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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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인물
  • 고려 후기
고려후기 제32대 우왕의 제2왕비.
인물/전통 인물
  • 본관창원(昌原)
  • 사망 연도미상
  • 성별여성
  • 주요 관직고려 우왕의 제2비
  • 출생 연도미상
  • 출생지철원
집필 및 수정
  • 집필 1995년
  • 정용숙 (부산대학교, 한국사)
  • 최종수정 2023년 02월 07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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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고려후기 제32대 우왕의 제2왕비.

개설

성은 최씨(崔氏), 본관은 창원(昌原: 지금의 철원)이다. 철원사람이며, 아버지는 문하시중 최영(崔瑩)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우왕이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인 시기는 1388년(우왕 14) 3월이었는데 이때는 최영이 우왕을 옹립한 이인임(李仁任)과 그 일파를 정계에서 축출하고 명실상부한 일인집권체제(一人執權體制)를 구축,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장악하고 있던 시기였다.

그러므로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최영은 그 딸이 정실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왕비의 자격이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후 우왕은 최영의 집에 자주 내왕하게 되었는데, 이는 최영과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우왕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비(寧妃)의 혼인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6월,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을 감금·처형했기 때문이다.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될 때 영비도 함께 따라갔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은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곧이어 처형됨으로써 영비의 위치 또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훈과 추모

우왕과 창왕(昌王)은 신돈(辛旽) 의 후손이라 하여 위조(僞朝: 정통을 이어받지 않은 조정)로 폄하됨에 따라 우왕은 반역열전(叛逆列傳)에 수록되고 왕비(王妃)들은 『고려사』 후비전(后妃傳)에 입전되지 못하였다.

참고문헌

  • - 『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 『고려시대의 후비』(정용숙, 민음사, 1992)

  • - 「고려 우왕대의 정치권력의 성격과 그 추이」(박천식, 『전북사학』4,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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