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명은 희현(希玄). 고종 때의 낙산사(洛山寺) 주지로서, 1253년(고종 40) 몽고의 침입이 있자 낙산사의 관음보살상과 정취보살상(正趣菩薩像), 보주(寶珠)와 수정염주(水晶念珠)를 양주성(襄州城: 현재의 양양)으로 옮겼다.
이듬해 성이 함락위기에 놓이자 보주와 수정염주를 은합(銀盒)에 넣어 도피하려 하였으나, 사노(寺奴) 걸승(乞升)이 빼앗아 땅에 묻으면서 맹세하기를, “내가 죽으면 두 보주는 다시 인간세상에 나타나지 못할 것이고, 내가 죽지 않으면 두 보주를 나라에 바치겠노라.”고 하였다.
1254년 10월 22일 양주성이 함락되어 아행은 죽었으나 걸승은 죽음을 면하여 적병이 물러간 뒤 두 보주를 파내어 명주도감창사(溟州道監倉使)에게 바쳤다. 그 뒤 이 보주는 각유(覺猷)의 청에 의하여 어부(御府)로 옮겨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