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극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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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음악이 주가 되고 무용이 곁들여지는 연극양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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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음악이 주가 되고 무용이 곁들여지는 연극양식.
내용

일명 가극(歌劇)이라고도 불린다. 서양의 오페라도 가극이라고 불러왔지만 우리의 악(가)극은 오페라와 전혀 다르다. 아마도 미국에 번성한 뮤지컬과 비슷한 점은 있을 것이다. 그러나 미국의 뮤지컬과도 여러 면에서 차이가 나는 연극형식으로서, 조금 낮추어서 정의한다면 통속적인 경음악극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타락한 신파극이 파생시킨 우리 나라의 악극은 1920년대 말엽에 생겨났다. 그런데 악극이 발생한 데에는 세 가지 요인이 있었다. 첫째, 무대 메커니즘의 낙후와 흥행을 위한 대중영합의 막간 쇼에서 비롯되었다. 즉, 1920년대만 하더라도 극장시설도 부실하였을 뿐만 아니라, 무대전환이 매우 완만하였으므로 기다리는 관객의 지루함을 없애 주고 분위기를 돋우는 막간쇼가 필요하였다.

따라서, 주연 여배우들이 나와서 노래도 부르고 코미디언과 우스갯말도 주고받았다. 나중에는 여가수가 등장하고 막간전문의 코미디언도 나오게 되었다. 연극의 막과 막 사이에 곁들여진 노래라든가 촌극·재담 등이 악극으로 발전하였고, 결국 악극을 전문으로 하는 예원좌(藝苑座)·배구자악극단(裵龜子樂劇團)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되었다.

둘째, 음반의 발전과도 관계가 있었다. 즉, 1930년대 초에 음반회사가 생기면서 음반의 다량판매를 위해서 인기 있는 무대배우를 가수로 써서 음반을 제작하였고, 나중에는 가수를 무대에 내세워서 인기배우를 만들기도 하였다. 바로 여기에서 음반회사 지원의 악극단이 생겨나기도 한 것이다. 가령, OK·빅타·콜롬비아 같은 음반회사들이 만든 OK악극단·콜롬비아악극단·빅타가극단 등이 그러한 예에 속한다.

셋째, 일본의 다카라쓰카소녀가극(寶塚少女歌劇)의 영향에 의한 것이다. 즉, 1930년대를 전후해서 우리 나라 음반회사들은 음반제작을 위하여 가수들을 데리고 일본에 자주 갔고, 거기에서 다카라쓰카소녀가극을 자주 보았다. 또, 다카라쓰카소녀가극단이 내한공연을 가짐으로써 악극의 싹이 돋을 수가 있었으며, 동시에 그것을 모방한 배구자악극단 같은 것이 생겨나게 된 것이라 볼 수 있다.

악극단의 시초는 1929년 일본에서 다카라쓰카소녀가극을 오랫동안 구경한 권삼천(權三川)이 삼천가극단을 조직한 것이었다. 그리고 비슷한 시기에 무용가 배구자가 일본에서 악극단을 조직하였다. 1930년대에 들어서 원산과 함흥에서 해송가극단(海松歌劇團)과 오양가극단(五洋歌劇團)이 연이어 생겨났다.

지방의 가극단들은 어떠한 작품을 공연하였는지 알 수 없으나, 삼천가극단과 배구자악극단은 가극 또는 가무극으로서 대체로 작자를 알 수 없는 <크로다이크칼멘>·<돈과 벙거지> 등과 대표 권삼천이 쓴 <헷소문>·<우수한 가극>과 신불출(申不出) 작 <경성행진곡>, 문수일(文秀一) 작 <여배우>, 김영환(金永煥) 작 <부자와 양반>, 작자미상의 <복수의 칼>·<파계>·<멍텅구리 미인탐방> 등 소극 및 애정물을 무대에 올렸다. 이들에 이어 1938년에 단성사(團成社) 직속으로 화랑악극단이 홍토무 작 <고도의 비극>, 신불출 작 <십만불> 등으로 창단되었고, 그것이 곧 해체되면서 악극단 도원경이 창립되었다. 이들의 창립공연작품은 홍개명(洪開明)의 <금색의 꿈>·<월야곡>과 이서구(李瑞求)의 희가극 <청춘호텔>, 뮤지컬코미디 <신혼강짜소동> 등이었다.

이듬해에 빅타가극단이 생겨났고, 1940년에는 김용환·고복수(高福壽) 등에 의해서 반도악극단이 발족되었다. 비슷한 시기에 인천에 김희좌악극단이 생겨서 인천을 본거로 활동하였고, 중앙에 조선악극단·콜롬비아악극단·황금악극단 등이 속속 생겨나서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다.

역시 악극단이 크게 번성한 것은 1940년대에 들어서였고, 이 시기에는 앞에 열거한 악극단 외에도 신향악극단(新響樂劇團)·나미라가극단(羅美羅歌劇團: 콜롬비아악극단의 개칭)·성보악극대(城寶樂劇隊)·신세계·김길자악극부(金吉子樂劇部)·경성악극단·선일악극단·동아여자악극단·약초가극단(若草歌劇團)·제일악극대·신협악극대(新協樂劇隊) 등 20여 개에 육박하는 많은 악극단들이 활발한 공연활동을 벌였던 것이다.

1940년대 초엽이라면 일본군국주의가 모든 예술을 심하게 통제하고 어용화하던 때였다. 바로 그러한 예술의 암흑시대였기 때문에 극히 통속적인 저질악극이 번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러한 악극의 찬란한 융성은 광복 직후로도 이어졌다. 광복 직후의 정치·사회·경제 상황도 혼란과 무질서 그대로였기 때문이다.

따라서 광복이 되자 악극단은 우후죽순처럼 더욱 많이 생겨났다. 즉, 기존악극단들과 함께 백조악극단·태평양악극단·무궁화악극단·새별악극단·대도회악극단·청춘부대악극단·장미악극단·현대악극단·KPK악극단 등이 새로 탄생되었다. 그야말로 악극의 전성시대였다.

악극인들은 가극협의회까지 구성하고 본격적인 활동을 벌였고, 악극경연대회를 열기도 하였다. 악극에는 상당수의 순수연극인도 참여하였고, 박노홍(朴魯洪)·김화랑(金火浪)·김상화(金尙火) 등 전문작가도 등장하게 되었다. 6·25전쟁 후에도 악극은 여전히 기세를 떨쳤고, 대도회악극단·창공악극단·별·가협(歌協)·프린스악극단·은향악극단 등이 다시 생겨났다.

이렇게 번창하던 악극이 내리막길을 걷기 시작한 것은 역시 수복 후부터였고, 박노홍·김석민(金石民) 등이 임화수(林和秀)의 도움으로 악극재건에 몸부림쳤지만 시대의 추세를 어쩔 수는 없었다. 그러니까 악극이 구태를 벗지 못하고 답보하는 상태에서 영화라든가 방송 등 대중문화가 급속히 발전한 것이다.

그러나 일부 악극인들은 미련을 못 버리고 5·16군사정변 후에는 한국연예협회를 형성하여 그 정신을 존속시킨 가운데, 1966년 악극협의회를 다시 만들어 매년 한번씩 공연을 가지다가 1972년 5월 명보극장에서 박호(朴虎) 주재로 반공악극 <북에는 태양이 없다>의 공연을 끝으로 완전히 자취를 감추고 말았다.

대중연극의 한 장르로 존속해 오던 악극이 약 40여년 만에 일단 무대에서 사라지고 현대쇼의 시대로 접어든 것이다. 1990년대 접어들면서 악극이 다시 고개를 들기 시작하여 1990년대 중반에는 대중연극의 핵심으로 자리잡을 만큼 번창하였다. 그 이유는 미국식 뮤지컬의 영향도 있지만 그보다도 복고풍 상업연극에 따른 것이라 볼 수 있다. 연극계에서는 그런 현상을 부정적으로 보고 있다.

참고문헌

「악극사의 단면」(김석민, 『연예문화』 창간호, 1982)
『한국연극사』-제2기-(서항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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