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용 요약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산 심적정사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석조나한상군이다. 1996년 3월 11일 경상남도 유형문화유산으로 지정되었으며 총 21구이다. 도금(鍍金)이나 도색(塗色)이 되어 있지 않는 원색질감의 상태이다. 산청읍 소재 나한암(羅漢庵)에 봉안되었던 것을 6.25동란으로 나한암이 소실(燒失)되자 지금의 심적사(深寂寺)로 옮겼다. 본존으로 모셔진 석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좌상으로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은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조선시대 조각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로 평가된다.
정의
경상남도 산청군 산청읍 지리산 심적정사 나한전에 봉안되어 있는 조선시대 석조나한상군.
개설
원래 산청읍 지리 1128번지 소재 나한암(羅漢庵)에 봉안되었던 것을 6.25동란으로 나한암이 소실(燒失)되자 지금의 심적사(深寂寺)로 이운하여 봉안하게 되었으며, 그 제작시기는 조선 초기로 추정된다. 심적사는 신라 경순왕 3년(929)에 창건하였다고 전해지는 사찰이다.
내용
현재 본존으로 모셔진 석불상은 결가부좌(結跏趺坐)의 좌상으로 중앙에 배치되어 있다. 양손을 무릎 위에 포개 놓은 선정인(禪定印)의 수인(手印)을 하고 있다. 소라모양의 머리카락인 나발(螺髮)에 작은 상투모양의 육계(肉髻)가 오똑하게 솟아있다. 얼굴은 갸름하게 긴 편이다. 코는 우뚝하게 크고 입가에는 엷은 미소를 띠고 있으며,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내려온다. 통견(通肩)의 불의(佛衣)를 걸쳤다. 양 옷자락 사이에는 배 앞을 가로지르는 옷은 내부 상의(上衣)를 표현한 것이다. 작은 작품이기 때문인지 신체 비례는 조화롭지 못하나, 미소 띤 상호(相好)에서 느껴지는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 친근감을 느끼게 한다.
보살상은 다른 상들과 달리 두건이 아니라, 삼산관(三山冠) 형태의 높은 관을 쓰고 있다. 관 내부에는 위로 틀어 올린 상투 머리가 보이기도 한다. 이러한 표현은 고려 후기의 금동보살상에서도 볼 수 있다. 귀는 길어서 어깨까지 닿아 있다. 본존과 같은 식의 통견의 법의를 걸쳤으며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과 같은 손모양을 하고 있다.
제석천과 범천으로 추정되는 2구는 보살상과 동일한 모습이지만 조각이 소략하고 보관이 작은 편이며, 체구도 작다.
문인석형식의 2구는 나한상과 달리 입상(立像)이며, 관을 쓰고 있는 것이 특징이다. 조선시대 왕릉이나 묘 앞에 세워져 있는 문인상과 같이 양손을 턱 밑까지 들어 올려 맞잡고 있는 모습이다. 그러나 네모난 형태의 경책(經冊) 같은 지물(持物)을 들고 있어 판관으로 추정해 볼 수 있다.
나한상들은 자세에 따라 몇 가지 형식으로 구분된다. 우선 지물을 들고 있는 상이 6구가 있다. 발우(鉢盂)를 들고 있는 상은 배 앞에서 왼손으로 받쳐 들고 오른손으로 감싸 쥐고 있는 형식이다. 옷주름 표현은 두드러지지 않는다.
무릎 위에 경책을 펼쳐 들고 앉아 있는 상은 2구이다. 1구는 가슴 부분에는 옷주름을 나타내지 않았으나, 팔뚝에는 띠 모양의 주름을 표현하였다. 다른 1구는 가사를 y자형으로 여며 입고 있다.
방형의 함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상은 통견의 가사를 입고 있다. 가슴에는 끝이 약간 뾰족한 U자형의 주름이 표현되었다. 이외에 탑 모양의 지물을 양손으로 받쳐 들고 있는 상이 있으며, 나머지 1구는 오른손은 무릎 위에 올리고 왼손으로 합을 받쳐 들고 있다.
가사의 목깃은 y자형으로 오른쪽으로 여며 입었으며, 고개를 왼쪽으로 갸우뚱하고 있다. 공통된 자세나 형식을 보이는 다른 상들로는 독특한 형식의 가사를 입고 있는 2구의 상을 살펴볼 수 있다. 목에는 돋을새김한 목깃이 둥글게 둘러지고 이를 묶은 띠가 한 줄 짧게 늘어진다.
신체 전면에는 5줄이나 7줄의 세로 음각선을 목깃 밑에서 하체 부분까지 길게 넣어 마치 서양의 망토를 두른 듯 표현하였다. 두 손은 옷 속에 넣어 감추고 있다. 7줄의 주름선이 표현된 가사를 입은 상은 또 다른 1구가 있다. 이 상은 옷 속에서 맞잡고 있는 두 손이 두드러지게 표현되어 앞의 2구의 상과 구별된다. 다른 그룹으로는 동일한 자세로 합장을 한 형식이 3구가 있다. 이들은 모두 팔뚝에 띠 모양의 굵은 주름을 표현하였다. 손에 가려져 가사의 여밈은 보이지 않고, 몸이 앞으로 약간 기울어졌다.
유사한 형식을 보이는 다른 예로는 항마촉지인과 비슷한 손 모습을 보이는 2구가 있다. 이중 1구의 상은 오른손은 가볍게 주먹을 쥔 채 무릎에 올려놓았으며, 왼손으로 촉지인(觸地印) 형태의 손모양을 하여 2구는 대칭적인 손 모습을 보인다. 아마도 이 상들은 양손을 무릎 위에 올려놓고 편안한 자세로 앉아 있는 모습이 우연히 항마촉지인과 일치된 것으로 생각된다.
나머지 1구는 두건이 귀를 덮고 흘러내려 양어깨를 덮고 있다. 착용한 가사는 가슴에 y자 모양으로 여며 입었으며, 앉아 있는 무릎 위에 주먹 쥔 듯한 양손을 가지런히 올려놓았다. 팔뚝 위로 띠 모양의 굵은 주름을 표현하였다.
나한상들은 몸을 앞으로 숙이거나 바로 세우고 앉아 고개를 좌우로 갸우뚱하기도 한 자세로 다양한 표정을 짓고 있어 매우 생동감 있는 표현을 보이고 있다. 얼굴 크기도 일정하지 않다. 지물과 지물을 들고 있는 손의 모습 역시 다양하다. 이 상들은 상체에 비해 하체의 조법이 빈약해 보이며, 상대적으로 커진 머리에 고개를 숙이고 허리를 구부린 듯한 자세에서는 둔중함을 보이고 있다.
특징
그리고 심적사 나한상에 얽힌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옛날 어느 절에 한 스님이 난리를 피하여 22존의 나한상을 짊어지고 지금의 심적사 근방에 쉬고 있을 때 나한상이 없어졌다. 흔적을 찾아 보니 지금의 심적사 절벽에 모여 있어 젊은 스님은 여기서 나한암을 지어 봉안하였다. 한해 겨울에는 눈이 많이 와서 교통이 끊겨 식량과 불씨마저 떨어진 채 동지를 맞게 되었다.
그런데 동짓날 아침 부엌에 팥죽이 놓여 있고 불씨도 피고 있어 살펴보니 부처님의 입술에 팥죽의 흔적이 있었다. 이상하게 여기고 이듬해 봄에 탁발을 가게 되었는데 지난 동짓날 심적사 나한암에서 상좌가 찾아와 팥죽과 불씨를 보시한 신도를 알게 되었다. 그래서 스님은 나한암에 돌아와 더욱 신심을 굳게 하고 나한상을 모셨다고 한다.
의의와 평가
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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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1
: 색계(色界) 초선천(初禪天)의 우두머리. 제석천(帝釋天)과 함께 부처를 좌우에서 모시는 불법 수호의 신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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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2
: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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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3
: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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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4
: 악마를 항복하게 하는 인상(印相). 왼손을 무릎 위에 두고 오른손은 내리어 땅을 가리키는 인상이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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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5
: 절에서 쓰는 승려의 공양 그릇. 나무나 놋쇠 따위로 대접처럼 만들어 안팎에 칠을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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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6
: 왼손은 주먹을 쥐어 배꼽 부분에 대고 오른손은 손가락을 펴고 손바닥을 안으로 하여 땅으로 드리우는 결인(結印). 석가모니가 보리수 아래에서 성도(成道)할 때에 이 결인으로 지신(地神)을 깨우쳤다고 한다. 우리말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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