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제연합(UN) 중국대표권 문제는 유엔에서 중화민국과 중화인민공화국 중 누구를 중국 대표 정부로 할 것인지를 놓고 발생한 문제이다. 1949년 국공내전으로 인해 중국이 두 정부로 분단되면서 유엔에서 중국대표권 문제가 야기되었다. 장제스의 중화민국과 중국본토를 차지한 중화인민공화국 중 누가 중국의 대표권을 가질 것인가의 문제였다. 1971년까지 공산주의를 반대한 서방국가들에 의해 중화민국이 대표권을 가졌다. 그러나 1971년 10월 유엔 결의에 따라, 중화민국은 유엔에서 대표권을 잃고 탈퇴하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대표권을 얻게 되었다.
서방진영이 중심을 이루던 당시 유엔의 분위기는 비록 중화민국 정부가 본토의 난징에서 타이완의 타이베이로 옮겼어도, 중국대표권은 여전히 중화민국 정부에 있다고 해석하여 장제스의 중화민국 정부에게 중국대표권을 부여하였다. 이로 인해 마오쩌둥의 중국공산당이 이끌던 중화인민공화국은 미국 등 주요 유엔회원국의 결정에 따라 세계최대의 거대 인구를 가지고도 유엔에 참여할 수 없었다.
이 문제 때문에 소련은 1950년 1월부터 유엔에서 거부권을 행사하며 한동안 유엔일정에 참가하지 않았다. 그러나 중국대표권 문제가 최초로 유엔에서 공식 제기된 것은 1950년 제5차 유엔총회에서이다. 이때 인도는 중화인민공화국 공산당 정권에게 유엔의 대표자격이 부여되어야 한다는 결의안을 제출했는데, 이 안은 미국 등의 반대에 부딪혀 33 대 16, 기권 10의 투표 결과로 폐기되었다.
이후 1951년(6차 총회)년부터 1960년(15차 총회) 사이에 중국대표권 문제는 중화인민공화국이 한국전에 개입한 이유를 들어 미국이 이의 상정을 저지하는 바람에 유엔총회에서 공식적으로 거론되지 않았다. 그러나 총회 의제상정 제안, 자격심사위원회 회부(1952년), 회기 벽두에 예고없이 의사진행에 포함(1953∼1955년) 등의 다양한 형태로 제기되었다.
이후 제16회 유엔총회가 개최되었던 1961년에 들어와 유엔에서 중국대표권은 소수의 중국인을 대표하는 대만이 아니라, 다수의 중국인이 살고 있는 중국본토여야 한다는 문제가 다시금 공식적으로 제기되었다. 이 때 중국대표권 문제는 유엔에서 표결처리까지 갔으나, 이러한 중대한 문제는 ‘중요사항지정방식(重要事項指定方式)’에 의해 결정되어야 한다는 미국 등 서방국가들에 의한 대공산권 방지안에 의해 무산되었다.
여기서 말하는 중요사항지정방식이란 ‘중국대표권의 교체’에 관한 결의는 구성국의 3분의 2의 다수를 요구하는 중요사항(헌장 18조)이라는 결의안을 먼저 과반수로 가결시킨 다음, 중화인민공화국의 대표권을 3분의 2의 다수 찬성을 획득하지 못하면 부결시키는 것을 말한다. 이러한 방식으로 인해 중국대표권 문제는 계속해서 유엔에서 제기되고 표결되었으나, 현실화되지 못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대표권에 대한 지지는 꾸준히 증가하여, 1970년에는 결의안이 3분의 2에 미달되어 비록 부결되기는 하였으나, 찬성표가 반대표를 상회하기에 이르렀다.
이러한 지난한 과정 끝에 1971년 제26회 총회에서는 다시 알바니아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대표권 승인과 중화민국 정부의 추방을 골자로 하는 안이 제기되었다. 공산권 국가들의 중국대표권 획득을 위한 노력이 지속되던 이 시기는 베트남전으로 고생하던 미국이 현실적 필요에 의해 중화인민공화국과 관계정상화를 시도하던 때이기도 했다. 중화인민공화국 역시 스탈린 사후 계속 악화되어온 중소분쟁에 따른 불안정한 대외관계를 보완하고, 국제적 지위향상을 위해 미국과 핑퐁외교를 추진하는 등 미중 양국 관계는 상당히 호의적으로 전환되었다.
이러한 국제적 환경의 조성은 미국을 비롯한 반공산권 국가들이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대표권을 더 이상 거부하기 힘들게 만들었다. 다만, 미국은 기존의 입장도 있고, 또 현실적으로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를 인정하고 대만을 유엔에서 배제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지 않았기 때문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의 대표권을 인정함과 동시에 대만 정부의 의석도 보존하기 위하여 ‘대만 정부의 유엔으로부터의 추방은 중요사항이다’라는 이른바 역(逆)중요사항지정방식에 의한 결의안을 별도로 제출하였다.
그 결과 미국안과 알바니아안이 대결을 벌였는데, 유엔의 최종적 선택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손을 들어주는 것이어서 중화민국은 결국 유엔에서 대표권을 잃고 탈퇴하기에 이르렀으며, 중화인민공화국 정부가 대표권을 얻게 되었다.
1971년 10월 25일에 채택된 유엔 결의 제2758호에 따르면, “중화인민공화국의 합법적 권리를 회복시키는 것이 유엔 헌장을 준수하고 유엔 조직을 헌장에 어긋나지 않게 활동하도록 하기 위해서도 불가결하다는 것, 중화인민공화국 정부 대표가 유엔에서 중국의 유일 합법적 대표이고 중화인민공화국이 안전보장이사회 5개 상임이사국의 하나임을 인정한다는 것, 중화인민공화국의 모든 권리를 회복하고 그 정부 대표가 유엔에서 중국의 유일 합법적 대표임을 인정한다는 것, 장제스 대표를 그가 유엔과 모든 관련 조직에서 불법적으로 점령하고 있는 장소에서 즉각 추방하기로 결정한다는 것” 등을 핵심 내용으로 하여 결정되었다.
이에 따라 기존의 중화민국 정부가 유엔에서 가지고 있었던 중국대표권은 중화인민공화국의 유엔 가입과 동시에 이양되었다. 나아가 중화민국 정부는 미국에 의해 시도된 유엔의석 보존안이 채택되지 않음에 따라 유엔회원국의 자격까지 잃게 되었다.
이로써 유엔창설 26년 만에 중화인민공화국 정부는 공식적으로 유엔에서 중국을 대표하게 되었으며, 상임이사국의 지위까지 자동으로 승계하게 되었다. 그 결과 공산권의 세력확장에 대한 서방진영의 우려와 견제의식에 따라 세계최대 인구를 가진 중국이 겨우 작은 섬으로 구성된 대만에 의해 대표되는 비현실적이고 불안정한 상황은 종료되었다.
물론 이러한 상황의 변화는 서방진영이 보다 객관적이고 합리적 현실인식을 수용했을 뿐만 아니라, 공산권 내부, 특히 중소간의 갈등과 이에 상응하는 미중 우호관계 형성이란 새로운 상황변화의 귀결점으로서 세계질서는 보다 합리적 모습을 찾게 된 것이었다. 이와는 반대로 대만은 대표권문제를 계기로 1971년 국제사회로부터 완전히 고립되는 비극을 경험하였으나, 이후 기회가 되는대로 유엔회원국으로서의 자격을 획득하기 위해 노력해 왔다. 특히 2007년 천수이볜 총통 당시에는 국호를 타이완으로 표기하면서까지 유엔가입을 적극 추구하는 노력을 기울였는데, 이러한 대만의 노력은 유엔가입이 곧 독립국임을 선언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므로 중국은 물론, 미국이나 주요 우방국들의 반대를 받았으며, 유엔 사무총장이던 반기문은 이를 반려하였다. 결국 대만은 2009년 9월 마잉주 총통이 17년간 추구해 왔던 유엔가입을 공식포기 한다고 선언함으로써 대만의 유엔가입문제는 일단락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