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의
고려후기 제32대 우왕의 제2왕비.
개설
생애 및 활동사항
그러므로 우왕은 최영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이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하였다. 최영은 그 딸이 정실소생이 아니기 때문에 왕비의 자격이 없다고 반대하였으나 우왕의 간곡한 설득에 못 이겨 왕비로 들여보냈다. 이후 우왕은 최영의 집에 자주 내왕하게 되었는데, 이는 최영과의 소원한 관계를 개선하려는 우왕의 강한 의지가 반영된 것이었다.
그러나 영비(寧妃)의 혼인생활은 오래가지 못하였다. 3개월 후인 같은 해 6월, 이성계(李成桂)가 위화도(威化島)에서 회군하여 우왕을 축출하고 최영을 감금·처형했기 때문이다. 우왕이 강화도에 유배될 때 영비도 함께 따라갔다. 이듬해 공양왕이 즉위한 뒤 우왕은 폐서인(廢庶人)이 되고, 곧이어 처형됨으로써 영비의 위치 또한 몰락하지 않을 수 없었다.
상훈과 추모
참고문헌
- 『고려사(高麗史)』
-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 『고려시대의 후비』(정용숙, 민음사, 1992)
- 「고려 우왕대의 정치권력의 성격과 그 추이」(박천식, 『전북사학』4, 19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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