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삭주 출신. 3·1운동 직후 최시흥(崔時興)·최천주(崔天柱)·최지풍(崔志豐)·김세진(金世鎭)·심용준(沈龍俊)·양봉제(梁鳳濟) 등과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하여 참모에 취임, 평안북도 의주·구성·삭주 일대에서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 소각하였고, 일본경찰과 그 주구들을 토벌하였다.
1921년 만주로 건너가 광복군총영(光復軍總營)의 소대장으로 활약하면서 함경북도 장진군 상남면 일대 친일파들의 준동을 저지하였다.
1922년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가 조직되자 제3중대 간부로 활약하였다. 대한통의부에서 의군부(義軍府)가 분립되어 나가자 이들과 결별하고 대한통의부 소속이던 4개 중대를 상하이 대한민국임시정부의 직할군단으로 재조직하는 활동에 참여하였다.
김원상(金元常)·오두영(吳斗泳)·조능도(趙能道) 등과 함께 1923년 8월 대한민국임시정부를 찾아가 교섭 끝에 대한민국임시정부 산하 주만참의부(駐滿參議府)에 소속되어 훈련대장과 3중대장을 역임하였다.
이어 1925년 8월에는 참의부에서 훈련위원 겸 사령장(司令長)이 되어 전군을 지휘 통솔하였다. 1927년 동지 2명과 함께 국내에 출동하였다가 삭주군 경계에서 일본경찰에 포위되어 교전하던 중 전사하였다.
1963년 건국훈장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