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시복 ()

조선시대사
인물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이칭
중초(仲初)
휴곡(休谷)
인물/전통 인물
성별
남성
출생 연도
1637년(인조 15)
사망 연도
1716년(숙종 42)
본관
동복(同福: 지금의 전라남도 화순)
주요 관직
강릉부사|이조참판|한성판윤|호조판서
관련 사건
갑술옥사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정의
조선 후기에, 이조참판, 한성판윤, 호조판서 등을 역임한 문신.
개설

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우참찬 오억령(吳億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정(吳靖)이고, 아버지는 오정규(吳挺奎)이다. 어머니는 이여황(李如璜)의 딸이다.

생애 및 활동사항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 수찬(修撰)·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校理)·이조정랑·사인(舍人)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승지·이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고, 강릉부사가 되었다. 부임 전에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이어 한성 판윤·호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경비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도, 각읍의 채은처(採銀處: 은을 캐는 지역)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수세하도록 하였고, 왜에 면포예급문제, 각 아문의 둔전경영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겸 수어사, 이어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다. 1697년 풀려나와 우부빈객을 지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大靜縣: 지금의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1712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배되어, 1716년 그곳에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였고, 뒤에 신원되었다.

참고문헌

『현종실록(顯宗實錄)』
『현종개수실록(顯宗改修實錄)』
『숙종실록(肅宗實錄)』
『국조방목(國朝榜目)』
『청선고(淸選考)』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