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병영 ()

목차
조선시대사
제도
조선시대 경상우도(慶常右道) 진주에 있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주영(駐營).
• 본 항목의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통해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목차
정의
조선시대 경상우도(慶常右道) 진주에 있었던 병마절도사(兵馬節度使)의 주영(駐營).
내용

1407년(태종 7)의 행정구역을 확정할 때 경상도는 낙동강을 경계로 낙동(洛東)과 낙서(洛西)로 나뉘었는데, 이를 각각 좌도와 우도로 삼았다.

이에 따라 1415년(태종 15)에 창원(昌原)에 우병영을 설치하였다. 그뒤 경상좌·우도의 분할과 합치는 과정에서 경상좌병영과 합하여졌다가 다시 1437년(세종 19)에 우병영으로 분리되었다.

이어 1602년(선조 35)에 병사(兵使) 이빈(李蘋)의 장계에 의하여 이듬해 병사 이수일(李守一)이 진주 촉석산성(矗石山城)으로 옮기었다.

우병영에는 종2품직인 병마절도사가 있어서 아장(亞將)인 종3품직의 우후(虞侯)를 비롯하여 군관(軍官)·아전(衙前) 및 노비·공장(工匠) 등을 거느리고 유방군(留防軍)을 영솔(領率)하였다.

병영의 주 임무가 국방이었던 만큼 지방군의 군사훈련과 습진(習陣) 및 성보(城堡) 등 군사시설의 유지를 꾀하고 외적 침입에 대비하였으며, 나아가 평시의 포도(捕盜), 내란방지 등 치안유지에도 힘썼다.

우병영의 재정은 비변사에서 관할하는 군향미(軍餉米)와 각종 곡물이 14만9111섬[石], 병영관할의 별회창미(別會倉米) 각각이 1,704섬이다.

특히 우병영은 좌병영 및 주요 영과 마찬가지로 마병(馬兵)을 해마다 고시하여 수석한 한량(閑良)은 직부전시(直赴殿試)하고, 차석은 회시(會試)에 바로 나아가도록 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북돋우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만기요람(萬機要覽)』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
• 항목 내용은 해당 분야 전문가의 추천을 거쳐 선정된 집필자의 학술적 견해로, 한국학중앙연구원의 공식입장과 다를 수 있습니다.
• 사실과 다른 내용, 주관적 서술 문제 등이 제기된 경우 사실 확인 및 보완 등을 위해 해당 항목 서비스가 임시 중단될 수 있습니다.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은 공공저작물로서 공공누리 제도에 따라 이용 가능합니다. 백과사전 내용 중 글을 인용하고자 할 때는
   '[출처: 항목명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과 같이 출처 표기를 하여야 합니다.
• 단, 미디어 자료는 자유 이용 가능한 자료에 개별적으로 공공누리 표시를 부착하고 있으므로, 이를 확인하신 후 이용하시기 바랍니다.
미디어ID
저작권
촬영지
주제어
사진크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