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남원(南原). 호는 여산(黎山). 경상남도 거제도에서 한의사 집안에 태어났다. 그러나 어려서 양친을 여의고 인척집에서 농사일을 거들며 불우한 소년기를 보냈다.
16세 때에 고학을 결심하고 통영(統營)의 사립청년학원을 거쳐 진주농업학교에 진학하여 그림에 뜻을 두게 되었다. 1932년 조선미술전람회(鮮展)에 수채화가 입선한 뒤 동경(東京)에 건너가 데이고쿠미술학교(帝國美術學校)에서 한때 수학하며 어렵게 화가의 길을 개척하였다.
그 사이 조선미술전 입선도 수차 거듭하고, 동경의 여러 공모전에도 출품하다가 돌아와 부산에 정착하여 작품생활에만 전념하였다. 작풍은 자신의 외롭고 불우하였던 소년시절을 동심적으로 미화하려고 한 듯이 시골의 자연환경과 농촌생활의 서정을 동화처럼 정겹고 평화롭게 전개시키는 독특한 세계로 일관하였다.
화면에는 소년·소녀·아낙네와 풀밭·소 등이 등장하며 표현기법이 매우 동심적이어서 ‘동심의 화가’로 불렸다. 대한미협전, 국전 활동 및 여러 차례 개인전을 가졌으며, 부산미술협회 활동도 하여 1962년 제1회 경남문화상 수상자가 되었다. 1969년에는 부산미술계를 위해 몇몇 유지들과 함께 상설미술관인 수운화랑을 마련하는데 주도적인 역할을 했으며 이외에도 한국신미술가협회와 넝쿨회 창립회원, 부산 화우들의 모임인 후기회(後期會)에서 활동했다. 1974년부터 대한민국미술전람회(國展) 추천작가·초대작가로 출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