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15평화통일구상선언은 1970년 8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천명한 통일정책선언이다. 이 선언은 1969년 닉슨독트린 이후 미국의 아시아 개입전략 후퇴로 인해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가 증대된 상황에서 발표되었다. 이 선언의 핵심은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해 북한이 적화통일 및 대한민국 전복 포기를 선언하고 실증하라는 데 있다. 이 선언은 남북한이 분단 현실을 인정하고 남북 간의 문제를 민족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노력을 경주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평화공존을 전제로 제한적 경쟁을 통해 체제 선택을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의사에 맡기자는 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박정희 대통령은 1970년 8월 15일 광복절 경축사를 통해 남북한이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하는 「8·15 평화통일구상」을 선언하였다. 이 선언이 나온 배경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1969년 닉슨독트린을 계기로 세계적인 데탕트 물결이 밀려오면서 주변정세가 급격하게 변함에 따라 여기에 부응하는 새로운 대처 방안을 모색할 필요가 있었다는 점이다. 이데올로기에 의해 맹목적인 결속이 퇴색되고 한반도 문제의 자주적 해결을 요구하는 추세가 뚜렷해진데 따라 과거와 같이 냉전구조 속에 안주할 수만은 없게 된 것이다.
둘째, 북한이 1960년대 말 대남 폭력혁명 노선을 강화하는 상황에서 미국이 아시아 개입전략에서 후퇴를 선언하고 주한미군을 감축하겠다고 발표함으로써 국가안보에 대한 우려가 증대하였다는 점이다. 남한의 경제력이 북한을 따라잡는 수준에 도달했다고는 하지만 군사력은 엄청난 열세에 있었고, 미국의 안보공약에 대한 의구심까지 겹쳐 남북한의 존재양식을 새롭게 조정할 필요가 생겼다. 적어도 자주국방력을 갖출 때까지 북한의 도발을 억제하는 것이 절대적 과제가 되었다.
셋째, 그동안 이룩한 경제성장과 자유민주주의 체제의 우월성에 대한 자신감을 바탕으로 자주적인 평화공존 노력을 추진할 필요가 있다는 것을 인식한 점이다. 다시 말해 통일문제에 대한 새로운 접근 논리가 필요해진 것이다.
「8·15 평화통일구상」선언의 핵심은 세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는 평화통일 기반조성을 위한 선행조건으로, 북한이 전쟁도발 행위를 즉각 중지하고 무력에 의한 적화통일이나 폭력혁명에 의한 대한민국 전복을 포기한다는 것을 선언하고 행동으로 실증하라는 것이다. 둘째는 이것이 명백히 인정·확인될 경우 인위적 장벽을 단계적으로 제거해 나갈 수 있는 획기적이고 현실적인 방안을 제시할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셋째는 북한이 어느 체제가 국민을 더 잘 살게 할 수 있는지를 입증하는 개발과 건설과 창조의 경쟁에 나설 것을 촉구한다는 것이다.
이 선언은 그때까지 남북관계를 지배해왔던 논리에 변화를 가하고 있다. 우선, 남북한이 냉전질서를 유지하는 첨병으로서의 역할을 중단하고 분단 현실을 인정하며 남북 간의 문제를 민족 내부적으로 해결하려는 자주적 노력을 경주할 것을 제시하고 있다. 또한 상대방을 인정하지 않는 무제한의 정통성 경쟁이 아니라 평화공존을 전제로 무력이나 폭력은 체제 경쟁의 룰에서 배제하는 제한적 경쟁을 하자는 것이다. 이와 함께 종국적으로는 어느 체제를 선택할 것인지를 민족 구성원 전체의 의사에 맡기자는 민주의 원칙을 담고 있다.
이로써 1960년대까지 서로가 상대방의 실체를 불인정하고 타도의 대상으로 삼던 기존의 논리에서 벗어날 수 있는 공간이 마련되었다. 북한은 초기에는 이 선언에 냉랭한 반응을 보였으나 1971년 8월 남한측이 제의한 적십자회담에 북한이 호응해 나옴으로써 분단 25년 만에 남북대화가 시작되었고 남북한이 새로운 남북관계를 지향하는 출발점에 서게 되었다.
이 선언이 향후 한국정부 통일정책의 근저를 이루는 모태가 되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이후 한국정부는 이 선언에 내지하고 있는 자주, 평화, 민주를 통일의 대원칙으로 견지해 왔으며, ‘선 평화’를 내세워 대화와 협상, 교류와 협력을 통해 통일의 여건을 단계적이고 점진적으로 조성해 가자는 기능적 측면의 시각에서 통일문제에 접근하기 시작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