사적으로 후퇴할 것임을 시사하였다. 그리고 첫 단계로서 1969년 11월 닉슨 · 사토[佐藤榮作] 공동성명에서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하기로 하였다. 이어 1970년 7월에는 미국정부는 주한미군 중 1개 사단을 철수할 계획임을 통고하였으며, 1971년 제7사단을 철수시켰다. 아울러 미국국방백서는 1973년에 제2사단도 철수한다고 발표하였다.
1971년 2월 8일 박정희 대통령은 자립경제와 자주국방의 결의와 민족적 주체의식을 강조하는 특별담화를 발표하기도 하였다. 1972년 2월에는 이러한 미국정책변화에 대처하여 한미간에 한국군 현대화 계획을 위하여 15억 달러를 지원하기로 합의하였으며, 한국은 무기 · 탄약의 국내생산을 위시한 방위산업을 발전시키게 되었다. 그 뒤 거센 반발을 무릅쓰고 삼선개헌을 거쳐 1971년 대통령선거에서 근소한 차이로 성공한 공화당정권은 1972년 10월 17일 비상계엄을 선포하고, 국회해산과 정치활동의 중지를 내용으로 하는 비상조치를 단행하였다. 그리고 비상국무회의에서 의결 · 공고한 유신헌법안을 국민투표에 붙여서 90% 이상의 지지를 얻어 확정함으로써 제4공화국시대가 열리게 되었다.
이 시기에 가장 문제가 되었던 것은 카터(Carter, J.) 대통령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이었다. 이른바 박동선사건(朴東宣事件)과 청와대도청사건으로 한미관계가 크게 악화된 사태와 관련, 주한미군의 단계적 철수를 발표하였다. 이에 대한 대책은 1977년 7월 서울에서 열린 제10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합의되었는데, 여기서 철군과 병행 또는 선행하여 11억 달러의 군사판매차관 제공, 8억 달러 규모의 군장비 무상이양, 한미연합사령부의 창설, 주한미공군의 증강, 한국방위산업의 지원, 한미합동군사훈련의 확대실시 등에 합의를 보았다.
그러나 1978년 아프가니스탄 등에서 공산정부가 들어서고 세계 각지에서 미국의 후퇴를 틈타 공산세력의 팽창이 두드러지게 되자, 미국은 북한의 전력확대에 대하여서도 관심을 가지게 되어 제1단계 철군계획을 다소 수정하게 되었다. 이어 북한의 예상 외의 전력을 확인하고, 또 이란에 위기가 닥치게 되자 미국은 철군정책을 포기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다. 결국, 1979년 6월 카터 대통령은 한국을 방문하여 공동성명을 발표하였는데, 여기에서 철군계획이 사실상 포기되었음을 밝히고 북한에 대하여 남북한 및 미국과의 3자회담을 제의하기에 이르렀다.
1970년대를 통하여 한국은 미국에의 완전 의존체제에서 벗어나 비숫하게나마 대등한 관계에서 협력하는 자세를 취할 수 있었다. 한국의 교역에서 미국이 차지하는 비중이 낮아진 반면, 한국은 미국의 열세 번째 가는 교역상대국으로 등장하였다. 사실, 한국은 경제적으로 몇 차례에 걸친 경제개발5개년계획의 결과 괄목할 만한 성장을 이루었다. 특히, 1970년대에는 종전의 경공업제품이나 섬유제품 등의 수출에서 벗어나 중화학공업제품의 수출이 늘어났다. 또, 수출상대국도 미국 · 일본 이외의 많은 지역으로까지 확대되었다. 정부주도형 성장정책으로 전개되었을 뿐만 아니라 무역의존도의 증대 등은 도시인구의 집중화현상이라는 부작용을 낳기도 하였다. 이를 배경으로 근면 · 자조 · 협동을 내세운 새마을운동이 전개되었다.
이와 함께 한국은 적극적인 외교의 일환으로 주도적인 통일정책을 펴게 된다. 이미 1970년 8월 15일 북한에 대하여 통일기반의 조성을 위하여 남북 간의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할 것을 제의하는 8 · 15선언을 한 바 있다. 이는 종전과는 달리 북한을 정권의 존재와 협상대상으로 인정하고, 통일문제도 유엔에만 의존하던 데서 벗어나 당사자들 사이의 자주적인 해결을 모색하려고 하였다. 또, 대한적십자사는 북한에 대하여 남북이산가족찾기회담을 제의, 남북적십자회담이 열리게 되었다.
이러한 노력을 바탕으로 1972년 7월 4일 서울과 평양에서 동시에 7 · 4남북공동성명이 발표되었다. 여기에서 평화통일의 3대 원칙으로 외세의 간섭 없는 자주통일, 무력사용을 배제한 평화통일, 사상 · 이념 · 제도의 차이를 초월한 민족적 대단결이 내세워졌으며, 남북조절위원회의 설치가 합의되었다. 1973년 6월 23일에는 남북대화가 진행되는 가운데 남북한 동시 유엔가입과 호혜평등의 원칙하에 모든 국가에 대한 문호개방을 내용으로 하는 6 · 23선언을 발표하였고, 이어 1974년 1월에는 북한에 대하여 남북한 상호불가침협정을 제안하고, 8월에는 불가침협정의 체결, 남북대화의 추진, 토착인구비례에 의한 남북한 자유총선거실시 등의 평화통일 3대 원칙을 발표하였다.
제5공화국에서는 1970년대의 고도성장의 기세를 몰아 괄목할만한 경제성장으로 세계 10대 교역국으로 발돋움하는 경제적 기반을 마련하였다. 이와 아울러 적극적인 외교정책을 추진하여 한국의 국제적인 지위가 상승하였다. 당시 전두환(全斗煥) 대통령은 1981년과 1985년 두 차례에 걸쳐 미국을 방문하는 등 활발한 정상외교를 통하여 구축된 우방과의 유대를 굳히는 한편, 중남미 · 중동 · 아프리카 등 비동맹, 제3세계 주요 국가들에게까지 적극적인 외교를 펼쳤다. 1982년에는 아프리카 여러 나라를 순방하였다. 이러한 성과에 힘입어 1986년에는 아시안게임을 유치하여 성공리에 치렀고, 1988년 올림픽을 서울에 유치하는 데 성공하였다. 중국 · 소련을 비롯하여 동독 · 헝가리 · 불가리아 · 루마니아 등 알바니아를 제외한 동구권의 미수교공산국가들이 서울올림픽참가를 공식적으로 발표함으로써 대한민국외교의 새로운 지평을 열고, 자주외교를 펼쳐나갈 수 있는 터전을 마련하였다.
한편, 통일에 대한 논의도 계속 진행되었다. 정부는 평화통일의 기본방향을 유지하면서 남북대화를 위한 노력을 그치지 않았다. 1981년 1월 남북한당국 최고책임자의 상호방문을 제의한 대통령은 6월 5일 남북한 정상회담의 조속한 개최와 더불어 남북한 사회를 완전히 개방할 것을 제의하였다. 1982년 1월에는 민족화합 · 민족통일방안으로 민족통일협의회를 구성하여 통일헌법을 제정하자는 제의를 하였다. 이러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북한은 여전히 고려연방제의 구성을 고집하고 미국과의 직접교섭을 주장하면서 대화에 응하지 않았다.
그러다 1984년 여름 일부 지역의 수해에 대하여 구호품을 보내겠다는 북한의 제의를 수락하고, 쌀과 옷감을 적십자사를 통하여 인수함으로써 남북대화의 길이 트이게 되었다. 남북적십자회담이 12년 만인 1985년 5월부터 서울과 평양에서 세 차례나 개최되었고, 9월에는 이산가족고향방문단과 예술공연단이 상호방문함으로써 처음으로 민간인교류가 이루어졌다. 이어 1985년에는 다섯 차례의 남북경제회담이 있었고, 남북국회회담의 예비접촉과 남북체육회담 등 남북대화가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제5공화국에 이어 1988년 2월 25일 출범한 제6공화국은 민족자존의 자주외교, 국민적 이해와 지지를 바탕으로 한 국민외교추진을 내세워 우방들과의 협력관계를 공고히 하면서 활발한 북방외교를 전개하고 있다. 제6공화국의 통일 · 외교정책의 지표라 할 수 있는 7 · 7선언이 발표됨으로써 북방정책은 더욱 활기를 띠게 되었다. 정부는 7 · 7선언에 대한 후속조처와 노태우(盧泰愚) 대통령의 유엔연설을 통하여 북한과의 소모적 대결외교를 지양하고, 한반도 평화정착과 통일을 앞당기기 위한 여건조성에 힘썼다.
노태우 대통령은 서울에서 일본과 두 차례 정상회담을 가졌으며, 미국과 워싱턴에서 정상회담을 가졌다. 1989년 2월에는 부시(Bush,G.H.W.) 대통령이 한국을 방문, 정상회담을 가지고 두 나라간의 안보협력체계를 강화하고 북방정책추진을 위하여 긴밀히 협력하여 나가기로 하였다. 노태우 대통령은 또 1988년 11월에는 말레이시아 · 오스트레일리아 · 인도네시아 등 아시아 · 태평양지역 4개국을 순방하였고, 1989년에는 서독 · 헝가리 · 영국 · 프랑스를 방문하여 정상회담을 가졌다. 이와 함께 소련 및 동구권의 사회주의국가들과의 관계개선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여 헝가리와는 상주대표부를 교환, 설치한 데 이어 1989년 2월 1일에는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하였다. 소련과도 영사업무를 수행하기 위한 영사처를 개설하기로 하였다.
정부는 1993년 문민정부 출범으로 냉전종식 이후의 국제정세와 외교환경 변화에 보다 능동적으로 대을하기 위하여 신외교정책을 수립하고, 그 기본방향으로 세계화 · 다변화 · 다원화, 지역협력 및 미래지향의 통일외교 등 5대기조를 설정하였다. 또한 이러한 신외교의 5대기조를 구현하기 위하여 정부는 1996년도 주요 외교시책으로 세계화외교, 안보 · 통일외교, 경제 · 통상외교, 재외동포정책 등을 설정하고 이를 적극 추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