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응락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의, 통정대부, 분승지, 평산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심원(深源)
만수(漫叟)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572년(선조 5)
사망 연도
1620년(광해군 12)
본관
남원(南原)
주요 관직
병조정랑|희천군수|통정대부|분승지(分承旨)|평산현감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의, 통정대부, 분승지, 평산현감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남원(南原). 자는 심원(深源), 호는 만수(漫叟). 양성지(梁誠之)의 후손으로, 할아버지는 양사경(梁思敬)이고, 아버지는 군수 양근(梁謹)이다. 어머니는 좌찬성 어계선(魚季瑄)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590년(선조 23) 진사가 되고, 1606년 증광문과에서 장원하였다. 같은 해 전적(典籍)과 호조·예조의 좌랑을 역임하였다. 이듬해 성절사의 서장관으로 명나라에 갈 때, 사신 이홍로(李弘老)가 병을 핑계삼아 모면하려고 하자, 장계(狀啓)를 올려 이홍로의 병세를 알렸다는 이유로 사헌부로부터 탄핵을 받았다.

명나라를 다녀온 뒤 병조정랑이 되었으며, 1617년(광해군 9) 희천군수 재임시 선치(善治)함으로써 통정대부에 올랐다. 이듬해 분승지(分承旨)가 되었다가 서북변경이 심상하지 않자, 평산현감으로 나아가 고을을 잘 다스려 가자된 바 있으며 그곳에서 병사하였다.

사람됨이 깨끗하고 신중하여 관직생활에서는 청렴하고 집에서는 선행을 행하였다. 문장에 능하였고 글씨도 잘 썼다. 수령 재임시에는 순리(循吏: 법을 잘 지키며 근면한 관리)로서 칭송을 받았으며, 이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참고문헌

『선조실록(宣祖實錄)』
『광해군일기(光海君日記)』
『국조인물고(國朝人物考)』
『국조방목(國朝榜目)』
『계곡집(谿谷集)』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