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선조 25) 5월 2일, 서울을 향하여 쳐들어 오는 왜군을 저지하기 위하여 한강을 지키고 있던 도원수 김명원(金命元)이 적에게 패퇴, 임진강 쪽으로 후퇴하였다. 이 때 부원수 신각은 김명원을 따르지 않고 유도대장(留都大將) 이양원(李陽元)과 함께 양주 산곡(山谷)으로 들어가 흩어진 군사들을 수습하고 있었다.
때마침 그곳에서 함경도 남병사(南兵使) 이혼(李渾)이 거느리고 온 군사들을 만나 그들과 합세하여 한성의 왜적 토벌을 논의하던 중 양주를 중심으로 한성에 출입하는 적의 활동이 매우 빈번하다는 정보를 확인한 뒤, 해유령(蟹踰嶺) 부근에 잠복하여 있다가 적의 귀로를 요격하기로 하였다.
마침내 5월 중순 어느날 저녁, 무질서한 행군으로 해유령을 넘어오던 일본군 1개 부대를 맞아 미리 매복중이던 조선군사들이 완전한 포위상태에서 적을 급습, 순식간에 70여명의 적병을 참살하는 전과를 거두었다. 이 전투는 왜군이 부산상륙 이후 조선군사가 올린 최초의 큰 전과였으나 피난길에 오른 조정에서는 길이 막혀 그 소식을 접하지 못하였다.
오히려 조정에서는 이 전투를 직접 지휘하여 가장 큰 공을 세운 부원수 신각이 한강 방어전에서 도원수의 명령에 불복하여 달아났다는 김명원의 그릇된 보고에 따라 선전관을 보내어 그를 처형시켰다. 뒤에 김명원의 보고가 허위였음이 드러나고 양주전투에서 세운 신각의 공이 조정에 알려져 처형을 중지하고자 하였으나 그 때는 이미 그가 죽고난 뒤의 일이었다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