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사상사에 있어서 역학의 위치는 철학적 · 윤리적 내지 종교적 차원에서 최고의 원리로 인식되어 왔다.
한국 민족의 역사와 이념을 상징하는 국기가 태극기(太極旗)로 된 것도 역리(易理)를 얼마나 소중히 여겼는가를 단적으로 보여 주는 것이다. 이는 우연한 사실이 아니라 역사적 배경과 사상적 흐름에 있어서 역학 사상이 매우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 증거라 하겠다.
역이라 하면, 일반적으로 중국의 고전인 『주역』을 지칭하고 중국 사상으로 생각한다. 하지만, 역이란 단순히 『주역』만을 지칭하는 것이 아니라, 연산(連山) · 귀장(歸藏) · 주역을 3역(三易)이라 하듯이, 여러 가지 역이 있을 수 있으며, 특히 『주역』이 전래하기 이전부터 내려오는 한국 상대(上代)로부터의 신앙과 사유 방식의 발상이 역리와 관련, 발전해 왔다.
한국 역학은 시대적으로 내용을 달리해 고대의 점술, 중세의 신비주의적 자연론 내지 천문 · 역법(曆法) · 의약 등의 과학 사상을 볼 수 있으며, 주자학 수용 이후에는 주로 윤리적 · 철학적 원리로 발전하였다.
이를테면 세종의 훈민정음 창제라든지, 이제마(李濟馬)의 사상의학(四象醫學) 등은 역리가 한국 민족 문화 창달에 지대한 역할을 한 뚜렷한 사례다.
『주역』은 중국을 비롯해 한자를 사용하는 동양의 여러 민족이 과거 수천 년 동안 읽어 온 최고(最古)의 고전이다. 특히, 한국에 있어서는 삼국시대 이래로 오경(五經) · 삼사(三史) 등을 학술 사상의 중심으로 삼아 왔으며, 그 가운데서도 『주역』을 다른 경전에 비해 최고의 원리가 담긴 최상의 경전으로 여겨 왔다.
중국에 있어서 『주역』을 13경의 으뜸으로 두었지만 이는 송대 · 명대에 이르러서의 일이다. 진(秦)나라의 분시서(焚詩書)에서도 『주역』은 점서(占書)로 보아 화를 면했고, 당나라의 국학에서 경전을 대경(大經) · 중경(中經) · 소경(小經)으로 분류할 때에도 『주역』을 소경으로 취급했음을 볼 수 있다. 일본의 경우에도 대체로 『주역』은 점술로 응용되는 경향이 짙다.
『주역』이 본래 고대에서는 점서였던 것이 후대에 와서 윤리 · 철학서로서 면모를 바꾸게 된 것은 중국과 한국이 마찬가지이지만, 특히 한국의 경우 다른 나라에 비해 『주역』의 경학사적(經學史的) 위치는 고대로부터 항시 그 사상사의 주류를 이루어 왔다.
역학 사상은 주자학이 전래한 이후 크게 전환한다. 종래의 신비적 요소를 지양하고 윤리적이고 합리적인 사유가 역 사상 이해의 중심을 이룬다. 그리하여 조선조의 학자들은 주술적 점술을 억제하는 입장을 취한다.
이들은 이론적 · 성리학적 입장에서 역리를 연구하게 되었으나 이는 송학(宋學)의 전래와 관련이 있다. 송학의 성립 자체가 역과 『중용』을 바탕으로 형성되었으므로, 성리학의 기본이 되는 주요 문헌인 『근사록(近思錄)』 · 『성리대전(性理大全)』, 또는 한국의 『성학십도(聖學十圖)』 및 『성학집요(聖學輯要)』가 모두 『주역』과 『태극도설』을 학술의 연원으로 삼고 있다.
이와 같이 한국 성리학이 상하 500년 동안 학술 사상의 중심을 이루어 오지만, 근본에 있어서는 역리의 이해가 그 바탕을 이루고 있다.
성리학의 이기설(理氣說)이나 심성정론(心性情論)은 『주역』의 “역유태극 시생양의(易有太極 是生兩儀)”라 한 기본 명제에 대한 해석과 이론이며, 그것을 어떻게 전개하는가 하는 입장과 학설에 따라 학파가 갈라진다. 따라서, 태극을 이로, 음양을 기로 보아 양자의 관계를 어떻게 보느냐에 따라 역 사상(易思想)의 차이가 생긴다.
역에는 변역(變易) · 불역(不易) · 간이(簡易)의 삼의(三義)가 있다. 그러나 어느 면을 강조하느냐에 따라 사상도 달라진다. 한국에 있어서 변역의 측면을 강조하는 기학파의 대표로서 서경덕(徐敬德)을 들 수 있는데, 서경덕은 음양지기(陰陽之氣)를 철저화하여 태허지기(太虛之氣)의 유기론(唯氣論)을 주장하였다.
형이상은 이[道]고 형이하는 기(器)라 함은 성리학의 일반적 견해인데 서경덕은 유형 · 무형간에 기가 있을 뿐이라 하며, 기의 취산(聚散)이 있을 뿐이고 기의 증멸(增滅)은 없다고 보았다. 취하여 물(物)이 형화(形化)하고 산하여 청허지기(淸虛之氣)로 환원된다는 것이다.
이는 역의 삼의 가운데 변역의 측면을 심화한 것으로, 서경덕의 경우 만물 중의 물(物)도 물이며, 천지도 물의 한 형태인 것이다. 개물(個物)만이 산하여 허기(虛氣)로 돌아가고 신기(新氣)로 생래(生來)하는 것이 아니라, 이 천지도 변해 태허지기로 돌아가 후천지(後天地)로 개벽되는 것이며, 이것은 기의 승강취산(升降聚散)의 기능이라고 본다.
서경덕은 음기와 양기의 양능(良能)으로 생성변화가 이루어지는 법칙을 이(理)라고 보았다. 서경덕의 역리에 의하면 천지를 만고불변의 것으로 보지 않는다. 천지 미생(未生) 전을 전천지(前天地)라 한다면 천지가 멸한 뒤에는 후천지가 나온다고 보는 것이다.
이와 같은 사상은 화담 철학의 특징이며 탁견이라 아니할 수 없다. 그러나 여기에 문제로 제기된 것은 인간의 주체성과 창의성이다.
서경덕의 기론이 아무리 자연의 이법(理法)을 통찰할 수 있는 것이라 하더라도, 인간의 주체적 능동성과 자유로운 권능을 말하지 않는다고 해서 일종의 기수지학(氣數之學)으로 간주, 이학파에서는 이를 비판한다. 그 대표적 학자가 이황(李滉)이다.
이황은 태극을 강조해 “지극히 존귀하여 만물을 명령하는 자리요, 어떠한 것에도 명령받지 않는 것”이라 하였다. 만물 중의 태극보다 인심(人心) 중의 태극을 강조해 인간 자아의 인격과 생명의 주체성을 진리의 근본으로 삼는다.
태극은 불역지리(不易之理)로서 천고불변의 인륜강상(人倫綱常)을 부식(扶植)하려는 입장이며, 역 삼의(三義) 가운데 불역의 측면을 취한 것이라 하겠다.
과학이 어떻게 발달한다 하더라도 인간과 기계와는 구별될 수밖에 없으며 그 까닭을 알게 하는 것이 퇴계 철학의 특징이라 하겠다.
그러나 천리(天理)를 지극히 높인다 해도 그 천리가 구체적 현실과 어떻게 매개되는가 하는 점이 문제다. 즉, 무에서 유가 나오게 되는 논리적 비약을 설명하기 어렵다. 다시 말하여 역에 있어서 태극지리(太極之理)와 음양지기의 상호 관계성이 문제된다.
객관적 사실의 기의 세계와 주관적 관념의 이의 세계를 모순 없이 이해하고 융합할 수 있는 것은 주체적 인식 능력에 연유한다. ‘무극이태극(無極而太極)’임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인극(人極)을 성취해야만 한다.
『주역』과 『태극도설』에 의하면 인극, 즉 황극(皇極)이 확립될 수 있다면 사물을 달관하고 처리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며, 천지(天地) · 일월(日月) · 사시(四時) · 귀신(鬼神)과 더불어 합일해 천하지리(天下之理)를 쉽게 해득할 수 있다고 한다.
『주역』에서 “쉽고 간단하고 착함은 지덕과 일치된다(易簡之善 配至德).”라 한 것이 이를 말한다. 진리 인식의 주체인 성덕(盛德) 또는 명덕(明德)의 극치를 의미하는 것이라 하겠다.
객관에 대한 주관의 뜻이 아니라 주객 미분(主客未分)의 근원적 주체를 확립하는 인극인 것이다. 김항(金恒)의 『정역(正易)』에 “천지가 일월이 없으면 빈 껍데기요, 일월도 지인(至人)이 없으면 빈 그림자다(天地匪日月空殼 日月匪至虛影).”라 한 것이 그것이다.
한국 역학이 인간의 진리에 근원을 두고 인극을 추구했다는 것은 역학 사상뿐만 아니라 한국 사상의 본령(本領)이며 특질인 것이다.
단군의 탄생이 천신(天神 : 天 · 陽)과 웅녀(熊女 : 地 · 陰) 사이에 화합해 이루어진 ‘중(中 : 人間)’ 사상이라는 점과 그 이념이 ‘홍익인간(弘益人間)’으로 인간을 강조한 점, 대승 불교 사상으로서 성(聖)과 속(俗)을 일원화하고 유(有)와 공(空)을 원융(圓融)하는 원효(元曉)의 ‘십문화쟁론(十門和諍論)’, 율곡 철학에서 이상적인 이와 현실적인 기를 묘용(妙用)하는 ‘이기지묘론(理氣之妙論)’, 그리고 천도교의 ‘인내천(人乃天)’ 사상 등은 모두 인간을 근본으로 하는 한국 사상의 일관된 맥락이라 하겠다.
인간 중심의 사상은 역사적으로 그 근원이 매우 오래되었다. 『주역』이 우리 나라에 전래되기 이전부터 고래로 음양 사상과 인도 정신은 한국 사상의 원류를 이루어 왔다.
『한서(漢書)』 지리지에 보면 “동이(東夷)는 천성이 유순해 삼방족(三方族 : 北方族 · 南方族 · 西方族)과는 특이하므로 공자도 도(道)가 실행되지 않는 것을 슬퍼해 뗏목을 타고 바다를 건너 구이(九夷)에 가서 살고 싶다고 한 것은 까닭이 있는 일이다.”라 하여 동이족은 천성이 유순하다고 하였다.
또한, 『산해경(山海經)』에서는 “바다 건너 동쪽에 군자국이 있는데 그들은 의관(衣冠)을 하고 칼을 찼으며 사양하기를 좋아하며 다투지를 않는다.”고 하였다.
고대 금문(金文)에 의하면 동이족을 동인(東人)이라 하였는데 원래 이(夷)가 아니고 인(人)이다. 뿐만 아니라 갑골(甲骨)에서는 동이족을 ‘人(인)’으로만 표시하였다.
이 인(人)은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라, 인방족(人方族)을 가리킨 것이다. “인은 후기에 와서 인간이라는 뜻으로 전용(轉用)하게 되었다.”고 중국의 노간(勞榦)도 주장한 바가 있다.
『중용』이나 『맹자』에서 인(仁)은 인(人)이라 하였고, 또 『논어』에서 공자가 ‘은유삼인(殷有三仁)’이라 할 때 삼인(三仁)은 삼인(三人)을 말하는 것이다. 『한서』 광무제기(光武帝紀) 20년조를 보면 “동이는 한국인이다(東夷韓國人).”라 하였다.
이와 같은 일련의 사실에서 고대 동방 한국인이 인도주의적 인간 중심 사상을 일찍부터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하여 ‘동방예의지국’이니 ‘군자국’이니 하는 칭호를 붙이게 된 것이다.
역리를 “멀리는 사물에서 취하며 가까이는 사람에게서 취하는 것(遠取諸物 近取諸身)”이라 할 수 있듯이, 인간 자신에서 취하고 있는 바, 이를테면 성이심(成以心)의 『인역(人易)』이라는 저술이 그런 예이다.
『주역』은 주나라 때에 형성된 역경이라지만, 그 형성 과정을 살펴보면 은(殷)왕조에 성행하던 갑골 복사(甲骨卜辭)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 신의 뜻에 의해 길흉을 판단하여 중대사를 결행하는 것이 같을 뿐만 아니라, 『주역』 효사(爻辭)에 나오는 문구나 사건들과 복사(卜辭)에 나오는 점(占)치는 문구나 사건이 동일한 것이 자주 보인다.
귀복(龜卜)과 시서(蓍筮)가 점치는 방식이 다르다 하더라도 인간의 의지로 좌우하지 않고 신탁(神託)을 따르는 것이 동일하다. 『홍범구주(洪範九疇)』를 보면 귀복과 서법(筮法)을 동시에 묻는 것으로 되어 있다. 『주역』은 서법의 고점법(古占法)을 계승한다.
이와 같이 『주역』과 은나라 때의 갑골 복사는 불가분의 관련이 있다. 갑골 복사는 은나라 무정(武丁) 이후의 것이 대부분으로서 귀갑(龜甲)이나 수골(獸骨)로 점치는 것이지만, 대개 귀갑에는 복사를 각(刻)하고 우골(牛骨)에는 사건을 기록한 것이 많다.
그러나 은의 무정 이전으로 소급해 올라가면 은민족의 기원이 동부에서 발전해 온 것임을 알 수 있다. 고고학적 발굴에 의하면 중국 산둥성 용산진(龍山鎭)과 양성진(兩城鎭)을 중심으로 요동 반도 하남(河南) 동부 일대에 퍼진 흑도 문화(黑陶文化) 유지(遺址) 중에는 복골(卜骨)이 발견되고 복귀(卜龜)는 발견되지 않는다고 한다.
갑골학자 호후선(胡厚宣)은 “오직 지하에서 발굴된 것과 고문헌에서 말한 바를 보면 동이 민족은 골복(骨卜)만을 쓰고 귀복은 절대로 쓰지 않는 것은 극히 주의할 만한 일이다.”라 하고, 또 “은 이전의 흑도시대에는 이미 점복(占卜)이 널리 알려졌으나, 모두 우골을 쓰고 절대로 귀(龜)는 쓰지 않았다.
은인(殷人)들이 동방의 흑도 문화를 계승함에 이르러 역시 점복을 취해 쓰는 대혁신을 가하였다. 그 뒤로 귀령(龜靈)의 관념이 생겼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보면 『주역』의 점법이 은의 귀복을 계승한 것이요, 은대의 귀복은 동방의 복골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태평어람(太平御覽)』에서도 동이족은 우골에 점을 쳤다는 기록이 있고, 『위지(魏志)』 동이전에 “부여(夫餘)사람들이 외부족과 전쟁을 해야 할 일이 생겼을 때에는 소를 잡아서 하늘에 제사를 드리고 그 소의 발굽을 보아 길흉을 점쳤는데, 그 발굽이 벌어지면 흉해 전쟁에 지게 되고, 합해지면 길해 전쟁에 승리한다.”고 한 것을 보면 인간의 지혜로 알기 어려운 중대사를 점의 방식을 통해 길흉을 판단한 것이다.
긍정적 길(吉)과 부정적 흉(凶)의 상대성은 음과 양의 상대적 형식인 양의(兩儀)로도 이해된다. 소 발굽이 벌어지면 흉하고, 합해지면 길하다고 한 것은 나누면 둘이 되고 합하면 하나가 된다는 뜻이며, 음양이 화합하면 길하고 음양이 불화하면 흉하다는 것을 의미한다.
여기에서 고대의 신비적 점술은 인간의 자주적 노력을 배제하고 단순히 숙명적인 복종만을 뜻하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사욕과 편견과 오만성을 버리고, 허심탄회하게 마음을 비우고 신명(神明)의 가르침을 받겠다는 진실무망(眞實無妄)한 순수성을 갖게 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음이나 양이 편벽되게 극단화하는 양극화 현상을 중도(中道)로서 화합함이 길하다는 피흉추길(避凶趨吉)의 인간적 노력을 요구하는 인도(人道)의 법칙을 암시하는 것으로 이해된다.
그리하여 분열과 화합의 길흉론(吉凶論)은 고대인의 세계관 · 인간관이라 할 수 있으며, 양극을 화합하는 ‘중(中)’사상이 고대로부터 존중되어 왔던 것이다. 복골이나 귀복이나 『주역』 육효(六爻)의 점법이 모두 극을 피하고 중을 취하는 원리이며 이론이다.
이 ‘중’사상은 갑골 복사에 있어서 이미 발견된다. 중상(中商)이라고 은왕조의 서울이자 나라인 상(商)을 중심으로 동토(東土) · 서토(西土) · 남토(南土) · 북토(北土)로 갈라서 점하는 복사가 여러 번 나오며, 또는 동방 · 서방 · 남방 · 북방이라 하여 사방(四方)의 예속국 또는 인국을 표현한 것은 중심과 주체를 같이 본 것이다.
이것이 후대에 ‘중국(中國)’이라는 칭호가 생기는 연원이며, ‘화하(華夏)’라는 용어도 주대(周代)부터 사용된 것이다.
음양 사상은 고대로부터 있었으나 오행 사상은 진한시대(秦漢時代)의 비교적 후기의 것이라 하는 것이 통설이다. 그러나 이 오행 사상의 근원은 은허 복사(殷虛卜辭)에 나오는 오방(五方) · 오토(五土) · 사방풍명(四方風名)에서 이미 있었음을 증명할 수 있다.
음양을 태음(太陰) · 태양(太陽) · 소음(少陰) · 소양(少陽)으로 나눌 수 있고, 이를 사방사유(四方四維), 팔방(八方)으로 나누어 8괘(卦)가 된다. 사상(四象)에 중심을 놓으면 오행이 되고 8괘에 중심을 놓으면 9궁(宮)이 된다. 따라서, 음양과 오행이 다를 바 없고 8괘와 9궁이 상통한다.
은나라의 중사상은 공간이나 시간 개념으로부터 사상적 중개념으로도 연역될 수 있는데, 요순(堯舜)의 ‘윤집궐중(允執厥中)’의 ‘중’이 바로 이것이다. 이 ‘중’은 후기에 와서 중용 내지 중화 사상(中和思想)으로 발전하였으며, 이 ‘중’은 천(天 : 上) · 지(地 : 下) · 인(人 : 中)에 있어 인에 해당한다. 중을 소중히 아는 것은 다름 아닌 인간 존중 사상이 되는 것이다.
다시 말해 한국 역학뿐 아니라, 한국 사상 전반이 인극 · 인간론을 중심으로 일관되게 발전한 것은 머리와 꼬리[首尾]가 상응하는 것이라 하겠다. 이 중은 주(主)와 인(人)의 뜻을 갖는 동시에 인간에 있어서는 마음이 중이고, 마음에서도 지극한 중심을 지칭하게 된다.
이 지극한 마음을 항성(恒性) · 본성(本性)으로 연역한 것이 송학(宋學)이다. 항성과 항심은 불변이며 불역이다. 물욕과 감정에 교폐(交蔽)된 산란한 방심(放心)을 본심으로 복귀하게 하는 것이 수행하는 것이요, 학문하는 도리라고 하였다.
역학에 있어, 흉화(凶禍)를 피하고 길복(吉福)을 얻는 길을 알아 그 길을 따르려는 것이 본지(本旨)라 한다면, 그것은 중도(中道)를 알아서 행하는 것이다.
이 중은 사물의 중과 인심의 중을 합하게 하는 길이나, 먼저 인심의 중을 얻어야 한다고 본다. 한국의 역학 사상은 고대의 신비적 신앙에서 발원해, 후기에 전래해 온 『주역』의 인문주의 사상과 융합, 한국 역학의 특질을 산출하게 되었다.
한국 고대 문화의 흔적 속에는 음양 사상이 내포되어 있음을 무수히 볼 수 있다. 역사적으로 한국은 음양이 불통불화(不通不和)해 천지부괘(天地否卦, ䷋)의 상(相)이 되지 않고, 음양이 상통상합(相通相合)하는 지천태괘(地天泰卦, ䷊)의 상이 되는 것을 이상으로 여겼으니, 소 발굽이 합하면 길(吉)이라 한 화합의 사상은 후기에도 일관되게 흘러 온 것이다.
고구려 광개토대왕비에는 음을 상징하는 거북과 양을 상징하는 용이 보인다. 거북과 용은 시조 동명왕(東明王)이 생사의 위급함에 처했을 때마다 돕는 역할을 하고 있다.
고구려 고분 벽화에 보이는 사신도(四神圖)에서 청룡(靑龍 : 東) · 백호(白虎 : 西) · 주작(朱雀 : 南) · 현무(玄武 : 北)의 수호신을 사상(四象)으로 나타내고, 중앙에는 죽은 이를 주인으로 안치함으로써 오행상(五行相)을 나타낸다. 특히, 북극(北極)은 부동(不動)의 중심이므로 북벽의 현무도는 그 자체가 음양을 화합한 형상으로 되어 있다.
이와 같이 화합한 상태가 다름 아닌 태극이다. 공간적 구조로는 화합이라 하지만 시간적 운용에 있어서는 영원을 의미한다. 함괘(咸卦)와 항괘(恒卦)가 화합과 구원(久遠)의 상을 보이듯이, 고분 벽화에는 학을 탄 사람과 용을 탄 사람의 그림이 있다. 이는 세상을 하직하고 타계로 가는 모습이다.
음 가운데 양이 있고 양 가운데 음이 있어, 단절되지 않고 영속하는 것은 죽은 자가 멸망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하는 것이며, 다시 환생한다는 영원불멸의 신앙이 있었으므로 죽은 자에 대한 제사와 조상 숭배의 관념이 있게 된다.
신라시대 태종무열왕 비(碑)의 형태를 보면 귀부(龜趺)에다 비신(碑身)을 세우고 위에는 용을 조각하였다. 여기에서 거북과 용이 음양을 상징하고 그 사이에 주인공의 행적을 기록한 비문(碑文)이 있는 것도 중(中 : 人)을 소중히 여기는 사유 방식이다.
조선조의 왕업을 기리는 <용비어천가>의 제1장에도 “해동육룡(海東六龍)이 ᄂᆞ르샤 일마다 천복(天福)이시니 고성(古聖)이 동부(同符)하시니.”라 하였다. 해동 육룡이 날아서 일마다 천복이라 한 것은 『주역』 건괘(乾卦) 단전(彖傳)에 나오는 바 “때로 육룡을 타고 하늘을 어거한다(時乘六龍以御天).”는 구절을 원용한 것이다.
신라 신문왕 2년에 준공한 감은사 지석(感恩寺址石)에서 태극 도형(太極圖形)이 새겨져 있음이 발견되었다. 이는 성리학이 한국에 전래되기보다 632년이나 앞선 것으로, 한국의 태극 사상은 그 연유가 오래된 것임을 알게 한다.
또한, 신문왕시대의 ‘만파식적(萬波息笛)’에 얽힌 일화는 한국적 정서를 담고 있다. 신문왕이 동해의 용에게 “바다 가운데의 산과 대나무가 혹 둘로 갈라지기도 하고 혹 합하기도 하는 것은 무슨 연고인가?”라고 물었을 때, 용이 답하기를 “이는 마치 한 손으로 치면 소리가 없고, 두 손으로 치면 소리가 있는 것과 같으니, 이 대나무의 물건됨이 합한 연후에 소리가 있는 것이다”고 하였다.
합한 뒤에야 소리가 있다 함은 골복(骨卜)에, 소 발굽이 합하면 길하고 벌어지면 흉하다는 뜻과 상통하는 것이며, 이것이 다름 아닌 중화(中和)의 태극 사상이라 하겠다. 태극 문양은 고려시대의 동경(銅鏡)이나 석등(石燈) 문양의 쌍룡 태극형(雙龍太極形) 등에서도 흔히 볼 수 있다.
고려시대 호부상서 허재(許載)의 석관(石棺)에도 쌍봉 태극(雙鳳太極)이 완연하게 보인다. 이와 같이 태극 음양 사상은 한민족의 신앙과 민족 예술 또는 윤리관의 형성 과정에 있어서 지대한 영향을 미쳤을 뿐 아니라, 정치 제도와 관제(官制), 그리고 군제(軍制)에 이르기까지 태극 · 음양 · 오행 사상은 사고 유형의 기반을 이루고 있다.
삼국시대에 오부오방제(五部五方制)로 군현(郡縣)을 나눈 것이라든지, 문무 · 양반으로 관제를 가른 것이라든지, 도시 설계의 원칙이나 건축에서 사대문(四大門)을 설치하고 정부 청사를 중심에 둔 것이라든지, 종묘와 사직을 왕궁의 좌 · 우에 설치한 것이라든지, 문묘(文廟)에서 동서에 재(齋)와 무(撫)를 짓는 것이라든지, 조선조의 아악(雅樂)이 오성(五聲 : 宮 · 商 · 角 · 徵 · 羽)과 육률육려(六律六呂)로 구성된 것이라든지, 심지어 관혼상제의 모든 예속이 음양법으로 구성되어 있는 것 등은 역리가 한국 문화 전반에 암암리에 침투되어 있는 증거라 하겠다.
그러나 민족 문화 창달에 역리가 크게 활용된 뚜렷한 사례들을 골라 본다면, 첫째로, 훈민정음의 창제를 일컬을 수 있겠다. 『훈민정음해례』의 제자해(制字解)에는, “천지지도(天地之道)는 일음양오행(一陰陽五行)뿐이라.” 했으니, 훈민정음의 구조 원리가 역리를 바탕으로 한 것을 알 수 있다.
특히, 정음(正音)의 초성(初聲 : 子音)과 중성(中聲 : 母音)의 구조가 오행의 원리와 태극 · 양의 · 사상 · 팔괘로 이루어진 것에 대해서는 각별한 주의와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훈민정음은 무리한 인위적 조작으로 된 것이 아니라, 천지자연의 이법에 근거해 천지자연의 성음(聲音)을 따라서 천지자연의 문(文)을 지은 것이라 하였다.
둘째로, 이제마의 『동의수세보원(東醫壽世保元)』에 보이는 사상의학을 들 수 있다. 지금까지 한의와 양의를 막론하고 질병을 치료함에 있어 병리(病理)와 약리(藥理)에 치료의 주안목을 두었다. 하지만, 이제마의 사상의학에서는 같은 병에 같은 약을 쓰더라도 치료가 되는 것도 있고 되지 않는 것도 있다고 한다.
그 이유는 환자의 체질의 유형이 다르기 때문이다. 사람의 체질을 사상, 즉 태음인 · 태양인 · 소음인 · 소양인으로 구별, 그 체질에 따라 알맞은 약을 써야 하며, 음식도 체질에 맞도록 가려야 한다고 하였다.
이것은 의학사에 있어서 획기적 창안이라 하겠으며, 태극 · 음양 · 사상 · 팔괘의 역리를 의약 방면의 자연과학으로 활용한 것이라고 하겠다.
셋째로, 한국의 국기를 태극기로 정한 사실이다. 국기는 국가와 민족을 상징하는 숭고하고 신성한 표지(標識)다. 태극이라는 용어는 『주역』에 나오는 말이지만, 『주역』 본문에 태극 도형이 그려져 있는 것은 아니다. 송나라의 주돈이(周敦頤)가 태극도를 그린 바 있지만, 한국에 있어서는 삼국시대와 고려시대를 통해 태극 문양이 산재함을 볼 수 있다.
태극기는 백색 바탕의 중심에 태극 · 양의가 있고, 건곤감리(乾坤坎離)의 사괘(四卦)가 사유(四維)에 배치되어 있다. 여기에서 백색 바탕은 한민족이 고대로부터 백색을 숭상한 순수성과 민족적 동질감을 표상하고, 일원상(一圓相)의 태극은 우주만상의 근원이요, 인간 생명의 원천으로서 영구불멸의 진리를 뜻한다.
건곤감리는 사상으로서 동서남북 사방의 광대무변함과 춘하추동 사시(四時)의 영허(盈虛)와 소장(消長)을 상징해 진리의 영원무궁함을 나타내고 있다. 이와 같이 태극기로서 제작된 한국의 국기는 한민족의 역사와 이념과 역리가 융합되어 표현된 것임을 볼 수 있다.
한국의 역학 사상은 각 시대와 학자에 따라 그 학설이 다르게 나타난다. 보는 이의 입장과 견해에 따라서 역리를 이해한 그 나름의 세계가 있었기 때문이다.
주희(朱熹)가 정이(程頤)의 학문을 계승한다 할지라도 주자의 『주역본의(周易本義)』와 정이의 『역전(易傳)』은 동일하지가 않음과 같다.
한국의 역대 역학자들도 그들의 논지가 각각 다름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성격을 분류하면 대체로 두 가지 방향으로 나누어 볼 수 있을 것이다. 그 하나는 향외적(向外的)으로 관심을 가지는 역학자들이요, 다른 하나는 향내적(向內的)인 경우이다.
향외적으로 관심을 갖는다 함은 현실의 사태를 정확히 파악하고 그 변동의 양상을 예견해 이에 대처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질 때 역을 배우는 본의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예컨대, 김시습(金時習)은 “역은 변역(變易)이다. 그 변함을 관찰해 시의(時宜)를 살피는 것이니, ‘시(時)’의 한 자(字)는 역의 요령이며, ‘의(義)’의 한 자는 역의 총설(總說)이다.”라 하였다. 이와 같이 역을 배워 현실을 능동적으로 대처할 수 있는 것이 역의 기능이라고 보는 입장이다.
이와 반대로, 향내적으로 문제삼는 학파들은 감응지리(感應之理)를 역도(易道)라고 본다. 감응하는 길은 오직 성(誠)과 신(信)에서 이루어지고, 성신이 없으면 천인지제(天人之際)와 응인접물(應人接物)에 있어 막히고 떨어져 어긋나게 된다는 견해이다.
그러므로 주체적으로 지성(至誠) · 독실(篤實)하며 윤리적으로 지선(至善)하고, 종교적으로 신성해야 역리가 통한다고 보는 것이다.
조선 영조 때의 양명학자인 정제두(鄭齊斗)는 “대개 성(誠)이란 둘이 되지 않으며, 그치지도 않는 것이며, 가려질 수도 없는 것이다. 그것은 감응해 통하는 도(道)다”라고 해 감통(感通)의 원리로서의 성(誠)을 높였다.
그리고 근대 한국의 유학자 이병헌(李炳憲)은 관괘(觀卦)의 단전에 “성인이 신도로써 설교하니 천하가 복종한다(聖人以神道說敎而天下服矣).”라고 한 데 대해, 여기에서 ‘교(敎)’자는 범연히 볼 수 없고, 또 성인이라 함은 평범한 칭호가 아니니, 신도(神道)를 설교하는 성인이 구세의 교주(敎主)가 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하였다.
그러나 향외적으로 관심을 갖고 대상적 사물의 본질과 천지자연의 변화를 탐구했던 역학자들 가운데서 서경덕은 태허(太虛)의 담연무형(淡然無形)함을 일러 선천(先天)이라 하였다.
그리고 하나의 기[一氣]가 나누어 음양이 되고 양기(陽氣)가 극하여 하늘[天]이 되며, 음기취극(陰氣聚極)해 땅[地]이 되며, 양이 고극(鼓極)해 결정(結精)한 것이 일(日)이 되고, 음이 취극(聚極)해 결정한 것이 월(月)이 되고, 여정(餘精)이 흩어져 성신(星辰)이 되며, 땅에 있어서는 물과 불이 되는 것이니 이를 일러 후천(後天)이라 하였다.
서경덕의 기철학을 가장 잘 이해한 학자는 이이(李珥)다. 서경덕은 그 선후천관(先後天觀)에서 ‘이 천지(此天地)’가 멸(滅)한 뒤에는 후천지가 생긴다고 말했는데, 이이는 더 나아가 후천지의 도수(度數)가 반드시 365와 4분의 1일이라고 만은 할 수는 없음을 확언하였다.
그러나 이이 역시 화담 철학을 전반적으로 반성할 때에는 그것이 기 일변(氣一邊)에 치우쳐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이는 이(理)의 근원도 하나[一]이고, 기의 근원도 하나라고 하였으며, ‘이기지묘’는 보기도 어렵거니와 말하기도 어려운 것이라고 하였다.
화담 철학에서 알기 어려운 것은 ‘태허의 기’에 있고, 퇴계 철학에서 알기 어려운 것은 ‘태극의 이’에 있다. 그러나 율곡 철학의 어려운 점은 ‘이기지묘’에 있음을 주의할 필요가 있다.
앞에서 한국 역학을 향외 · 향내로 대별해 논했는데, 이이는 체(體)와 용(用), 현(顯)과 미(微), 본(本)과 말(末), 그리고 격치(格致)와 성정(誠正) 등, 향내와 향외의 양면이 융합되어야 함을 강조하였다.
이와 같은 견해는 비록 그것이 16세기의 한국 철학임에도 불구하고, 현대 철학의 입장에서 조명해 볼 때 매우 중요한 시사와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
한편, 한국 역학을 미래 전망적으로 살펴볼 때 종전의 역학 사상과 다른 획기적인 차원이 개창(開創)되었음을 볼 수 있는데, 다름 아닌 『정역』의 출현이다.
과거의 전근대적 봉건 사회로부터 근대 사회로 변화돼 감에 따라 종래의 가치관과 철학 사상은 어떻게 전환할 것인가 하는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 이와 관련해 한국의 역학은 단편적 지식이 아니라, 가장 근본적이고 포괄적 원리를 제시했다 하겠다.
김항이 완성한 『정역』은 현대와 미래를 전망할 수 있는 포괄적이고 근본적인 원리를 제시하였다. 『정역』에서는 ‘천도(天道)’로서의 자연의 변화와 ‘인사(人事)’로서의 인간의 변화를 예견하고 인류 역사의 새로운 방향을 열어 놓았다.
앞에서 본 바와 같이 천지변화에 대해서는 서경덕이 후천지의 탄생 가능성을 논하고, 이이가 후천지의 도수가 365와 4분의 1일이 아니라고까지 말한 바 있다.
그런데 『정역』에서는 360일의 정력(正曆)이 도래한다고 언명하였다. 그리고 천지 도수가 360일이 될 때에는 기후가 변화해 혹한과 혹서가 완화되고, 춘분 · 추분이 같아지며 조석(潮汐)의 변화와 더불어 수륙(水陸)의 변동이 온다고 하였다.
이러한 천도 변화에 따르는 인간 사회의 변혁에 대해서 『정역』은, 첫째로 봉건 제도에서처럼 군주가 만민을 지배한다든지, 가부장 제도에서와 같은 상하의 예속 관계가 아니라, 인권과 자유가 보장된 ‘개인의 완성’을 말하고 있다.
둘째로 이와 같은 인간의 변화는 상호간에 애호해 인권을 존중하고 형평의 원리가 작용하는 세계를 구성한다는 것이다. 셋째로 『정역』에서는 종래와 같이 ‘억음존양(抑陰尊陽)’하는 남존여비가 아니라, ‘조양율음(調陽律陰)’으로서의 남녀평등을 명시하였다. 넷째로 다양한 종교를 ‘일도(一道)’라고 일컬어 종교간의 대립과 분열을 지양하는 원리를 제시하였다.
그런데 이와 같은 『정역』의 진리는 일조일석에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동방의 유구한 도학(道學)의 연원을 계승해 이룩된 것임을 『정역』의 첫머리에 있는 <십오일언 十五一言>에서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