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동복(同福). 자는 중초(仲初), 호는 휴곡(休谷). 우참찬 오억령(吳億齡)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오정(吳靖)이고, 아버지는 오정규(吳挺奎)이다. 어머니는 이여황(李如璜)의 딸이다.
1662년(현종 3) 증광문과에 병과로 급제하고, 이어 수찬(修撰)·정언(正言)·지평(持平)·교리(校理)·이조정랑·사인(舍人) 등을 거쳐 1675년(숙종 1) 승지·이조참판·개성유수를 역임하고, 강릉부사가 되었다. 부임 전에 허적(許積)에게 아첨하였다 하여 1680년 경신대출척(庚申大黜陟) 때 파직되었다.
1689년 기사환국으로 이조참판에 이어 한성 판윤·호조 판서가 되었다. 이때 경비부족을 메우기 위해 각도, 각읍의 채은처(採銀處: 은을 캐는 지역)를 호조에서 관장하여 수세하도록 하였고, 왜에 면포예급문제, 각 아문의 둔전경영문제를 해결하였다.
이듬해에는 이조판서 겸 수어사, 이어 다시 호조판서가 되었으나, 갑술옥사로 하옥, 유배되었다. 1697년 풀려나와 우부빈객을 지냈다.
1701년 무고(巫蠱)의 옥사에 연루되어 대정현(大靜縣: 지금의 제주도)에 안치되었다. 1712년 함평·강진 등지로 이배되었다가 이듬해에 영해부(寧海府: 지금의 경상북도 영덕군)에 이배되어, 1716년 그곳에서 죽었다. 특히 글씨에 능하였고, 뒤에 신원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