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권 1책. 필사본. 서문과 발문이 없어 필사 연대와 필사자는 알 수 없다. 국립중앙도서관에 있다.
권1에 시 51수, 척독(尺牘) 1편, 권2에 부(賦) 5편, 전(箋)·지(志)·소(疏) 각 1편, 장(狀) 2편, 정문(呈文) 1편, 부록으로 교서(敎書) 4편, 전(傳) 1편 등이 수록되어 있다.
시의 「양원수패후도창성(兩元帥敗後到昌城)」은 정묘호란(丁卯胡亂) 때 패전하고 창성에 돌아와 읊은 것이다. 살기는 하늘에 잇닿고 적군의 북소리만 울린다고 패군지장(敗軍之將)의 참상을 술회하였다.
「송김도사환락(送金都事還洛)」은 뜻밖에 김도사를 만나 술을 마시고 난 후 헤어지면서 지은 시이다. 이별을 못내 아쉬워하는 두 사람의 정회가 잘 드러나 있다.
장의 「논기철양성수축편부장(論箕鐵兩城修築便否狀)」은 기성(箕城)과 철성(鐵城) 두 성의 복구가 옳지 않음을 논한 글이다. 두 성은 허물어진 부분이 30∼40리나 되고 40∼50년 동안 방치했던 것이라 수축하는 데 많은 인력이 필요하고, 설혹 완성시킨다 해도 그것을 수호하는 데 따르는 예산을 확보하기 어렵다며, 뒤로 미루는 것이 상책이라 주장하였다.
「황조사관정문(皇朝査官呈文)」은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대통을 이을 때 명나라에서 온 내사관(內査官)에게 보낸 정문이다. 광해군이 둘째 아들로서 첫째 아들인 임해군 대신 왕위를 계승하게 된 사정을 완곡하게 설명하고 있다. 임해군은 당시 함경도에서 토민(土民)의 침노로 왜노에게 인계되었다가 몇 해 뒤에야 겨우 풀려나 왕위에 오르지 못하였으니, 이것은 천명(天命)이라고 하였다. 광해군이 임해군과 골육상쟁의 왕위 다툼을 통해 즉위한 것이 아님을 밝혔다.
이밖에 「강선루중건후선온사전(降仙樓重建後宣醞謝箋)」은 임진왜란 때에 불타 버린 강선루를 중건한 뒤에 올린 글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