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음의 발행인 스스로 일정한 금액을 치르는 것을 약속어음이라고 하고 그 지급을 제3자에게 위탁하는 것을 환어음이라고 한다.
우리 나라에는 고유한 전통적인 어음이 있었는데 이는 어험(魚驗) 또는 음표(音票)라고도 하였다. 전통적인 어음은 일정한 금액의 지급을 약속하는 표권(票券)이며 조선 후기에 접어들어 상평통보가 교환수단으로 널리 유통하게 된 이후부터 신용을 본위로 하는 개성상인 사이에서 발생하게 되었는데 그 뒤 점차로 주로 객주에 의해 본격적으로 발행되어 통용되었다.
이는 보통 길이 6∼7치와 너비 2∼3치의 종이로 작성되었는데, 종이의 중앙에 ‘출문(出文) 또는 출전(出錢) ○○○냥(兩)’이나 ‘출급(出給) 또는 출차(出次)’라고 기입되었다. 이는 출문 또는 출전은 얼마만큼의 금액에 해당한다는 것을 의미하고, 또 출급 또는 출차는 지급하겠다는 것을 의미한다. 대체로 어음의 오른쪽 또는 왼쪽의 윗부분에 작성한 날짜를, 그 밑부분에 채무자의 성명을 기입하고 날인하였는데 성만을 기입하는 것이 보통이었다.
지급기일이 기입된 것도 있고 또는 그것이 기입되지 않은 것도 있었는데, 전자는 그 날짜가 되면 지급되는 것이고 후자는 요구불로서 언제든지 지급을 청구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런데 어음의 기일은 원칙적으로 1파수(一派收:한 장날에서 다음 장날까지의 5일간) 또는 2파수로 되어 있었으며 길어도 2개월을 초과하지 않는 것이 보통이었다.
일단 어음이 작성되면 보통 어음의 가운데를 지그재그 모양으로 절단하여 채무자의 기명이 있는 쪽인 남표(男票, 雄片·雄票)를 채권자에게 교부하고 다른 한쪽인 여표(女票, 雌片·雌票)를 채무자가 보관하였다. 남표의 보유자가 채무자에게 지급을 요구하게 되면 채무자는 그가 보관하고 있는 여표와 맞추어 보고 액면의 금액을 지급하였다. 그런데 조선 말기에 이르러서는 대개 어음을 절단하지 않고 그대로 채권자에게 교부하는 것이 일반적인 관행이었다.
이 어음은 배서 없이 양도되고 있었으며 누구든지 어음의 보유자는 채무자에게 지급을 청구할 수 있었다. 이러한 전통적인 어음은 상평통보가 무겁고 부피가 커서 운반하기가 불편한 시대에 간편하고 자유롭게 양도할 수 있는 신용수단으로서 널리 유통되었다.
1876년(고종 13)의 개항 이후로 전통적인 어음은 종래보다 훨씬 많이 사용하게 되었는데, 이는 신용도가 높아 우리 나라 사람 사이에는 물론 중국인·일본인에까지 아무런 장애 없이 활용되어 그 유통범위가 한결 더 확대되었다. 뿐만 아니라 중국인이나 일본인에 의해서도 우리 전통적인 어음이 발행되어 통용되기도 하였다. 상평통보, 즉 엽전이 주로 유통되고 있던 남부와 동북부지방에서는 엽전(葉錢 또는 韓錢)어음이 널리 통용되었다.
1894년의 신식화폐발행장정(新式貨幣發行章程)에 의해서 우리 나라가 은본위제도를 채택한 이후 백동화(白銅貨)가 발행되기 시작하여 서울과 인천을 중심으로 하는 중부와 서북부지방에서는 어음의 금액이 백동화로 표지되어 있는 백동화어음이 일반적으로 사용되고 있었다. 1904년 12월에 우리 나라의 전환국(典圜局)이 일본의 강요에 의하여 폐지되었고, 1905년에는 화폐개혁이 단행되었다.
이때 우리 나라 화폐와 일본화폐의 교환비율을 1:2로 하여 우리 나라 화폐의 가치를 저하시켰을 뿐만 아니라 백동화와 우리 나라 화폐와의 교환에 있어서 차등교환을 실시함으로써 우리 나라 사람이 보유한 화폐자산이 감축되었다. 특히, 여기에서 우리는 구백동화의 13분의 1, 즉 300만 원이 일본에서 밀수입되었다는 데 주의해야 할 것이다. 이러한 상황에 따라 금융공황이 발생하자 일본인은 그 원인이 우리의 전통적인 어음 특히 백동화어음의 남발에 있다고 터무니없는 주장을 하며 비난하였다.
1905년 8월에는 중앙과 지방 그리고 지방과 지방 사이의 금융을 원활하게 소통시키고 있던 외획(外劃)을 폐지하더니, 9월에는 약속수형조례(約束手形條例)와 수형조합조례(手形組合條例)를 공포함과 동시에 아무런 과도적인 조처도 없이 무모하게 우리의 전통적인 어음의 발행을 금지시켰다. 1906년에는 이들 두 가지 조례를 통합한 수형조례가 발포됨에 따라 제도적으로는 전통적인 어음이 폐지되고 근대적인 어음이 도입되었다.
그러나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자생적으로 민간에서 널리 통용되던 전통적인 어음은 규모는 축소되었으나 일본강점기와 광복 후에도 계속 통용되었다. 고유의 어음이 주로 객주에 의하여 발행되어 통용되었는데 객주는 일제강점기뿐만 아니라 1960년대에 이르기까지 존속하고 있었으므로 전통적인 신용수단인 어음은 면면히 유통되었다고 할 수 있다.
한편, 전통적인 어음이 일제강점기에 있어서 우리 나라의 독립운동을 돕기 위한 군자금을 갹출하는 데 이용되기도 하였다. 즉, 독립자금을 갹출하고자 하여도 당장 현금이 없는 경우에는 우선 어음을 독립군에게 수여하고 뒷날에 그 어음에 의거하여 독립자금을 수교하는 것이다.
오늘날의 어음은 전통적인 어음에서 유래된 것인데, 이것은 일정한 금액을 일정한 시기에 일정한 장소에서 지급한 것을 기재하고 기명날인한 증권이라고 해석되고 있다. 이는 상품의 인도와 그의 대금지급 사이에 시간적인 간격이 발생하여 상업신용이 나타났을 때 신용수단으로서 활용되게 되었다.
이에는 약속어음과 환어음이 있는데 전자는 발행인이자 지급인이 일정한 날짜에 일정한 금액을 지급하겠다는 것을 약속하는 형식의 어음이고, 후자는 어음의 발행인이 일정한 금액을 일정한 날짜에 지급할 것을 제3자에게 위탁하는 형식의 어음이다. 거래되는 상품을 기초로 하여 발행되는 어음을 상업어음 또는 진성어음이라 하며, 상품거래 없이 발행되는 어음을 금융어음 또는 융통어음이라고 한다.
또한, 지급의 책임자가 은행으로 되어 있는 것은 은행어음이라고 하며, 개인으로 되어 있는 것은 개인어음이라고 한다. 그런데 어음의 보증이 개인 대신에 사회적으로 신용도가 높은 은행에 의하여 행해짐에 따라 상업신용은 은행신용으로 발전하게 되었다. 즉 은행이 상업어음을 할인하고 은행권을 공급하게 되었는데, 이 은행권은 은행이 발행하는 약속어음이다. 그리하여 은행권의 유통범위가 현저하게 확대되었고, 이에 따라 예금통화가 현금통화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증가하는 추세에 있다.
예금통화의 중심을 이루고 있는 것은 수표를 발행하는 당좌예금인데, 이에 따라 수표가 중요한 신용수단으로 활용된다. 1962년에 제정된 <어음법>에는 어음의 발행·배서·인수·보증·지급·시효·변조 등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으며, <수표법>에는 수표의 발행·양도·보증·지급·시효·변조 등에 관한 내용이 규정되어 있다.
한편, 일정한 지역의 교환가맹은행이 어음교환을 행하는 장소나 기구를 어음교환소라고 말하는데 1996년의 어음교환의 매수는 11억 4600만 대이며 그 금액은 7435조 7000억 원이고, 어음부도율은 금액을 기준으로 할 때 0.17%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