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64년의 제18회 동경올림픽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문제를 놓고 1963년 1월과 5월에 로잔 및 홍콩에서 열렸던 남북체육회담, 1979년 평양의 제35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를 앞두고 같은 해 2월과 3월 판문점에서 네 차례 개최되었던 남북한탁구협회회담, 1984년의 제23회 로스앤젤레스올림픽대회에 단일팀으로 출전하는 문제를 논의하기 위하여 1984년 4월과 5월 판문점에서 세 차례 열린 남북체육회담, 1988년의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 ‘공동개최’ 문제를 놓고 국제올림픽위원회(IOC) 중재하에 1985년 10월부터 1987년 7월까지 스위스 로잔에서 개최된 다섯 차례의 남북체육회담, 1989년 3월부터 1990년 2월까지 판문점에서 열린 북경아시안게임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 그리고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 단일팀 구성을 위한 남북체육회담 등 남북한간의 체육회담은 다른 어느 분야의 회담보다도 먼저 시작되었고 더 자주 개최되었다.
그러나 스포츠와 올림픽에 대한 남북한의 기본적인 입장의 차이로 말미암아 다른 회담과 같은 정치적 선전장으로 이용되기도 하였다. 스포츠는 다른 부문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정치이념적 색채가 약하고 쌍방의 정치제도와 관계없이 교류, 협력을 실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남북간의 체육회담에서는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모든 남북체육회담은 올림픽대회와 주요 국제경기대회를 불과 몇 달 앞둔 시점에서 시작되었고, 또 남북한 사이에 체육교류가 전혀 불가능한 상황에 있었기 때문에 원만한 진행이 어려웠다. 따라서 남북체육회담은 대부분 국제경기대회의 개막과 동시에 결렬되는 시한성을 면하지 못하였다.
1985년 10월 8일부터 스위스 로잔에서 시작된 남북한올림픽위원회와 국제올림픽위원회의 대표들이 참가하는 회담은 보다 진지한 분위기 속에서 진행되어 국내외의 주목을 받았다. 그 원인은 물론 정치선전을 용납하지 않는 국제올림픽위원회측의 성의 있는 중재 노력과 「국제올림픽위원회헌장」에 올림픽대회의 공동주최를 허용하는 구절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를 통해 남북한의 관계개선과 나아가서 평화통일의 여건조성에 기여하게 하자는 대한올림픽위원회측의 성실한 대화 자세에 있었다.
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장인 사마란치(Juan Antonio Samaranch)의 주재하에 대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인 김종하(金宗河)와 북한올림픽위원회위원장인 김유순(金裕順) 등이 참석한 로잔체육회담은 제24회 서울올림픽대회에 북한체육인들이 보다 뜻있게 참가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데 그 목적이 있었다.
하지만 북한측은 제24회 올림픽대회의 서울개최를 결의한 1981년 서독 바덴바덴에서의 국제올림픽위원회의 결정을 반대하고, 개최지 변경을 위한 선전을 전개하다가 소련과 중공, 동구공산권 국가들이 참가의사를 시사하자 태도를 바꾸어 이른바 올림픽의 ‘공동주최’를 주장하였다.
국제올림픽위원회위원장 사마란치는 1986년 6월 11일 제3차 로잔체육회담에서 제24회 올림픽대회 23개 경기종목 중에서 탁구와 양궁을 평양에서 진행하도록 북한올림픽위원회측에 위임하는 문제와 남자단체 도로사이클경기를 남북한지역을 연결해서 실시하는 문제 등을 내용으로 한 타협안을 제시함으로써 남북한의 동의를 얻는 데 성공하였다.
그러나 북한측이 원칙적인 동의를 하였음에도 불구하고 그 뒤 5, 6개 종목을 추가한 8개 종목의 북한개최를 요구함으로써, 이 회담은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고, 북한측 선수들은 결국 서울올림픽대회에 불참하였다. 그 뒤 남북한체육인들은 1990년 북경아시안게임 기간중에 현지에서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 등 주요 국제경기대회에 공동으로 참가하는 문제를 협의하는 과정에서 한 가지 중요한 성과를 거두었다.
즉, 같은 해 10월중에 평양과 서울에서 ‘남북통일축구대회’를 개최함으로써 분단 후 처음으로 남북체육교류를 실현하게 된 것이다. 또한 동축구대회 기간 중에 우리측 정동성 체육청소년부장관과 북측의 김유순 체육위원장은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일본지바현), 제25회 바르셀로나올림픽대회 그리고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포르투갈) 등에 단일팀으로 참가하기 위한 회담을 갖기로 합의하였다.
그 결과 1990년 11월 29일부터 1991년 2월 12일까지 4차에 걸친 남북체육회담(판문점)을 통해 제41회 세계탁구선수권대회 및 제6회 세계청소년축구대회에 남북한 단일팀을 구성·참가한다는 합의서를 채택하는데 성공하였다. 1991년 4월 24일∼5월 6일 일본 지바에서 열린 세계탁구선수권대회에서는 여자 단체전 우승을 했고, 6월 5∼17일에 열린 포르투갈 세계청소년 축구선수권대회에서는 8강에 진출하는 전적을 올렸다.
2000년대 이후 남북 간 교류협력이 활성화됨으로써 체육분야에서도 활기를 띠기 시작했다. 국제경기대회에 단일팀 참가와 공동 입장 및 응원이 이루어지고 남북 간에도 축구, 농구, 태권도, 프로권투, 아이스하키 등 다양한 종목에서 교류가 빈번해졌다. 특히 2002년 부산 아시안게임이나 2003년 대구유니버시아드 대회, 2005년 인천 동아시아 육상선수권대회, 2008년 아시아 레슬링대회 등 남측 지역에서 열린 국제경기대회에 북한 측이 선수단과 응원단을 참가시켰다.
2000년 이후 이루어진 체육회담은 2002년 8월 북한 측의 부산 아시아경기대회 참가를 위한 실무접촉, 2003년 7월 대구 유니버시아드 대회 참가를 위한 실무접촉, 2004년 6월 아테네 올림픽 남북 공동입장을 위한 실무접촉, 2005년 7월 8·15 통일축구경기를 위한 실무접촉, 2005년 12월부터 2007년 2월까지 4차례 개최된 2008 베이징 올림픽 경기대회 남북 단일팀 구성을 위한 체육회담 등이 남북한 간에 이루어진 체육회담 등이 있다. 2008년 베이징 올림픽경기대회 단일팀 참가는 북한 측이 무조건 동수 구성 원칙을 고집하여 무산되었다. 2018년 7월 5일 평양 고려호텔에서 체육실무회담을 갖고, 회담 결과 동년 8월 18일 자카르타.팔렘방 아시안게임 개막식에서 공동입장을 하고 여자농구, 카누 드래곤보트, 조정 3개 종목에서 ‘코리아(COR)’라는 이름 아래 단일팀으로 출전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