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하음(河陰). 자는 경보(敬甫), 호는 퇴사옹(退思翁). 박학하고 의술에 능하였으나 1563년(명종 18) 내의원주부(內醫院主簿)로서 순회세자(順懷世子)의 병을 치료하지 못한 책임을 지고 투옥되었다.
이듬해 다시 예빈시판관(禮賓寺判官)으로 발탁되었다. 1565년 어의(御醫)로 명종의 총애를 받아 통정대부에 오르고, 명종이 죽어 의관들이 처벌당할 때 함께 투옥되었다가 곧 복직되었다.
1580년(선조 13) 가선대부에, 1595년 동지중추부사가 되었다. 이듬해 태의(太醫)로 『동의보감』의 편찬에 참여하였고, 박세거(朴世擧)·손사명(孫士銘) 등과 함께 『의림촬요(醫林撮要)』를 저술하였다. 임진왜란 때 중전이 수안과 해주에 머물 때 호종의관이 되기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