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22년(성덕왕 21)에 각간(角干)으로서 축성감독자가 되어 모화군(毛火郡)에 일본의 침략을 막기 위하여 주위 4,792보(步) 5자[尺]의 석성을 3만 9262명의 인원을 동원하여 쌓았다. 그리하여 울산방면으로부터 침략하는 길목인 동경(東京)의 관문을 막았다.
이 성을 이름하여 관문성(關門城)이라 한다. 이는 신라 왕경(王京) 부근 제 1의 웅장한 석성으로, 『당서(唐書)』 신라전에 “그 나라에는 산을 이어 수십리에 걸쳐 좁은 골짜기를 쇠문으로 잠갔으니, 이를 관문이라 하며, 항상 노(弩)의 군사 수천명이 지킨다.”고 쓰여 있는 유명한 성이다. 일명 만리성(萬里城)이다.
지금도 경상북도 경주시 외동면에 동해를 굽어보는 관문산 위와 협곡에 웅장한 석성이 남아 있다. 수십년 전까지만 해도 원진의 축성비가 성 곁에 서 있었다. 원진의 축성 사실이 『삼국유사(三國遺事)』 권2 기이(紀異)의 효성왕조에 실려 있는데 이것은 성덕왕조에 실을 것을 잘못 실은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