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字)는 자우(子雨). 할아버지 고화(高和)는 342년(고국원왕 12)에 전연(前燕) 군에게 끌려간 고구려의 귀족이었다. 고운은 심지가 깊고 도량이 넓었으며 일을 처리하는 능력이 뛰어났는데, 말이 적어 사람들로부터 바보 같다는 평을 듣기도 하였다.
일찍이 모용보(慕容寶)가 태자로 있을 때 동궁(東宮)의 무예급사(武藝給事)를 지낸 인연으로 모용보의 마음에 들게 되어, 뒤에 그의 양자가 되고 모용씨를 사성받았다. 이와 같은 연유로 『진서(晉書)』 등 중국 사서에서는 그를 모용운(慕容雲)으로 쓰고 있다.
후연(後燕)의 4대 왕 모용희(慕容熙)의 학정이 심하자 중위장군(中衛將軍) 풍발(馮跋) 등이 모용희를 죽이려고 고운과 상의하였다. 고운은 자신을 추대하려는 풍발을 극구 말렸으나, 풍발 등은 모용희를 죽이고 그를 왕으로 옹립하였다. 이에 407년 천왕(天王)에 즉위하고 자신의 성씨를 고씨(高氏)로 복성(復姓)했으며, 개원을 하고 국호를 대연이라 하였다. 그 뒤 이렇다 할만한 업적을 남기지 못한 채 불안정한 왕위를 지키려고 노력하던 중 도인(桃仁) 등에 의해 2년 만에 살해되었다.
그는 왕이 되자 고씨 성을 되찾았을 뿐 아니라, 『삼국사기』 광개토왕본기에 따르면 고구려 왕실과도 같은 종족(宗族)으로서의 유대를 가졌다. 즉, 408년(광개토왕 18) 광개토왕이 대연에 사신을 보내 종족의 예를 베풀자, 그는 시어사(侍御史) 이발(李拔)을 보내 답례했다고 한다. 이것은 그가 고구려계로서 자부심을 가졌던 것과, 동시에 중국 동북방의 여러 종족들 사이에서 고구려가 상당히 인정받고 있었음을 나타낸다. 고운은 살해되었지만, 이와 같이 연결된 고구려와 고운의 관계는 그 뒤 풍발이 세운 북연(北燕)과의 관계에서도 계속 이어졌다.
중국 동북의 새로운 강자인 북위(北魏)의 침략으로 북연이 망하게 되자, 북연 왕 풍홍(馮弘)은 고구려의 장수왕에게 구원을 청하였다. 이에 장수왕은 장군 갈로맹광(葛盧孟光)으로 하여금 수만 명의 군사를 이끌고 가서 북연의 수도인 용성(龍城)의 주민들과 지배층을 호위해 고구려로 데리고 나오도록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