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0년 일제에 의해 국권이 침탈되자 만주로 건너가 신흥무관학교(新興武官學校)를 졸업하고, 백서농장(白西農場)에서 백광운(白狂雲) 등과 함께 군인 양성에 진력하였다.
3·1운동 후 중국 봉천성(奉天省) 집안현(輯安縣)에서 중흥단(中興團) 및 한족회의 검무관(檢務官)으로 활동하면서 1919년 음력 11월 경 비밀리에 신광재(辛光在) 등 동교 출신들을 중심으로 한 지사들과 함께 암살대(暗殺隊)를 조직하고, 만주와 국내에서 군자금을 모집해 신흥무관학교를 지원하는 등의 활동을 하였다.
그 지역에서 무장투쟁단체인 서로군정서(西路軍政署)가 조직되자 이에 가입했고, 1921년에는 서로군정서 의용대 소대장으로 부하를 거느리고 통화현(通化縣) 칠도구(七道溝)의 친일단체인 보민회(保民會)의 사무소를 습격하고, 국내진입작전을 위해 부하를 평안북도 등지에 파견 정보를 수집하게 하였다.
1922년 말에 수립된 통의부(統義府)에 가담했다. 1923년 6월 통의부 임강주둔대장(臨江駐屯隊長)으로 대원들과 함께 평안북도 후창(厚昌)에서 적의 우편물을 탈취하고 칠평(七坪)에서 일본경찰주재소를 습격하였다.
1924년 6월 정치이념 등의 차이로 김승학(金承學)·이유필(李裕弼) 등과 남만에 참의부(參議府)를 조직하였다. 동년 11월에는 참의부의 의용군 대장으로 평안북도 강계군 어뢰면(漁雷面)에서 평안북도 경찰부 및 강계 경찰서의 일본경찰에 포위되었으나 맹렬히 교전해 위기를 모면하였다. 또한, 1927년 3월에는 참의부 중앙호위대장에 선임되기도 하였다.
한편 1926년부터 만주 지역 독립운동단체인 참의부·정의부·신민부의 통합을 위해 활동하였다. 그런데 1928년 여름 3부통합에 주력하던 중 1928년 9월 통합 방식에 불만을 품은 참의부 3중대 간부인 심용준(沈龍俊)·임병무(林炳武) 등에게 살해되었다.
199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