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안북도 희천 출신. 3·1운동 후인 1920년 평안북도 천마산(天摩山)에서 최시흥(崔時興) · 최지풍(崔志豊) 등 수십 인과 무장항일결사인 천마산대(天摩山隊)를 조직해 일제의 행정기관을 파괴하고, 일경과 밀정 다수를 처단하였다.
1920년대 초 독립운동의 방편으로 압록강 대안 서간도에 건너간 심용준은 천마산대의 대원으로 평안북도에 파견되어 독립군 · 군자금 모집 등의 활동을 전개하였다.
한편, 대한민국임시정부의 개혁을 논의하기 위한 국민대표회의가 1923년 1월 상해에서 열리자, 천마산대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리고, 1923년 6월 임시정부를 노령 등지에 새롭게 수립하자고 주장하는 창조파를 비난하는 성명을 발표하였다.
1924년 6월 통의부에서 참의부가 분리될 때 참의부에 참여해 제3중대장에 선임되었다. 1925년 3월 고마령(古馬嶺)에서 참의부 간부 몇 사람이 일본의 초산경찰서원과 전투하다 희생을 당하자, 진동도독부(鎭東都督府)를 설립 참의부의 수습을 모색하였다.
그러나 여의치 않자 1925년 5월 통의부의 문학빈(文學彬) · 오동진(吳東振) 등과 회담해 참의부와 통의부의 재통합을 시도하였다.
그리고, 1926년부터 참의부 · 정의부(正義府) · 신민부(新民府)의 3부통합을 주도해, 정의부 주력과 신민부 민정파와 힘을 합쳐 단체본위통합론을 주장하는 전민족유일당조직협의회를 구성하고 1929년 4월 국민부(國民府)의 설립에 기여하였다.
이 후 국민부의 중앙집행위원, 국민부를 이끌었던 조선혁명당(朝鮮革命黨) 집행위원회 위원 및 군사위원회 위원, 그리고 조선혁명당의 당군인 조선혁명군의 제3중대장으로 활동하였다.
또한 그는 서간도의 관전(寬甸) · 집안(輯安) · 환인(桓因) · 통화(通化) · 무송(撫松)현 등지에서 조선혁명군 부하 30여 명을 이끌고 군자금 모집, 친일파 처단 등의 독립운동을 전개하였다.
1998년 독립장이 추서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