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2년 사적으로 지정되었다. 고종은 19세기 말경에 건립된 이 집을 사서 일본에서 망명생활을 청산하고 돌아온 박영효(朴泳孝)에게 하사하였다. 박영효는 철종의 후궁인 숙의 범씨의 소생 영혜옹주(永惠翁主)와 혼인한 철종의 부마(駙馬)였다. 이 집은 그 후 주인이 바뀌었다가 전 대통령 윤보선의 선친인 윤치소(尹致昭)가 1910년경에 매입, 개수하여 오늘에 이르고 있다.
넓은 대지에 ‘ㄱ’자형의 안채와 솟을대문간채, ‘一’자형의 사랑채와 별당채, 기타 광채들이 남향으로 배치되어 있다. 서향한 솟을대문간을 들어서면 행랑마당인데, 이의 동남측에 사랑채가, 서북측으로 안채와 별당채가 자리잡고 있다.
행랑마당에서 동남측으로 나아가면 사랑채가 남향하여 있고 사랑채 뒤에 잔디밭과 연못으로 마당을 꾸몄다. 사랑채의 서측면에는 차양(遮陽)을 두어 옥외에서 즐길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하였다. 사랑채 앞 마당에는 괴석을 담아 놓은 석함을 높은 석주로 받쳐 놓았다. 북측 담장 아래에는 전돌을 쌓아 화계(花階)를 꾸몄다.
남향한 사랑채는 본래 산정사랑(山亭舍廊)이었다. 현재는 정면 5칸 측면 4칸으로, 서측에서 동측으로 정면 2칸 측면 2칸의 작은 대청, 정면 2칸 측면 2칸의 사랑방이 자리잡고 있다. 사랑방 앞에는 반 칸 크기의 골마루를 두었고, 옆으로 1칸 폭을 물러선 자리에 1칸 크기의 함실아궁이부엌을 두었다.
작은대청과 사랑방 앞에는 반 칸 폭의 툇마루를 두고, 이보다 폭이 좁은 툇마루를 서측면과 뒷면에 마련하였다. 작은대청과 사랑방 뒤 북쪽에는 서측에서 동측으로 나오며 정면 3칸 측면 2칸의 큰사랑대청, 정면 1칸 측면 2칸의 침방을 두었다. 침방 동측으로 화장실을 새로 증축하였다.
사랑채는 장대석 세벌대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굴도리로 결구한 소로수장집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사랑채 앞면, 서측의 옆면, 뒷면 툇마루에는 ‘亞’자살짜임으로 궁창부를 마감한 난간을 둘렀다. 사랑방과 침방 사이의 문을 월문으로 만든 것이 이채롭다.
사랑채 뒤로 따로 쌓은 담장 안으로 ㄱ자형 평면의 안채가 남향하여 자리 잡고 있다. 본래 이 사이 공간에 사랑채가 있었다고 하지만 지금은 잔디를 깔고 연못을 만들어 사랑의 후정(後庭)으로 쓰고 있다.
안채의 정면 중앙에는 정면 3칸 측면 2칸 크기의 대청을 두고, 이의 서측 앞면에 식당, 뒷면에 식모방, 주방, 식품고, 세탁장을 두었다. 이는 개조된 것이고 본래는 식당자리에 건넌방만 있었다고 판단된다. 대청의 동측에는 작은대청이 자리하고 이의 북쪽으로 화장실과 침방이 있다. 본래 화장실과 침방은 커다란 하나의 윗방을 개수한 것이다. 작은 대청 남쪽에 안방이 있다. 안방의 남쪽 역시 작은 방, 화장실, 누마루로 개조했으나, 본래는 부엌과 광이 이어져 있었다고 한다.
안채의 창호는 본래의 모습을 잘 간직하고 있는데, 특히 안방 창호들은 덫창, 사창(망사창), 쌍창, 갑창의 네 겹으로 하여 조선시대 양반집의 창호 구성을 잘 보여준다.
안채는 장대석 바른층쌓기 세벌대기단 위에 네모뿔대의 초석을 놓고 네모기둥을 세워 납도리로 결구한 민도리집 구조이다. 가구는 이고주육량(二高柱六樑)집이고, 겹처마 팔작지붕을 이루고 있다. 본래 외벽은 회반죽 마감이었으나 1960년 개수 때 붉은벽돌쌓기로 하였다.
안채 서측의 사잇담 너머에는 별당(別堂, 안사랑)채가 있다. 이 별당채는 정면 5칸, 측면 2칸반의 '一'자형 평면으로 남향하고 있는데, 많은 부분이 개조되었다. 중앙에 대청을 두고 동측으로 안사랑방, 서측으로 건넌방을 두었다. 그러나, 건넌방이 식당으로 변하고, 안사랑방 뒤쪽으로 달아내어 화장실, 부엌을 마련하였다. 특히 안사랑채 앞면에는 차양(遮陽)을 두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