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 ( )

참의부 1중대 터
참의부 1중대 터
근대사
단체
1924년 만주 집안현(集安縣)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
이칭
이칭
참의부, 육군주만참의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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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요약

대한민국 임시정부 육군주만참의부는 1924년 만주 집안현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이다. 1923년 대한통의부가 분열되자,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부대로 편성되었다. 일본 군경 습격, 일제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항일투쟁을 전개하였다. 1925년 후반부터 세력이 위축되었는데, 1929년 국민부가 결성되자 대다수의 단원이 다른 단체로 빠져나갔다. 같은 해 참의부를 이끌던 김소하가 일본 경찰에 체포되면서 해체되고 말았다.

정의
1924년 만주 집안현(集安縣)에서 조직된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의 독립군단체.
개설

1923년 남만주 무장독립운동단체의 통합기관인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간부들 사이의 이념분쟁과 권력분배로 인해 분열되었다. 이에 독립운동단체 지도자들은 대한민국임시정부 직할 부대를 편성해 재만독립군을 재통합할 필요성을 절감하였다. 그리하여 1923년 8월 백광운(白狂雲) · 조능식(趙能植) · 박응백(朴應伯) · 김원상(金元常) · 조태빈(趙泰賓) 등을 상해에 파견해 임시정부와 교섭하게 하였다. 임시정부는 이들의 제안을 받아들여 전에 설립했던 광복군사령부의 전통을 계승한 임시정부 직속 남만군정부(南滿軍政府)를 인정하고 정식 명칭을 대한민국임시정부육군주만참의부로 하였다.

연원 및 변천

1924년 6월 26일 임시정부로부터 정식 인준을 받은 참의부는 집안(集安) · 무송(撫松) · 장백(長白) · 안도(安圖) · 통화(通化) · 유화(柳化)의 각 현에 거주하는 동포 사회를 관할하며 항일전을 전개하였다.

부대 편성은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 제2중대장 최석순(崔碩淳), 제3중대장 최지풍(崔志豊), 제4중대장 김창빈(金昌彬), 제5중대장 김창천(金蒼天), 독립소대장 허운기(許雲起), 훈련대장 박응백, 중앙의회의장 백시관(白時觀), 민사부장 김소하(金筱廈) 등이었다.

부서는 민사 조직보다 군사 조직이 중시되었으나, 민사부의 관할 구역은 13개 지방행정구로 나누어져 군자금 수합을 주요 기능으로 하였다.

1924년 참의장 백광운이 피살당하자 제2중대장 최석순이 참의장을 겸임하였다. 1925년 고마령(古馬嶺)에서 간부회의 중 일본 군경의 기습을 받아 간부 29명이 전사하였다. 이 '고마령 참변'으로 참의부 조직과 활동은 위축되었다. 특히 미쓰야협정[三矢協定]이 체결되어 일본과 중국이 독립군의 활동을 견제, 저지하자 조직을 재편성해 전력을 강화하였다.

이 개편에서 참의장은 윤세용(尹世茸)이 선임되었으며, 조직도 경무 · 교통 · 사법 · 학무 · 군법 · 재무 · 외무 · 군수로 다양화시켜 각 부에 주임을 두었다. 소속 독립군도 사령장(司令長)에 박응백을 선임해 5개 중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1927년 참의장 윤세용이 사임하자 김승학(金承學)이 선임되고 다시 조직을 개편하였다. 참의장 김승학, 군사위원장 마창덕(馬昌德, 일명 李鍾赫), 민사위원장 김소하, 재무위원장 한의제(韓義濟), 법무위원장 계담, 교육위원장 양기하(梁基瑕), 중앙의회의장 백시관, 제1행정구위원장 김영전(金永甸), 제2행정구위원장 박종수(朴宗秀), 제3행정구위원장 양기하, 제4행정구위원장 배학서(裵學瑞), 제5행정구위원장 김선풍(金旋風), 제6행정구위원장 이기술(李己述), 제7행정구위원장 최지풍, 제1중대장 김소하, 제2중대장 박희곤(朴熙坤), 제3중대장 양봉제(梁鳳濟), 제4중대장 최천주(崔天柱), 제5중대장 박대호(朴大豪), 중앙호위대장 차천리(車千里) 등이었다.

참의부 독립군의 항일전투는 다른 단체보다 활발해서 1924년 최고의 전적을 남겼다. 이 시기 국내에서 전개된 독립군의 활동은 3분의 2 이상이 참의부 독립군에 의해 전개되었다. 일본 군경 습격, 일제 통치기관 파괴, 친일파 숙청, 군자금 모금 등 각 방면에 걸쳐 눈부신 전과를 올렸다. 임시정부의 정식 인준이 있기 전인 5월 19일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국경 지방의 치안을 시찰한다는 명목으로 경비정에 승선, 압록강 하류로 내려오는 것을 기습해 혼비백산시킨 것은 참의부의 활동 중 가장 특기할 사실이었다.

1925년 3월 전부대가 3대로 나누어져 평안북도 초산 방면으로 출동, 추동 경찰관주재소, 하단동 경찰관주재소, 벽동군(碧潼郡) 여해 경찰관주재소를 습격, 파괴하고 퇴각하면서 국경수비대와 교전해 용맹을 떨쳤다.

그러나 참의부는 1925년 후반부터 세력이 위축되었다. 1928년 3부통합운동을 낳은 혁신의회가 구성되자 참의장 김승학이 여기에 참여하면서 해체를 선언하였다. 1929년 국민부(國民府)가 결성되자 참의부의 심용준(沈龍俊) 계열이 참여함으로써 대다수의 단원이 다른 단체로 빠져나갔다. 이후 김소하가 참의부를 이끌다가 10월 19일 일본 경찰에 붙잡히자 참의부는 해체되고 말았다.

한편, 참의장 대리 이영희(李永熙)는 부하 15명과 함께 집안현 일대에서 활동하며 참의부의 부활을 추진했지만 실현되지 못하였다.

의의와 평가

남만주의 압록강변을 중심근거지로 하여 1920년대 중후반 활동했던 참의부는 1927년부터 독립운동계 전반에 불기 시작한 민족유일당운동에 의거, 정의부 · 신민부 및 그 밖의 재만독립운동단체와의 통합운동에 적극 가담하였다.

참고문헌

『독립신문』(1924.5.31)
『독립군사』(윤병석, 지식산업사, 1991)
『독립운동사』 5(독립운동사편찬위원회, 1973)
『한국독립운동사』4(국사편찬위원회, 1968)
『한국독립사』(김승학, 독립문화사, 1965)
『무장독립운동비사』(채근식, 대한민국공보처, 1949)
「참의부의 ‘법명’ 개정과 상해 임시정부」(윤대원, 『한국독립운동사연구』제44집, 2013)
「1920년대 중반 남만지역 독립군단의 정비와 활동」(채영국, 『한국독립운동사연구』8, 1994)
집필자
신재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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