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빈지처 한씨 묘지명 ( )

고대사
유물
낙랑계(樂浪系) 가문 출신으로, 북위(北魏)시대의 종실인 왕도민(王道岷)의 둘째 딸 한씨부인(韓氏夫人, 482∼513)의 묘지(墓誌).
정의
낙랑계(樂浪系) 가문 출신으로, 북위(北魏)시대의 종실인 왕도민(王道岷)의 둘째 딸 한씨부인(韓氏夫人, 482∼513)의 묘지(墓誌).
개설

지석은 가로·세로 모두 49cm 크기의 정방형이다. 그리고 가로 17행(行), 세로 17간(間)에 총 270자를 음각하였다.

글씨는 해서체(楷書體)이며, 찬자(撰者)와 서자(書者)는 밝혀져 있지 않다. 중국 허난성 뤄양(洛陽)에서 출토되었다.

내용

한씨부인의 본래 성은 왕씨(王氏)로 본관은 낙랑(樂浪) 수성(遂城)이다.

아버지 도민은 유영이주자사 광양정후(幽營二州刺史 廣陽靖侯)이며, 6대조는 전연(前燕)에서 의동삼사 무읍공(儀同三司 武邑公)인 파(波)이다. 어머니는 관군장군 제주자사(冠軍將軍 濟州刺史)를 지내고 산기상시 안동장군 연군강공(散騎常侍 安東將軍 燕郡康公)에 추증된 창려(昌黎) 극성(棘城) 출신인 한기린(韓麒麟)의 딸이다.

뤄양에서 묘지가 발견된 안정왕(安定王) 셋째아들 원원평(元願平)의 처 왕씨(王氏, 480∼509)부인은 그의 언니(셋째딸)이다. 출생연도로 볼 때 한씨부인이 왕씨부인의 동생임이 분명한데도 묘지명에 둘째 딸로 기록된 것은 아마도 언니들이 먼저 사망한 때문으로 짐작된다.

한씨부인은 북위의 종실(宗室)인 원빈지(元斌之)에게 시집을 갔는데, 시아버지는 고종(高宗) 문성제(文成帝)의 둘째아들인 안락왕(安樂王) 장락(長樂)으로, 남편 원빈지는 그의 셋째 아들이었다.

안락왕은 태위 정주자사(太尉 定州刺史)를 지냈고, 479년에 반란에 가담했다가 사사(賜死)되었다. 527년에는 남편 원빈지가 그의 형 감(鑒)과 함께 모반하다가 실패해 종실 원씨성(元氏姓)을 강제로 개성(改姓)당하였다.

그 뒤 효장제(孝莊帝, 528∼530) 초에 가서야 본성(本姓)으로 회복되었다. 한씨부인이 본래 왕씨였으나, 묘지명에 한씨로 기록된 것은 확실하지는 않지만 결혼 후 안락왕 가문의 이러한 모반에 따른 제재와 관련이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한씨부인은 513년에 32세의 나이로 사망하였다. 묘지는 이 때에 부장된 것이다. 묘지명의 내용을 언니인 ‘원원평처왕씨묘지명(元願平妻王氏墓誌銘)’과 비교하면, 나이와 사망일시 등 개인적인 사항을 제외하고 또 일부 문구를 생락한 것 외에는 전적으로 동일하다.

서체 또한 동일한 사람의 것임이 분명하다. 즉, 한씨부인의 묘지는 언니 왕씨부인의 묘지명을 원본으로 해 작성되어 동일한 사람에 의해 쓰여진 것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따라서, 두 왕씨부인의 묘지는 친정인 왕씨가문에 의해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의의와 평가

이 묘지는 낙랑계 왕씨가 북중국으로 이주한 뒤의 활동상을 간접적으로 보여 주고 있다. 낙랑계 왕씨로는 뤄양에서 묘지가 발견된 왕정(王禎, 475∼514) 및 그의 동생 왕기(王基, 482∼522)가 있다.

또한, 『북주서(北周書)』에는 북주문제(文帝)의 어머니 명덕태후(明德太后)와 그의 오빠인 왕맹(王盟, ?∼545)도 그 선조가 낙랑인이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런데 이들 왕씨들은 모두 6대조가 동일한 인물인 왕파(王波)로서 동일 가문 출신이다.

왕기와 왕정의 가계에서 보듯이 낙랑 왕씨는 대대로 관직과 관작을 가지고 중국북조(北朝)의 귀족사회에서 상당한 사회적 지위를 누렸다. 특히, 왕도민의 두 딸과 혼인한 원원평과 원빈지가 각각 경목제(景穆帝)와 문성제(文成帝)의 손자임을 보면 낙랑 왕씨는 북위의 황실과 혼인할 수 있는 유력 가문이었음을 알 수 있다.

참고문헌

「안락왕삼자처한씨묘지명(安樂王三子妻韓氏墓誌銘)」(임기환, 『역주한국고대금석문(譯註韓國古代金石文)』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원원평처왕씨묘지명(元願平妻王氏墓誌銘)」(임기환, 『역주한국고대금석문(譯註韓國古代金石文)』 1, 한국고대사회연구소 편, 19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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