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4년 6월 대한민국임시정부는 만주에 산재해 항일 운동을 전개하던 독립운동 단체들을 통합, 군무부 직할의 육군주만참의부를 정식 인준하였다.
참의부는 독립군을 5개 중대로 편성하였으며, 독립소대·훈련대·민사부 등을 별도로 설치하였다. 이들은 활발한 국내 진입 작전을 전개해 일제의 식민 통치기관을 습격, 파괴하였다.
1924년 5월, 참의부는 특공대를 편성하였다. 그리고 조선 총독 사이토[齋藤實]가 국경 지방의 치안 상태를 점검하기 위해 압록강을 순시하는 기회를 이용, 순시선을 공격하였다. 당황한 일제는 중국의 봉천성(奉天省) 당국자와 교섭해 독립군의 근거지를 소탕하려 하였다.
이와 같은 정세와 아울러 참의부 내에서도 변화가 있었다. 그 해 겨울 참의장 겸 제1중대장 백광운(白狂雲)이 대한통의부(大韓統義府) 유격대원 백병준(白炳俊)·백세우(白世雨) 등에게 암살 당하자 최석순(崔碩淳)이 참의장과 제2중대장을 겸하였고 제1중대장에는 김선풍(金璇風)이 기용되었다.
박응백(朴應伯)이 제3중대장과 훈련 대장을 겸하였고, 김창빈(金昌彬)과 김창천(金蒼天)이 제4중대장과 제5중대장에 임용, 김우근(金宇根)과 김소하(金筱厦)가 독립 소대장과 민사 부장에 유임되었다.
진용을 재정비한 뒤 보다 본격적인 국내 파괴 공작 계획을 수립하기 위해, 1925년 3월 중순 고마령에서 5개 중대 군사 회의를 개최하였다. 그런데 밀정들의 보고로 이러한 사실을 탐지한 초산경찰서는 연담주재소(蓮潭駐在所) 미즈노[水野寶三郎]에게 경찰대 65명과 초산 주둔 수비대 120명을 거느리고 참의부를 기습하도록 하였다.
미즈노는 순사부장 고피득(高彼得)과 밀정 이죽파(李竹坡)를 앞세우고 초산을 출발하였다. 경찰대를 6개 분대로 나눈 다음 압록강 북안에 수비대를 매복시켰다. 이튿날 새벽 참의부 통신기관장 김명준(金明俊)을 집에서 체포, 고문해 회의 장소를 탐지 할 수 있었다. 그리고 기습 공격을 감행하였다.
불의의 공격을 받은 참의부 대원들은 즉각 전투 태세를 갖추어 응전하였는데, 참의장 최석순과 소대장 최항신(崔恒信)은 포위망을 돌파하기 위해 미즈노와 고피득의 분대를 상대로 육박전을 감행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참의장 최석순이 적탄에 희생되자 독립군은 점점 수세에 몰렸으며, 지세의 불리와 중과부적으로 4시간에 걸친 전투에서 42명이 전사하고 3명이 붙잡혔다.
고마령전투는 참의부로 하여금 그 진용을 정비해 항일전 및 주구 숙청에 더욱 매진하게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