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1년 국보로 지정되었다. 정면 15칸, 측면 5칸의 팔작지붕건물. 조선시대 전라좌수영에 속하였던 군사건물로서 1599년(선조 32) 처음으로 건축되었으나, 그 뒤 1716년(숙종 42)에 불타 없어진 것을 다시 중건하였다.
건물은 계좌정향(癸坐丁向: 癸方을 등지고 丁方을 바라보는 방향)으로 높은 언덕 위에 배치되었다. 평면 전체는 아무런 벽체나 창호를 달지 않고 통간(通間)으로 개방하였다. 사괴석(四塊石)과 장대석(長臺石)을 섞어 쌓은 기단 위에 막돌주초를 놓고 민흘림두리기둥들을 세웠다.
기둥에는 주두(柱頭)와 첨차(檐遮)·소로[小累]로 공포(栱包)를 짜서 올린 주심포식(柱心包式)을 이루고 있으나, 세부적인 수법은 다포식(多包式)을 이루고 있다.
출목(出目)은 이출목이며, 살미첨차[山彌檐遮]는 쇠서[牛舌]로 되어 있고, 여기에 연꽃을 새겨 장식하였으며, 주간(柱間)의 창방(昌枋) 위에는 화반(花盤)을 놓아 주심도리 밑의 장혀를 받치고 있다.
건물의 평면에서 외진(外陣)과 내진 사이에는 고주(高柱)들을 일렬로 배치하여 대들보는 이 양 고주 사이에 걸고, 고주와 평주 사이에는 퇴량(退樑)을 걸었다. 또, 양쪽 세 번째 주열(柱列)에서 또 다른 고주를 세워 대들보를 떠받치고 있다.
대들보 위에는 동자주(童子柱: 세로로 세운 짧은 기둥)를 세우고 이 위에 중보[中樑]를 걸었으며, 다시 종보[宗樑]를 그 위에 걸고 대공을 놓아 종도리를 받치고 있다.
한편 양 측면의 어간(御間) 기둥 위에는 용머리[龍頭]를 조각한 충량(衝樑)을 대들보 위에 걸고, 이 위에 2개의 높은 동자주를 세워 종보를 받치게 됨으로써, 중보가 이들 높은 동자주 사이에 걸리게 되어 있다.
바닥은 우물마루이고 천장은 서까래가 드러난 연등천장[椽背天障]이다. 처마는 부연(浮椽: 처마 끝에 덧얹어 건 짤막한 서까래)을 단 겹처마이고, 네 귀의 추녀들은 활주(活柱)로 떠받치고 있으며 팔작지붕의 양측 합각(合閣)은 널판자로 마무리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