북방외교는 1988년부터 한국 정부가 추진해 온 대공산권 외교정책이다. 중국·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협력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 사회주의국가와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 정책이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의 취임사에서 대외정책 기조가 제시됐고, 그해 7월 7일 7·7선언을 발표하면서 본격화하였다. 북한과는 유엔동시가입·남북기본합의서 교환이라는 성과를 냈고 동유럽 국가들과의 교류를 시작으로 중국과도 수교하는 등 큰 진전을 이루었다.
일명 북방정책이라고도 한다. 북방외교는 중국 · 소련 · 동유럽국가 · 기타 사회주의국가 및 북한을 대상으로 하는 외교정책으로, 중국 · 소련과의 관계개선을 도모하여 한반도의 평화와 안정을 유지하고, 사회주의국가와의 경제협력을 통한 경제이익의 증진과 남북한 교류 · 협력관계의 발전을 추구하며, 궁극적으로는 사회주의국가와의 외교 정상화와 남북한 통일의 실현을 목적으로 한다.
북방외교는 통일 이전 서독이 실시했던 동방외교에서 유래되었다. 구서독의 브란트(B. Brandt) 정부가 1960년대 말부터 1970년대 초에 걸쳐 미국과 소련의 긴장완화를 배경으로 적극적으로 추진한 동독 및 사회주의권에 대한 ‘동방정책(Ostpolitik)'이 서독과는 달리 남북 대립구도를 이루던 한국에 유사한 논리구조로 수용된 것이다.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둔다면, 한국 북방외교의 기원은 1973년 6.23선언 당시 할슈타인원칙(Hallstein Doctrine)을 포기한 시점으로 볼 수 있다. 이 선언을 포기하면서 대공산권 외교가 보다 활성화 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때문인지 ‘북방정책’이라는 용어가 처음으로 모습을 드러낸 것도 6.23선언 10주년을 기념한 강연에서였다. 1983년 6월, 이범석 당시 외무부장관은 국방대학원에서 행한 연설에서 ‘북방정책’이란 용어를 처음으로 사용하였는데,
그의 설명에 따르면, “북방정책이란 표현은 기존의 대공산권 정책과 거의 같으나, 공산권이란 용어는 국제사회의 변화에 따라 부적절한 측면도 있고 불필요한 자극적 요소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해 쓰는 것”이라고 하여, 공산권 외교에 대해 보다 온건하고 세심한 배려를 담은 의미를 부여하였다.
이것은 물론 직접적으로는 공산권외교의 적극적 방향전환을 시사한 것이지만, 그동안 지나치게 친서방 정책에 편중해 온 외교정책의 전환을 의미하는 것이기도 했다.
이후 북방외교는 노태우 대통령이 1988년 2월 25일 취임사에서 본격적으로 정부의 대외정책 기조로 설정하면서 적극화 되었다. 이 취임사를 계기로 그 해 7월 7일에는 이른바 7 · 7선언이 발표되었으며, 북방 대륙국들과의 관계 개선이 적극 추진되었다.
1988년 노태우 대통령이 취임사에서 강조한 북방외교란 종래 이념과 체제가 다르다는 이유로 외교관계가 없던 북방대륙의 국가들과 국제협력을 통해 새로운 관계를 구축해 나가겠다는 것이었다. 이들과의 관계개선은 곧 동아시아의 안정과 평화, 공동의 번영에 기여하게 될 것이며, 북방외교의 성공은 또한 통일로 가는 지름길임을 확신했던 것이다.
여기서 알 수 있듯이 북방외교는 이념과 체제를 달리하는 공산권 국가들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외교적 노력이며, 궁극적으로는 남북관계의 개선과 통일을 향한 외교를 전개하겠다는 의지를 밝힌 것이었다. 이를 기점으로 북방외교는 노태우 정권의 공식 외교노선이 되어 활발히 추진되었는데, 그 구체적 현실화가 7.7선언이다.
노태우 정부는 취임하던 그 해 7월, 남북한 자유왕래 및 북한과 서방, 남한과 사회주의권의 관계개선 협력 등을 주요 골자로 하는 “7 · 7선언”을 발표하여 북방경제교류 촉진을 확인하고 10월 7일 '대북한 경제개방 7개조치'를 발표했다. 나아가 국제적으로 사회주의권의 개혁과 개방이 대세임을 확인한 정부는 7 · 7선언 이후 북방정책을 강력히 추진시켰다.
노태우 대통령의 북방외교에 대한 적극적 의지는 세계 냉전체제의 해체 직전인 1980년대 말까지 대단히 계획적이고 주도적인 외교로 표현되기 시작했다. 그 전까지 ‘적성국가(敵性國家)’로 분류됐던 공산권 나라들과 적극적 외교관계를 맺기 시작했으며, 그 궁극적 목표는 한반도의 평화 정착에 두어졌다.
북방외교를 표방하던 초창기에 사용했던 용어인 ‘북방정책’에서 ‘북방’은 곧 ‘공산권’의 다른 표현이다. 통일이전의 서독과는 달리 한국은 북방에 주로 편중되어 있던 공산국가들로부터 안보위협을 벗어나고, 더욱 적극적으로는 평화질서를 창출하는데 도움이 되는 외교를 하겠다는 것이었다.
더 나아가 북한 역시 이러한 북방외교의 대상으로서 북한의 자유, 민주화를 달성하여 궁극적으로는 통일을 이룰 수 있도록 한다는 것이 본질적 구상이었다.
이와 같은 북방외교는 현실화를 위한 첫 단계로 동유럽 국가와의 교류를 시작하여, 1992년 8월 24일에는 한 · 중 수교를 통해 1949년 이후 무려 43년 동안 교류가 단절됐던 중국 대륙과의 관계를 회복함으로써 사실상 막바지에 도달하게 된다.
따라서 노태우 정부가 애초에 표방했던 북방정책의 궁극적 도달점이라고 할 수 있는 대북 통일외교는 1991년 9월 18일 유엔 동시가입, 1992년 2월 19일 남북기본합의서와 비핵화 공동선언 등으로 일부 양국 간의 긴장완화와 통일을 향한 전 단계를 조성하는 수준에서 마무리 할 수밖에 없었으며, 차기 정부의 과제로 넘겨지게 되었다.
7 · 7선언 이후, 이에 때맞춰 불어온 미 · 소간의 신(新)데탕트 바람과 서울올림픽 개최, 대공산권 교역증대 등의 유리한 여건에 힘입어 그 해 3월 24일 헝가리가 서울무역사무소를 설치함으로써 북방외교는 본격적으로 활성화 되었다.
89년 2월 1일에는 동구 공산권국가로는 처음으로 헝가리와 정식 수교하였으며, 1989년 7월까지 유고슬라비아 구소련 폴란드 불가리아 등 동구권의 무역사무소가 차례로 설치되었다.
그러나 정부의 이러한 시도는 대북정책과 연결되면서 북방외교의 지나친 속도를 견제하려는 정부 내 세력에 의해 재조정되었다. 그와 더불어 서경원 의원, 문익환 목사, 임수경 등의 ‘방북사건’이 잇따르면서 한동안 무르익던 대공산권 우호분위기는 역으로 반공적 불씨가 되었으며, 정부가 사회의 전반적인 반공분위기를 자극할 수 있게 해주는 계기가 되었다. 이로 인해 대북정책뿐 아니라, 북방외교도 일시 지체되었다.
이후 김대중 평화민주당 총재의 동유럽 순방과 통일민주당 김영삼 총재의 소련 방문은 북방외교의 새로운 돌파구를 마련하는 기폭제가 되었다. 특히 김영삼 총재의 소련방문을 계기로 소련과의 관계개선은 순조롭게 진행되었고, 재조정된 북방외교는 남북한 관계와 분리되어 사회주의권과의 국교정상화 방향으로 폭 넓게 전개되었다.
1989년 소련과의 관계를 보면, 7월 말∼8월 초에 전국경제인연합회의 경제협력사절단이 소련을 방문해 생필품 수출과 합작투자 등을 논의했다. 이어 9월 소련과학원 동양학연구소장인 카피차와 고르바초프의 외교자문역이자 소련과학원 미국 · 캐나다 연구소장인 아르바토프가 방한해 한국 · 소련 간의 경제협력 확대를 예견했다.
또한 10월 소련의 ‘세계경제 및 국제관계연구소(IMEMO)’ 대표단들이 내한하여 소련의 대 한반도 정책변화를 시사하는 등 한국정부에 대한 우호적인 발언이 잇따랐다.
1990년 2월 9일 정부는 그 동안의 민간 · 밀사외교에서 벗어나 정부차원에서 북방외교를 전담하기 위해 북방외교추진본부를 외무부에 설치, 정경분리(政經分離) 차원이 아닌 정경연계방식(政經連繫方式)을 천명했다.
이를 토대로 1990년 6월 4일 샌프란시스코에서 노태우 대통령과 고르바초프 대통령 간의 한 · 소정상회담에 이어 9월 30일 뉴욕 국제연합본부에서 최호중 외무부장관과 셰바르드나제 소련 외무부장관이 대사급 외교관계를 수립한다는 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정식으로 한 · 소수교가 이루어졌다.
이와는 달리 1989년 6월 중국의 ‘톈안먼(天安門)사건’이란 복병을 만난 한중 관계는 더 이상의 진전을 볼 수 없었다. 따라서 이후의 북방외교는 주로 소련 및 동구와의 관계 개선에만 집중되었다.
그러나 북방외교의 지향점을 향하여 순항하던 노태우 정부로서는 체육교류 등을 통해 끊임없이 관계회복을 위해 노력하였으며, 결국 한중 관계는 1991년 1월 30일 대한무역진흥공사 주 베이징 대표부의 개설로 새로운 전기를 마련했다.
뒤이어 1992년 8월 24일 베이징에서 이상옥 외무부장관과 첸치천(錢其琛) 중국 외교부장이 수교공동성명에 서명함으로써 한중간의 정식수교가 이루어졌으며, 북방외교의 긴 여정도 마무리에 도달했다. 노태우 정부의 북방외교 기간 동안 새로 수교한 나라는 45개국, 그 인구는 17억 명이 넘었다.
북방정책은 다음과 같은 국내외적인 조건이 안정적이고 지속적 추진을 가능하게 함으로써 한국의 안보외교에 획기적인 전환점이 되었다고 볼 수 있다.
첫째, 대외적으로 사회주의권의 개혁 · 개방정책은 정부의 북방정책이 큰 무리없이 성공적으로 수행될 수 있도록 도움을 주었다.
둘째, 대내적으로는 동구 사회주의 국가와 소련 · 중국과의 국교수립이라는 북방정책의 성과에 의해 노태우 대통령의 외교적인 역량이 긍정적으로 평가되면서 정부의 지위를 강화시켜주는 효과를 가져왔다.
셋째, 중소를 비롯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관계개선은 곧 이를 통한 북한의 개방화 압력으로 이어져, 북한의 개방정책을 이끄는 역할을 하였으며, 남북한의 긴장을 완화하고, 대외적 국제위상을 강화하는 수단이 되었다.
그만큼 사회주의권과의 수교는 북한의 고립에 직 · 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고 있으며, 또한 이들을 통해 북한에 개방화 압력을 가했기 때문이다. 이러한 대내외적 정세와 올림픽을 매개로 하여, 한국은 비교적 쉽게 소련이나 중국에 접근할 수 있었는데 이러한 북방외교는 한국 안보외교의 실질적인 다원화를 추구하였다는 점에서 높이 평가될 수 있다.
이에 반해 한국의 북방 외교는 크게 다음의 두 가지 한계점을 가지고 있는 것으로도 평가된다.
첫째로는, 북한을 제외한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에는 성공하였으나, 북한과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증진 · 발전시키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고,
둘째로는 북방정책이 공산권 국가와의 관계 개선이라는 정치적 목적만이 강조되고, 정책추진과 집행 과정에서 외교실무 당사자들의 참여가 배제된 채 소수의 집권 엘리트층에 의해 정치적으로 주도되었다는 점이다. 이는 결과적으로 북방정책에 대한 국민적 이해와 지지가 결여되는 결과를 낳는 한계로 작용하였다.
이상을 종합해 보면, 북방정책은 궁극적으로 염두에 둔 남북관계 개선과 통일이란 대업달성에는 미치지 못했지만, 동구권과의 수교, 한 · 소수교, 한 · 중수교 등의 성과와 아울러 사회주의권의 교역을 증대시켰다는 정치, 경제적인 실익을 가져왔다.
이와 아울러, 일정한 한계를 갖는 것이긴 하지만, 1991년 남북한의 유엔 가입을 통해 북한과의 관계에서도 어느 정도 진전된 관계를 보임으로써 나름대로 긍정적 정책효과를 이루었다고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