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서보(恕甫). 아버지는 면천군수 신묵(申默)이다.
1583년(선조 16) 무과에 급제, 선전관에 등용되었다. 강진·고산현감을 역임하였다.
1595년 남부주부(南部主簿)로 있을 때, 임진왜란으로 전쟁 중인 우리나라에 사자를 보내어 통호(通好: 서로 관계를 가짐)를 요구하는 등 심상치 않은 태도를 보이는 건주여진(建州女眞)의 동정을 탐지해오라는 명을 받았다.
그 해 12월 만포진에서 압록강을 건너 명나라의 여희윤(余希允)과 누루하치(奴兒哈赤: 뒤의 淸太祖)의 거성(居城)에 들어가 그들의 발호에 대한 명나라의 뜻을 전하고 동정과 산천·풍습 등을 살펴보았다.
이듬해 1월 귀국, 복명하면서 한만사연구(韓滿史硏究)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는 『건주기정도기(建州紀程圖記)』를 작성하여 올렸다.
귀국한 그 해에 함흥판관이 되었으나, 임진왜란 중 금산전투 때 무단이탈한 죄와 누루하치에게 오배삼고두(五拜三叩頭: 다섯번 큰 절을 하고 머리를 세 번 땅에 조아림)의 예를 올려 국위를 손상시켰다는 죄로 파직되었다.
그 뒤 복관되어 1599년 김해부사가 되고 1615년(광해군 7) 첨사가 되고, 이듬해 경상도수군절도사·부총관 등을 역임하였다. 묵죽에 뛰어나 이정(李霆)과 함께 양대가로 이름을 날렸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