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1년 충청남도 무형문화재(현, 무형유산)로 지정되었다. 본디 계룡시 두마면 왕대리에서 오래 전에 시작되어 연산 장터로까지 확대되어 행해지다가 일제 때 단절된 것을 최근 연산 쪽에서 재현하여 계승하고 있다.
칠월 칠석을 전후하여 인근 여러 마을들이 동참하여 기세배를 하고 풍장솜씨를 마음껏 펼치며 노는 합동풍물놀이이다. 이 놀이는 조선 초기 좌의정을 지낸 김국광(金國光)의 묘를 두마면 왕대리 재실말에 쓰면서 두레패를 동원한 데에서, 혹은 여러 사람이 이 묘터를 밟아주어야 좋다는 풍수설에 의해 처음 시작되었다는 설이 있다.
확실한 유래는 알 수 없지만, 이 놀이가 이 지역 광산 김씨의 영향력에 의해 주도되고 발전되어왔음은 분명해 보인다. 이로 인해 왕대리는 이 놀이에서 우두머리 마을인 도좌상(都座上)을 변함없이 지켜와, 이 마을에 기인사를 하러 온 마을 수가 보통 12개, 많게는 27개 마을에까지 달했다고 한다.
이들 중에는 두마면 외의 마을까지 포함되어 있음에서 도좌상마을의 권위와 위세를 짐작할 수 있다. 참여 마을이 대규모인 만큼 놀이 당일에는 먼 곳에서까지 구경을 올 정도로 큰 성황을 이루었는데, 근대 무렵부터 지역 유력인사의 후원으로 이러한 연합대동놀이 분위기가 연산으로까지 확산되었으며, 1940년대 초부터 단절되었던 것을 1989년에 연산에서 부활시켜 전승이 이어지게 되었다.
여기에 소요되는 음식비용은 도좌상마을의 부농과 광산 김씨 유지들이 다 부담해왔다. 현재 재현된 연산백중놀이의 내용은 본디 전승되던 것을 공연효과를 고려하여 약간 다듬어 정리한 것으로, ① 길놀이 마당, ② 기싸움 마당, ③ 기세배 마당, ④ 농신제 마당, ⑤ 상벌과 머슴놀이 마당, ⑥ 뒤풀이 마당 등 여섯 마당으로 구성되어 있다.
이 놀이는 특정 토반(土班:붙박이 양반)의 영향력과 반촌(班村양반이 많이 사는 동네)적 전통에 의해 지배 · 주도되었으며 참여 마을의 수가 아주 대규모였다는 점에서 예사 백중놀이나 칠석합두레풍장놀이와 차이점이 있다. 1990년 10월 전국민속예술경연대회에서 국무총리상을 받았고, 1991년 무형문화재로 지정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