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4년 국가민속문화재(현, 국가민속문화유산)로 지정되었다. 고려 삼태사(三太師) 중의 한 사람인 권행(權幸)의 재사이다.
초창(初創)은 1653년(효종 4) 관찰사 권우(權堣)가 종인(宗人)들과 논의하여 마루 · 방 · 곳간 등 16칸을 건립하였고, 그 뒤 1683년(숙종 9) 관찰사 권시경(權是經)이 누각 7칸을 추가로 지었다. 그러나 1743년(영조 19) 화재로 건물이 전소되어 중건하였다.
1896년 다시 화재를 입어 당시 70여 칸의 건물 중 임사청(任事廳) · 전사청(典事廳) 등 몇 칸만 남기고 모두 소실된 것을 1896년에 다시 중건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이 재사는 계곡을 따라 올라가는 길 왼쪽에 높은 축대를 쌓아 추원루(追遠樓)를 전면에 내세워 문루를 삼았다. 누문 안의 큰마당 건너 우뚝 솟은 재사 큰채와 그 앞 양쪽에 늘어선 동재 · 서재가 튼ㅁ자를 이루었다.
또 동재의 뒤쪽에 임사청 · 전사청 · 주사(厨舍)가 작은 마당을 중심으로 일곽을 이루고 있어서 전체 배치가 日자를 옆으로 뉘어놓은 모양으로 되어 있다. 추원루는 누하 어칸에 다락문을 내고 그 앞에 여러 단의 자연석 계단을 설치하여 출입하게 하였다.
통로의 좌우에는 일부 흙과 판자로 벽을 치고 수장(收藏)공간을 마련하였다. 능동재사는 사랑채의 기능을 가지고 있는데 원래는 2칸 대청을 중심으로 왼쪽에 방 2칸, 오른쪽에 방 1칸을 둔 정면 5칸집이었으나 왼쪽 끝에 방 2칸을 첨가하여 규모를 증대시켰다.
동재(안사랑채) · 서재(헛간채)는 각 3칸으로 서재는 방 2칸에 부엌 1칸, 동재는 방 2칸에 전사청 마당으로 통하는 문간이 1칸 놓여 있다. 임사청(별당)은 주사(안채)와 일곽을 이루며 북편의 축대 위에 배치되었는데, 어칸이 마루로 되어 있고, 좌우에 방을 1칸씩 드렸다.
전사청(곳간채)은 ‘공성재(供城齋)’라는 편액이 걸려 있는 정면 3칸집의 앞쪽에 툇마루를 설치하고 그 뒤쪽에 수장고를 3칸 두었기 때문에 제기고(祭器庫)라고도 한다.
집의 구조를 보면 추원루의 누하주(樓下柱)는 8각주로 자연석 초석 위에 놓았다. 누상주(樓上柱)는 두리기둥에 주심포계(柱心包系) 이익공(二翼工)의 공포를 형성하였는데 쇠서는 초각(草刻)과 봉두각(鳳頭刻)으로 조각되어 있다.
지붕 가구는 5량가(樑架)로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운 윗몸에 첨차를 끼워 마루도리를 받고 있다. 능동재사(陵洞齋舍)는 높은 잡석 축대 위에 자연석 초석을 놓고 사각기둥을 세운 전퇴(前退)집으로 대청상부는 5량가의 연등천장으로 마감하였다.
종보 위에 사다리꼴 판대공을 세우고 그 윗몸에 첨차를 끼워서 마루도리를 받게 하였다. 이 집은 구조적인 면에서 큰 특징은 없으나 재사로서는 보기 드물게 큰 규모의 건물로 조선시대 제례행사의 성대한 규모를 짐작하게 하는 훌륭한 건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