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42년(영조 18) 성균관 교육의 진흥을 목적으로 「태학유생원점절목(太學儒生圓點節目)」이 제정되었다.
「태학유생원점절목」 규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정원은 재임(齋任) 이외의 생원, 진사의 수를 100명으로 한다.
원점(圓點) 기준은 50점으로 한다.
절제(節製)에는 태학준점유생만을 시험한다는 뜻을 알려 성균관이 착실하게 거행한다.
절제를 반유(泮儒)만을 시험하라는 명이 있게 되면 원점유생 가운데 참작하여 응시하게 한다.
절제를 반유만을 시험할 때에도 다른 일반적인 절제의 경우에 따라 제술로 거행한다.
전강(殿講)에서 도기(到記) 유생을 시험할 때에는 이전에 내렸던 하교에 따라 제술과 강경 가운데 선택하게 하고 각각 1명씩 선발하는 것을 정식으로 한다.
『경국대전』에 실려 있는 순제(旬製)와 같은 규정은 아름다운 조항이니 구례에 따라 시행한다.
「태학유생원점절목」을 통해서 원점 50점을 획득해야 성균관의 여러 과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규정이 개정되어 유생들이 성균관에 거관하도록 유도하였다. 성균관 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그 방법을 관시(館試)가 아닌 과시(課試)의 응시 기준으로 적용했다는 점에서, 조선 후기 성균관 교육의 중심이 관시에서 과시로 옮겨졌다고 평가하는 근거가 된다.
「태학유생원점절목」에 따라 성균관 과시의 응시 기준이 50점이 되고, 1744년 식년시의 초시로 열린 1743년 관시에서 원점 300점을 채운 유생의 수가 모자라는 일이 발생하자, 이 규정을 준용하여 유생들이 원점 50점만 획득하여도 관시에 응시할 수 있도록 허락하였다. 그리고 1746년에 반포한 『속대전(續大典)』에도 원점 300점을 획득한 유생 수가 충분하지 않으면, 원점 50점 이상인 자도 응시할 수 있도록 하는 조항이 포함되었다.
「태학유생원점절목」에 이어서 1777년(정조 1)에는 「거재유생원점절목(居齋儒生圓點節目)」이 다시 만들어졌다. 특히 과시의 응시 기준을 1년에 원점 30점으로 하고, 획득한 원점으로 그다음 해까지 과시에 응시가 가능하다는 규정이 만들어지면서 원점의 유효 기간도 보다 명확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