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교육(art education)은 예능교육이라 부르는 경우도 있으나, 같은 의미는 아니다.
후자의 개념은 주로 어떤 기예에 뛰어난 재능이라는 측면, 즉 기예 측면을 강조하는 개념이기 때문에 현대적 의미를 지닌 예술교육의 정신과는 다를 뿐만 아니라 예술교육의 일부에 지나지 않는다.
예술은 그 자체가 내포한 과정으로서의 복잡성과 다양성 때문에 한마디로 정의를 내리는 것은 위험한 일이며, 비트겐슈타인(Wittgenstein,L.) 같은 학자는 정의 그 자체의 가능성을 부정하기도 한다. 그러므로 예술에 대한 정의는 역사적으로도 그렇고, 현재에도 미학의 이론들 사이에서 각기 다르게 정의되고 있다.
유교에서 예술은 ‘조화’로 설명되며, 군자를 양성하는 데도 시와 음악·회화·가무 등이 중요시되었다. 인간의 의지와 정서를 바로잡아 조화로운 전인을 만드는 것의 기초로 예술을 파악한 예가 공자나 왕양명(王陽明)의 예술론에 나타나고 있다. 그런가 하면 예술 자체를 미학적인 이론으로 정리한 서양 미학이론에도 다양하게 나타나고 있다.
예컨대, 마르탱(Martain,J.)은 ‘지성의 표현’이라고 했는가 하면, 산타야나(Santayana,G.)는 ‘기쁨’, 베르그송(Bergson,H.)은 ‘통찰’, 프로이트(Freud,S.)는 ‘욕구’ 또는 ‘무의식’, 톨스토이(Tolstoi,L.N.)는 ‘정서’, 듀이(Dewey,J.)는 ‘경험의 표현’이라고 각각 정의하고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예술의 정의를 통하여 공통되는 것은, 과학과는 달리 인간의 주관적인 내부의식의 표현이라는 점과 감성으로 표현되는 특수한 의식을 내포한다는 점이다.
예술교육과 관계 있는 것은, 단순히 예술의 창조를 통한 작품의 산출이나 표현뿐만 아니라 예술적 경험과 감상, 그것을 통하여 감지되는 예술적 인식, 예술내용의 형식문제 등이다.
따라서 예술교육의 목적은 이러한 예술의 정의 및 과정·결과 등과 깊이 관련해서만 이해될 수 있다. 구체적으로는 시대와 사회, 또는 이론에 따라 달리 전개될 수 있으나 그 공통적인 목적은 다음과 같이 설명할 수 있다. 예술적 인식의 성격은 본질적으로 가치와 밀접하게 관계되어 있기 때문에, 가치교육과 도덕교육의 기초로서 의미를 갖는 것이다.
그러므로 예술교육이 전체 교육, 즉 인간 형성이라는 목표 속에서 차지하는 목적은, 예술이 갖는 창조·감상·향수(享受)를 통하여 감각능력이나 활동능력을 기르며, 또한 예술만이 갖는 독특한 의미와 경험을 통하여 정서와 감성을 계발·세련시키고, 나아가서는 도덕성 함양에 이바지하며, 세련된 즐거움의 태도와 기호를 기름으로써 인격의 기초를 형성하는 데 있다고 할 것이다.
예술교육의 형태는 예술적 경험을 유발하는 매체에 따라 미술·음악·문학·연극·서예·무용 등의 교육으로 구별할 수 있다. 이러한 제 영역에 걸친 교육의 형태는 다음 세 가지 유형으로 분류할 수 있다.
① 예술감상을 위한 교육, ② 예술의 창조, 즉 작품을 통한 예술적 표현의 교육, ③ 악기를 연주하거나 노래를 부르고 그림을 그리는 등의 예술적 활동이 그것이다.
예술교육에서는 이들 세 가지 유형이 모두 중요하지만, 공통적인 의미의 교육의 중요성은 미적인 감지력을 통한 미학적 지각력을 기르는 데 있다. 그리고 미학적 지각력에 대한 교육은, 인간의 전체적인 인식과정 속에서 기본적인 지각 교육과 깊이 관련하여 설명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단순한 기예를 의미하는 ‘예능’이라는 개념으로 파악한다면, 축소된 의미가 될 뿐만 아니라 교육 속에서 예술교육의 위치와 의미를 폭넓게 이해하는데 방해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적 예술 개념에서 파악되는 예술교육은, 이러한 한정된 의미의 영역만을 다루는 것이 아니라 예술적 형태의 교육에 대한 관심도 포함한다. 즉, 그 자체는 예술이 아닌 교과라고 하더라도 가르치는 과정이 예술적이어야 한다는 관점이며, 오늘날 예술교육은 그러한 측면의 예술성 개념까지도 포함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예술의 역사와 예술교육의 역사는 다른 것이므로, 그 역사적 흐름의 시기를 어떻게 구분해야 하는가에 대한 문제도 다를 수밖에 없다. 우리 나라 예술교육의 역사는 관점에 따라 다르지만 크게 다음과 같이 구분할 수 있다.
① 고대에서 개화기 이전까지의 예술교육, ② 개화기 이후부터 일제강점기까지의 예술교육, ③ 광복 후부터 현재까지의 예술교육으로 시기를 나눌 수 있다.
고대에서 개화기 근대식 교육이 이루어지기 전까지의 교육은 학교교육이 대중화되지 못하였고, 정규 교육은 유교식 한문 중심의 교육이었으므로, 이 시기의 예술교육은 두 가지 차원에서 논할 필요가 있다. 즉, 형식 교육 속에서의 예술교육의 흐름과 비형식 교육 속에서의 예술교육의 상황이다.
형식 교육기관이나 제도는 고구려의 태학과 경당에서부터 신라의 화랑제도, 통일신라의 국학, 고려의 국자감·사학·향교·서당, 그리고 조선의 성균관·사학·향교·서원·서당 등이 있다. 이러한 형식 교육에서 차지하는 예술교육의 위치와 성격은 다음과 같이 요약할 수 있다.
우선, 우리 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학교교육인 태학에서 실시했던 귀족적 관리 양성을 위한 교육내용과, 그 당시 병존하고 있던 최초의 민간 교육기관인 경당의 교육내용은 각각 다른 수준이기는 하지만 5경3사(五經三史)를 포함하고 있었으며, 그 중에서 예술적인 내용과 직접적으로 관계된 것은 『시경(詩經)』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시경』은 중국 은나라에서 춘추시대까지의 시집이며, 우리 나라에서는 『시전(詩傳)』·『모시(毛詩)』·『시(詩)』라고도 하였다. 이것은 옛날부터 전해 오는 3,000여 편의 고시 중에서 공자가 추려 낸 311편의 시로, 고구려를 비롯한 삼국뿐만 아니라 조선 말기 이전까지 중요한 교육내용이 되었다. 여기에서의 시는 고대의 많은 나라들에서 흔히 볼 수 있는 것과 같이, 음악과 분리된 것이 아니었다.
『시경』은 풍(風)·아(雅)·송(頌)의 3부로 되어 있는데, 풍은 황하 유역 15개국의 민요이고, 아는 주나라의 조정에서 부르던 노래였으며, 송은 종묘의 제사 때 부르던 것으로 춤이 동반되는 것이었다. 이러한 『시경』의 내용은 우리 나라의 고대문학과 전통문학에 끼친 영향이 크다.
백제에는 학교에 관한 기록은 없으나 오경박사가 있었던 것으로 미루어 보아, 『시경』의 중요성은 마찬가지였던 것으로 짐작된다. 신라 화랑제도의 교육과정 중에도 오경의 일부로 『시경』이 포함되었음은 물론 노래와 풍류·시가, 신라의 향가 등을 통한 정서 도야가 교육에서 중요한 몫을 차지하고 있었다.
통일신라 국학의 교육내용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찾아볼 수 있다. 주요 교과목으로 역시 구경(九經)을 포함하고 있는데, 구경 속에는 『시경』 이외에 『악경(樂經)』도 포함되어 있었다. 『악경』은 『시경』과 같이 음악과 밀접하게 관련된 것으로, 기풍과 정서를 도야하기 위한 교과였다.
또한 삼국시대 이후 중요한 필독서로 양나라의 소통(蕭統), 진나라와 한나라의 시문을 엮어서 만든 『문선(文選)』이 있는데, 이는 단순히 한문이나 문장력뿐만 아니라 정서도야를 통한 인격을 함양하는 데 큰 목적을 가지고 있었다.
이와 같은 『시경』·『악경』·『문선』 등의 강조를 통한 한문학 또는 시문학적 교육은 고려시대 관리 양성교육을 하던 모든 교육기관에서도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통일신라 말기의 독서출신과에서 시작된 고려의 과거제도에서는 시문학이 상당한 비중을 차지하게 된 것이다.
조선시대에 이르면 예술적인 측면, 그 중에서도 시문학적인 측면이 더욱 강조되며, 이와 더불어 서법까지 강조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예컨대, 성균관의 교육내용은 독서·제술·서법의 세 가지 영역으로 되어 있는데, 각 영역이 모두 예술교육 측면을 포함하고 있다는 점이 특기할 만하다. 강독에는 사서오경 중에서 『시경』이 포함되어 있고, 제술은 시나 글을 짓는 것이며, 서법은 예술로서의 서예이기 때문이다.
다른 교육기관도 모두 이러한 성균관의 교육내용을 준비하기 위한 것이거나, 수준의 차이는 있었지만 대동소이한 것이었다. 서당이나 서원에서도 교육의 중심은 한문학이었으며, 문학적인 것은 『시경』·『악경』·『문선』 이외에도 『명심보감』 등이 있었다.
이와 같이 나타난 삼국시대부터 근세 조선까지의 교육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를 분석해 보면 다음과 같다. 첫째, 치인(治人) 또는 통치계급에 대한 관리교육의 일부로 예술 중에서 시문학과 서예가 가장 중요시되었으며, 이와 연결된 일부분의 음악이 강조되었다는 점이다. 둘째, 이러한 부문의 예술이 중요시된 이유는, 그것이 인격교육의 중추라고 생각되었기 때문이라는 점이다.
그러나 현재 우리가 민족문화의 일부로 자랑하는 많은 부분의 미술작품이나 민속음악·궁중음악·판소리 등과 같은 음악은 형식 교육기관의 교육내용만은 아니었으며, 몇 가지 예외를 제외하고는 중인 계층이나 양인 출신의 사람들에게 속하는 것이었다.
예컨대, 근세 조선의 10학(十學) 속에는 화학(畫學)·악학(樂學)이 있었는데, 이를 위한 정식 학교는 없었고 소관 관아에서 나라에 필요한 그 방면의 일꾼을 길러서 썼다.
고대로부터 근대화 이전의 우리 나라 음악이나 그림, 문학이 전부 학교의 형식 교육이나 관아의 훈련에 의해서만 교육되었던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민속으로서 개인적 전수과정에 의해 존속되어 온 것이 대부분이다.
삼국시대 이전부터 진한과 변한에는 현악기가 있었고,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 의하면, 노래와 춤이 혼합되어 하늘을 섬기는 악속(樂俗)이 있었으며, 안악(安岳) 고분에 나타난 벽화에도 그 당시의 무악도(舞樂圖)나 여러 가지 악기를 가진 악대의 행렬도가 남아 있다. 삼국시대에도 향악과 산대도감놀이 등 여러 가지 악속이 있었으며, 당시 백제의 음악은 일본에 전파되어 많은 영향을 끼쳤다.
통일신라 때는 당악이 전래되어 왔고, 불교음악인 범패(梵唄) 등이 있었다. 특히 고대부터 전래하는 한국 고유의 음악인 향악에는, 이를 위한 향악곡의 가사와 악보, 향악기가 있었음을 『고려사』가 전하고 있다.
그 밖에도 민속악으로 조선시대 이후에는 판소리·잡가·사당계의 음악, 시나위와 산조·매굿(농악) 등이 있었으며, 이것 또한 춤과 분리된 것은 아니었다.
이들은 음악과 춤의 개괄적인 흐름 속에서 다음과 같이 그 교육적 현상을 정리할 수 있다. 즉, 이 시기의 예술교육 형태는 사회계층의 문제와 밀접하게 관련되어 있으며, 주로 상류층의 시문학과 서예는 학교교육에서 중요시되었다.
한편, 수묵화 이외에 궁중에서 필요한 그림과 음악은 소관 관아에 소속되어 훈련하였다. 그리고 평민의 음악이나 노래·춤 등은 주로 전수과정을 거쳐 훈련하는 도제식교육으로 행해지거나, 개인 교습에 의해 이루어졌다.
그러나 사회문화적 시문학과 수묵화 이외의 예술, 즉 노래와 민속에 깃들인 여러 가지 연극·춤·그림 등에 종사하는 사람을 환장이·악공 또는 광대라 하여 천시하였다는 사실은 우리 문화의 비형식적인 교육, 특히 민중교육 속에서 예술이 차지하는 위치의 다른 측면을 의미한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조선 말기 개항과 함께 전개된 갑오경장은 근대식 학제를 제도화함으로써 교육제도에 큰 변화를 가져오는 계기가 되었다. 따라서 외국 문화의 수입과 도전으로 인하여 전체적인 교육내용뿐만 아니라 예술교육의 내용에도 큰 변화를 낳게 하였는데, 이 시기도 다음의 세 단계로 나누어 볼 수 있다.
① 갑오경장에서 을사보호조약까지의 근대 학교가 시작되던 시기(1894∼1905), ② 통감부시대(1905∼1910), ③ 일제강점기의 교육시대이다. 이 시기까지 학제와 교육과정이 바뀌었으며, 그 구체적인 내용은 각급 학교의 수준마다 달랐으나 특성은 다음과 같이 요약될 수 있다.
가장 특기할 만한 사실은 이 시기에는 서양 음악과 서양화, 서양식 체조와 무용 등이 도입되어 교육과정에 영향을 주었다는 사실이다.
우리 나라 교육의 근대화는 기독교 선교사의 영향과 일본의 정치적 압력, 그리고 개항의 도전과 더불어 시작되었기 때문에 예술교육도 일본을 통해서 수입된 일본식 서구 문화와 선교사를 통해서 들어온 서구 문화의 영향을 가장 많이 받았다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의 초·중등 교육과정에 도입된 예술 계통의 교과목은 창가·도화·체조·습자·수공(수예) 등이다.
그러나 이들 과목은 언제나 필수과목이었던 것은 아니며, 사정에 따라서 줄일 수도 있고 생략해도 좋은 과목으로 취급되었다. 예컨대, 1916년 도화와 창가를 뺄 수 있도록 교육과정을 고친 점 등이 그것이다.
그리고 이 때부터의 음악은 창가라는 이름에서도 볼 수 있듯이, 서양 음악을 우리말이나 일본어 가사로 고쳐 사용하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이러한 현상은 공립·사립에 공통된 것으로, 이때부터 예술 분야에서도 근대화의 개념과 서구화의 개념이 혼동되어 사용되기 시작하였다. 왜냐하면, 국악은 교과목에서 거의 사라졌으며, 도화에도 서양화가 압도적으로 많이 도입되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예술교육의 서구화 현상은 교과목에서만 나타난 것이 아니라 학생복을 비롯한 교가, 학교의 의식과 분위기, 건물양식 등 모든 미학적인 측면에서 점차 서구화·일본화되는 풍조를 나타냈다.
특히, 상당한 비율을 차지하고 있던 기독교 학교에서의 서구화는 더욱 심하여 국악을 이방 음악이라고 불렀으며, 결혼식·장례식을 중심으로 한 모든 의식도 전통적인 것은 이방의 것이라고 불렀다.
이것은 우리 나라의 청소년들로 하여금 자국의 예술에 대하여 흥미를 잃고 가치를 부여할 수 없게 만든, 현재까지의 결과를 가져온 원인의 시초였다고 할 수 있다.
예술교육과정 속에서 전통이 계승된 면이 있었다면, 전적으로 예술이라고만은 할 수 없으나 습자와 작문을 통한 예술교육이 있었다. 그러나 조선시대의 제술과 서법에 비하면, 많이 약화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음악과 미술을 포함한 교과가 전체 교육과정 내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지 못하였으며, 인격교육의 중요한 내용으로 충분한 인정은 받지 못했다 하더라도, 그들이 형식 교육의 과정 속에 등장했다는 점과 음악과 그림 등에 직접 참여하는 일의 가치가 조선시대보다 높아진 것만은 높이 평가할 만한 사실이라고 하겠다.
광복 후의 교육은 일제하의 교육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신교육사상을 배경으로 출발하였다. 그 구체적인 교육내용의 하나인 예술 분야의 교육도 많은 변화를 겪었다. 예술과 관련된 교육 분야를 국어(문학)·미술·음악의 세 분야로 나누어 간단히 요약하고자 한다.
일제하의 교육은 국어 자체가 억압되고 심지어 완전히 폐지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기 때문에 학교교육 속에서 한국 문학은 물론, 국어교육은 거의 황폐화되었다. 그 뒤 광복과 더불어 국어교육이 부활되었으며, 현재까지 세 번의 개정을 거쳐 변천해 왔다.
그러나 광복 후 20∼30년 동안의 국어교육은 주로 한글 보급과 전용에 관한 문제를 중심으로 하는 언어기능, 언어지식 이해에 관한 문제에 치중해 왔으며, 예술로서의 기능은 부수적인 위치를 차지해 온 것이 교육과정 목표나 수업지도의 실제에서 압도적인 현상이었다.
그것은 시·수필 기타 문학형식의 글이 교과서에 도입되지 않았다는 뜻이 아니라, 그러한 내용이 예술적 경험으로 교수되기보다 어문 매체로서의 성격이 더 강조되어 왔다는 뜻이다.
그러다가 1973∼1974년에 이루어진 제2차 교육과정 개정 때는 개정의 목표에 따라 민족문화를 애호하고 가치관을 새로이 확립하는 국어교육을 더욱 심화하기 위하여, 내용 선정을 어문 중심에서 가치관 형성 중심으로 이루어지도록 하였다.
이 점은 제3차 교육과정 개정에서도 계속 반영된 내용이기는 하지만, 국어교육이 얼마만큼 예술교육적인 측면을 포함하는가의 문제는, 그것이 어떻게 예술적 경험을 일으키도록 가르치는가 하는 교수방법에 달려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할 것이다.
광복 후 음악교육과 미술교육의 커다란 변화 가운데 하나는 일제하의 모방주의 예술교육에서 교육방법과 내용의 다양화로 진전되었다는 것을 들 수 있다.
이전의 미술교육에서는 교과서에 실려 있는 평범한 작품을 보고 그것을 본떠서 그리는 방법으로 회화의 표현기능을 기르는 것이었고, 공작내용도 초등학교에서는 주로 종이접기나 실과 공예적인 영역에 걸친 획일적인 기법을 습득시키는 것이 고작이었다.
광복 후 얼마 동안은 그러한 경향을 완전히 벗어나지 못하였으나, 신교육사조의 물결에 의하여 미술교육도 자유화·개성화되었으며, 그 내용도 다음의 여섯 가지 영역을 포함하기에 이르렀다.
① 지식으로 흡수되는 내용, ② 조형감각을 기르는 내용, ③ 조형적 사고력을 기르는 내용, ④ 재료와 경험을 풍부히 하는 내용, ⑤ 조형적 표현력(기능)을 높이는 내용, ⑥ 감상력을 기르는 내용 등으로 다양화되어 온 것이다.
그러나 이러한 내용적인 목표들은 어디까지나 의도된 교육내용이지, 교수과정을 통하여 학습된 교육과정이라고 하기에는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었던 것도 사실이다.
한편, 음악교육에서도 비슷한 경향을 나타냈다. 광복과 더불어 시작된 교육내용의 특성은, 일제하에서 마음대로 부르지 못했던 우리 가요와 동요를 많이 도입했다는 점과 외국의 음악교육과정, 특히 전후 일본의 것을 잠정적으로 참고하여 외국 노래를 번역해서 쓴 것들로 구성되었다는 점이다.
따라서 제2차 교육과정 개정 전까지는 우리 나라 노래나 외국 노래를 가리지 않고 주로 양악으로 되어 있었고, 국악은 소외되어 왔다.
이 때는 「국민교육헌장」의 공포로 헌장의 이념을 구현하기 위한 구체적인 작업이 모든 교과에 반영되었다. 특히, 국악을 소홀히 해온 것에 대한 반성과 개선점을 반영하려고 노력하여, 국악과 민요 등을 많이 다루게 되었다.
교육방법에서도 일제하에서는 주로 교사의 노래를 따라 부르는 창가 중심의 교육이었으나, 교육사상이 교사 중심에서 아동 중심으로 차차 바뀜에 따라 단순한 가창 영역뿐만 아니라 가창·기악·감상·창작의 네 영역으로 나누어 교재를 구성하고 지도하도록 교육과정이 점진적으로 발전해 왔다.
이렇게 볼 때, 우리 나라의 음악이나 미술 교육을 중심으로 한 예술교육은, 광복 후 전체 교육과정 변천의 테두리와 정신에 의해 변천되어 왔으며, 그 때마다 세계적인 교육사조를 반영하려고 노력해 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러나 교육과정의 계획이나 의도된 수준과 실제로 이루어진 현실적 수준은 언제나 격차가 심했고, 그러한 격차는 예술교육 분야에서도 예외는 아니었다.
예술교육이 교육과정의 목표만큼 이루어졌다고 보기는 힘들며, 국악과 동양미술에 대한 교육의 실천도 사실상 큰 진전이 없었던 것으로 평가된다. 그리고 예술교육에 대한 교육적인 관심과 이론적인 이해에도 한계가 있었다. 다시 말해서, 단순히 정서교육이라고 생각함으로써 전체 교육과정 속에서 항상 소외된 위치를 차지하였다.
물론, 그것은 초·중·고등교육의 정상화 및 입시문제와 관련되어 있고, 예술은 입시과목이나 취직시험에 속하지 않았다는 점 등의 문제와 관련해서 이해되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순수한 교육학적 이론 속에서도 예술의 인간형성이론에 대한 이해가 깊지 못했던 것은 이 시기의 부족한 점 가운데 하나라고 보아야 한다.
현재 우리 나라의 초·중·고등학교 교육에서 예술교육이라고 할 수 있는 것은 크게 문학·미술·음악의 세 분야이며, 체육의 일부로 무용이 다루어지는 정도이다. 이들 각 분야별 현황은 다음과 같이 살펴볼 수 있다.
예술교육에서 문학이 차지하는 비중은 매우 큰 것임에도 불구하고, 현 교육과정에서는 국어교과와 영어 및 기타 외국어 과목의 일부로 지도하고 있다.
3차로 개정된 현 국어교육과정에서는 언어적으로 치우친 도구로서의 교과를 반영한 구 교육과정에서 벗어나, 문학적인 감상과 표현력을 통하여 감정과 상상력의 신장을 강조하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강조는 어디까지나 교육과정 수준의 변화이며, 그것이 곧 예술적인 경험을 수반하고 예술적인 태도로써 예술적 감지력을 기르도록 교수되고 있지는 못한 실정이다. 그것은 시·소설·수필·극 등의 문학작품을 대한다고 해서 예술 경험이 자동적으로 유발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또한 국어교육의 내용을 단순한 어문 중심이 아니라 문화적 가치관을 고려하여 선택하는 것은 좋으나, 자칫하면 어문·문학·도덕성이 완전히 분리되거나 혼동되어 취급될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해야 한다.
이들은 통합적으로 취급하되 교수과정에서 치우침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며, 많은 경우에 현재의 평가체제 속에서는 문학적 감상력이 교수에서 소외될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 문제로 남아 있다.
음악교육도 광복 후 여러 측면에서 발전해 온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근본적인 문제가 남아 있다.
① 음악교육의 근본 목적은 인간의 정서와 지각을 개발해 줌으로써 창의성을 연마하는 데 있는데도 불구하고, 기능만을 중시하는 교육에 치우침으로써 종합적이며 통합적인 음악성 지도가 결여되어 있다는 점이다.
② 전통에 뿌리를 둔 외래 음악의 수용문제와 현대화된 전통음악의 교육문제가 남아 있다. 광복 후 초기 음악교육이 지나치게 외래 음악에만 탐닉하여 전통음악을 도외시하다
보니, 외래 음악은 제대로 토착화되지 못하고 국악은 현대화되지 못한 문제점을 낳게 되었다. 그 결과 학교의 음악교육은 두 방향 다 성공을 거두지 못하여, 양악도 국악도 결국 국민생활에 밀착되지 못한 채 겉도는 현상을 초래하였다. 이러한 문제점은 현대 한국인의 여가생활이나 오락시간 등에서 표출되는 음악의 형태 속에 잘 나타나 있다.
③ 국악교육의 현실적인 문제로, 우선 현행 초·중·고등학교 음악 교과서에 통일되지 못한 원리나 변질된 이론 등의 오류가 많다는 점이다.
뿐만 아니라 교육과정 자체가 현대화된 창작곡은 없이 왜곡·변질되고 편곡된 민요조로 되어 있으며, 현재 전체 교육내용의 많은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 하더라도 횡적인 통일성과 균형을 갖추고 있지 못하다. 예컨대, 초등학교 학생이 입학해서 졸업하는 동안 접하게 되는 국악의 수는 여전히 적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
또한, 교육부령 교육과정에는 국악이 존중되어 있는 편이지만, 이를 실천에 옮기기에는 아직도 교육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재해 있다. 전국 초·중·고등학교에 비치된 국악기 및 자료는 일부 특정학교 이외에는 전무한 상태이다.
뿐만 아니라 국악에 대한 음악 교사들의 무관심, 교장의 이해 부족에 따르는 지원 조건의 미진, 국악기 및 자료의 미비 등으로 국악교육은 음악교육 중에서도 가장 소외되고 있는 실정이다.
미술교육의 현황과 문제점도 음악교육과 비슷한 상태라고 할 수 있다. 미술 자체는 항상 있어 왔으나, 우리 나라에서 현대적인 의미의 미술교육이 본격적으로 발전하기 시작한 것은 195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리고 1972년 한국교육개발원이 설립되자 1979년부터 미술교육연구실이 운영되면서 미술교육과정 지도방법, 교육평가와 개선, 교과용 도서의 개발 등에 접근하기 시작하였다.
따라서 미술학원의 수도 증가하고 학교교육에서 미술의 중요성도 그전보다 높아진 것은 사실이지만, 다음의 두 가지 문제점이 제기되고 있다.
① 미술교육의 기본목표는 시·지각을 통한 표현력과 감상력의 발달을 통하여 궁극적으로는 미적 정서를 기르고, 그럼으로써 인격과 생활의 발전을 도모하려는 데 있다. 그러나 이러한 기본목표보다는 기능만을 중시하는 교육이 압도적이어서, 미술이 학생들의 인격과 지각에 미치는 기본적인 관계를 고려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② 3차 이후로 개정된 미술교육과정에는 국민정신교육, 즉 국민적 주체성 육성에 큰 비중을 둔 것으로 되어 있으나, 실제 교육에서 동양 미술은 큰 비중을 차지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다.
미술과의 교육목표를 맥락주의 또는 문화적 입장에서 볼 때, 실제로 서예 이외에는 취급되고 있지 못한 실정이다. 동양 미술을 감상할 기회는 많으나, 직접 교수과정에서 접근할 때는 서양식 화법과 꾸미기·만들기 등에 치우쳐 있는 경향이 있다.
앞에서 살펴본 예술교육의 영역에서 공통된 문제점 및 과제는 다음 세 가지로 요약될 수 있다. ① 문학·미술·음악의 전문 이론과 교육이념이 괴리되어 있다. 문학이론과 문학교육이론은 다른 것이며, 음악이론이 곧 음악교육이론은 아니다.
즉, 각 예술형태에 따르는 심리학적·사회학적·철학적 연구의 기초 위에 예술과 도덕성, 예술과 정서개발 등의 문제가 연구되어야 할 것이다.
각 분야의 예술교육과정이나 지도방법, 학습과정 등에 대한 개발은 이러한 연구의 도움 없이는 이루어지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각 대학과 교육대학원에 음악교육과와 미술교육과가 많이 설치되어 있지만, 전문적인 단계에 접어들었다고 보기는 힘들다.
② 모든 예술 교과의 교육과정이 많은 문제점을 안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계속적인 발전을 하고 있지만, 교수과정에서는 아직 현상학적 접근을 포함한 통합적 접근이 이루어지지 못하고 있는 경우가 많다. 예술 본래의 교과 목적과 불합리한 교수방법에 대한 연구와 교사 교육 및 지원 조건의 많은 문제들이 해결되어야 할 것이다.
③ 모든 교과 중 한국적인 것, 특히 전통문화의 독특성과 관련이 깊은 것은 예술 교과이며, 그 중에서도 음악·미술이 가장 주목되는 교과로 평가된다. 이러한 의미에서 음악과 미술교육에서는 전통의 현대화를 위한 교육과 외래 문화의 토착화를 위한 교육이 시급하다고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