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노국공주의 무덤인 정릉(正陵)의 조포사(造泡寺)로 유명하다. 공민왕은 1360년(공민왕 9)에 공주와 더불어 이 절에 행차하였고, 공주가 죽자 묘를 절 근처에 쓰고 자주 이 절에 행차하여 공주의 명복을 빌었다.
1366년에는 이 절에 재실(齋室)을 두고 2,240결의 밭과 노비 46명을 주어 명복을 빌게 하였고, 능호(陵戶) 114호를 두어 영제(營祭)를 감시하게 하였으며, 1368년에는 이 절에 매월 쌀 30석씩을 내리도록 하였다. 그 뒤 공민왕은 자주 이 절에 들렀으며, 1370년 3월에는 먼저 이 절에서 반승(飯僧)을 베푼 다음 정릉에서 제사를 지내기도 하였다.
1371년부터 1377년(우왕 3) 6년간 중수확장을 보게 되었으며, 1397년(태조 6) 4월에는 태조가 삼사(三司)의 우복야(右僕射) 유순(柳珣)을 이 절에 보내어 성변기도소재법석(星變祈禱消災法席)을 열었다. 그 뒤의 역사는 전하지 않는다.
원래 이 절은 시흥종(始興宗)에 속하였다가 뒤에 조계종(曹溪宗) 소속이 되었고, 창화사(昌化寺)·광암사(光巖寺) 등으로도 불리었으며, 정릉과 현릉(玄陵)의 조포사가 되면서 광통보제선사(廣通普濟禪寺)라는 사액을 받기도 하였다.
폐사 연대는 미상이나 사지에는 석탑의 파편과 주춧돌·우물자리 등이 흩어져 있고, 동쪽에는 사적비가 남아 있다. 비문은 깨어져서 명백하지 않으나 보상문(寶相文)과 신룡(神龍)의 조각이 남아 있다. 비석은 공민왕이 중국으로부터 구해온 것이라 하며, 비문은 우왕 때 이색(李穡)이 찬하고 한수(韓修)가 쓴 것이다. 『동국여지승람』에는 이 절에 대한 김극기(金克己)·이인로(李仁老)·이색의 시가 전해지고 있는데, 김극기의 시는 이 절에서 날마다 강석이 열렸고, 꾸준히 경전이 연구되었음을 시사하여 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