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극은 193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번성했던 극 안에 노래와 쇼 등이 포함된 대중 연예물이다. 보통 1부는 노래가 포함된 드라마를 중심으로 전개하고, 2부는 버라이어티 쇼로 진행되었다. 악극은 스타시스템, 구성, 소재, 쇼 등을 조절하면서 대중연예물의 흥행 방식을 만들어 나갔다. 무대, 음악, 조명, 의상, 무용 등 전문 인력도 늘어나고, 하루 3회 공연이 진행되기도 했다. 1950년대 전쟁 이후 악극은 다양한 방식을 시도하며 여성국극, 영화와 같은 타 매체와 경쟁했으나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쇠퇴하게 되었다.
1930년대부터 1950년대 후반까지 인기를 끌었던 대중 연예물로 극 중 음악, 춤, 노래가 들어가는 형식들을 지칭한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에 주1, 무용, 주2, 만담을 덧붙였던 주3을 기원으로 보며, 대중 주4와 연예 기획의 변화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대중적 주5의 총칭으로 악극이 사용된 것은 가요 중심이 된 음악극이 관객의 인기를 얻게 되면서부터이다. 주6 공연에 가수가 참여하여 음반 판매나 공연 흥행 모두에 효과를 발휘하자 레코드사에서 직속 악극단을 만들기도 하였다.
악극을 공연하는 단체들은 1부는 노래를 포함한 극으로, 2부는 주7 연주, 무용, 노래, 개그, 주8 등이 섞여진 버라이어티 쇼로 진행하였다. 이러한 쇼 방식은 미국 주9과 유사성이 거론되기도 하였다. 악극은 극에서 노래가 차지하는 비율과 배열하는 방식에 따라 극 진행 도중 대중가요를 결합하는 형태, 짧은 노래들을 연결한 형태, 극과 노래가 비슷한 비율로 결합된 형태 등이 있었다.
초기에는 악극과 가극이 혼용되어 사용되었지만 고전설화 소재의 주10을 가극으로 지칭하면서 개념이 변별되기 시작한다. 악극이 관객들에게 다양한 구경거리로 인식되면서 인기를 끌자 사회단체가 공연권을 매입해서 공익 사업 기금 모집으로 허가를 받아 공연이 이루어지기도 했다. 신문사 주최로 국방기(비행기) 헌납 모금 공연, 수도청 주관 교통 질서 공연(캠페인)을 빙자해서 흥행을 하는 단체도 있었다. 악극 배우는 잘하는 분야 외에도 희극 · 노래 · 사회까지 다방면으로 잘하는 이들이 무대에 오래 남았다.
1940년대 조선연예협회 · 조선연극문화협회를 통한 국민연극운동, 이동연극대에서도 악극단의 참여가 확인된다. 만주, 일본 등으로 순회공연했던 조선 주11의 경우, 무용, 악기, 소재 등은 조선적 색채를 강조하고, 밴드 구성 및 음악의 경우 재즈를 혼용하면서 인기를 끌었다. 주12는 악극 공연 단체가 더 늘어났는데, 기획, 창작자가 이전 단체에서 나와 새 단체를 만들고 인물을 추가하는 방식으로 확산되었다.
같은 이름으로 오래 유지된 단체는 라미라가극단(19411946), 반도가극단(19421953), 조선악극단(19401948), 백조가극단(19451955) 등이다. 이들은 레코드 회사를 기반으로 한 자본과 기획을 바탕으로 고유 레퍼토리를 보유하고, 중심 인력이 일정 기간 동일했으며, 시대적 변화에 따른 운영의 변화를 꾀한다는 점에서 공통점을 가진다.
악극단의 전략은 음악이 포함된 대중극의 역사와 궤를 함께 한다. 흥행을 최적화하는 데 스타 시스템, 구성 변화, 소재 변화, 쇼의 지양 등 시대의 변화에 적응해 나갔다. 해방 이후 무대, 음악, 조명, 의상, 무용 지도 담당자 등 전문 인력을 확보하고 공연은 하루 3회(오전 10시, 오후 3시, 5시)까지 확장시킨 곳도 있었다. 해방기부터는 영화와 동시 공연하는 방식도 도입하였다.
1950년대 최대로 늘어난 악극단은 타 매체와 극장 점유를 경쟁해야 했다. 다른 극단과 주13을 했고, 관객이 선호하는 방식은 바로 포함시켰다. 겹치기 출연, 유사 레퍼토리, 자기 복제 곡으로 구성된 작품도 늘어났다. 악극은 다양한 방식을 시도했지만 전후 급격한 사회 변동 속에서 형성된 자유의 과잉, 개인주의적 성향, 약화된 공동체 의식, 미국 문화에 대한 동경 등을 제대로 담아내기 어려워지면서 여성국극, 영화에 밀려나게 되었다.
1961년 한국연예협회를 형성하고, 1966년 악극협의회도 만들어졌으나, 악극은 더 이상 공연되지 않다가 1980년대 이후 「기러기 형제」라는 텔레비전 드라마를 통해 과거를 떠오르게 하는 신파, 5인조 악단, 가요 20곡 이상을 극 중간에 넣는 방식으로 박제되었다. 1993년 극단 가교에서 악극 경험자의 고증을 더해 「번지 없는 주막」을 제작하여 흥행에 성공하기도 했다. 이후 1960년대식 복고풍 극장 쇼, ‘효도 공연’의 형태로 가끔 공연된다.
악극은 일제에 대한 소극적 저항, 일제의 식민통치 전략을 내면화한 것이란 이중적인 평가를 받았다.
1930년대 이후 활동한 주요 악극단은 아래와 같다.
1930년대: 삼천가극단, 조선연극사, 배구자악극단, 연극시장, 태양극장, 중외극장, 낭랑좌(소녀가극단), 화랑악극단, 도원경
1940년대: 아세아악극단, 라미라(羅美羅)가극단, 반도가극단, 조선악극단
해방기: 백조가극단, 태평양가극단, 새별악극단, 무궁화악극단, 현대가극단, 악극단KPK, 대도회악극단
한국전쟁 이후: 남대문악극단, 태양가극단, 조선극장악극단, 악극사(舍), 희망악극단, 청춘부대악극단, 악극단 낙락, 코리아가극단, 국도악극단, 은방울악극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