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청송(靑松). 자는 문징(文徵), 호는 청봉(晴峰). 개국공신 심덕부(沈德符)의 후손이며, 첨정 심자(沈磁)의 증손이다. 할아버지는 목사 심우정(沈友正)이고, 아버지는 판서 심집(沈諿)이며, 어머니는 직제학 홍종록(洪宗綠)의 딸이다.
1615년(광해군 7) 진사가 되고, 1624년(인조 2)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였다. 일찍이 당대의 문신 이호민(李好閔)과 오억령(吳億齡)으로부터 인정을 받았다. 인조 초 집의(執義)로 재직할 때 소북(小北) 남이공(南以恭)이 청서(淸西)의 영수인 김상헌(金尙憲)을 탄핵하려 하자, 남이공의 부당함을 상소하고 사직하였다.
4년간 고향에 은거하였다. 1641년 교리(校理)로 등용되어 종부시정·응교(應敎)·집의·사인(舍人) 등을 역임하였다. 언관재임 때에는 곧은 신하로 이름을 떨쳤고, 병자호란 때에는 절의를 지켰다. 서장관으로 심양(瀋陽)에 다녀와서 1644년 사간에 올랐다.
심기원(沈器遠)의 모역옥사에 친척으로 연루, 장흥에 유배되었다. 여러 신하들의 신원(伸寃: 억울한 죄를 회복시킴)이 있었으나 십여 년간 금고상태로 있다가 효종 초에 석방, 현종 때 신원되었다. 시종 서인의 입장에 섰으나 언론활동은 공정하였다. 시문을 좋아하여 『청봉집』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