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여산(礪山). 속명은 송도암(宋道巖). 법호는 만공(滿空). 법명은 월면(月面). 전라북도(현, 전북특별자치도) 정읍 출신. 아버지는 신통(神通)이다. 일제의 불교 정책에 정면으로 맞섰으며, 선불교를 크게 중흥시켜 현대 한국불교계에 큰 법맥을 형성하였다.
1883년김제 금산사에서 불상을 처음 보고 크게 감동한 것이 계기가 되어 공주 동학사(東鶴寺)로 출가하여 진암(眞巖) 문하에서 행자 생활을 하였다. 1884년(고종 20)경허(鏡虛)의 인도로 서산 천장사(天藏寺)에서 사미십계(沙彌十戒)를 받고 출가하였다.
‘모든 법이 하나로 돌아가니 그 하나는 어디로 돌아가는가’라는 화두(話頭)를 가지고 참선에 열중하다가, 1895년 아산 봉곡사(鳳谷寺)에서 깨달은 점이 있었다. 그 뒤 공주 마곡사(麻谷寺) 토굴에서 보경(普鏡)과 함께 수도하다가 경허로부터 무자(無字) 화두를 받고, 서산 부석사(浮石寺)와 부산 범어사의 계명암(鷄鳴庵) 등지에서 수도하였다. 1901년 양산 통도사의 백운암(白雲庵)에서 크게 깨달은 후, 1904년경허로부터 전법게를 받았다.
1905년예산 덕숭산(德崇山)에 금선대(金仙臺)를 짓고, 깨달음 후의 공부를 하면서 후학들을 지도하였다. 그 뒤 대부분의 생애를 덕숭산에 머무르며 선을 지도하였으며, 덕숭산 수덕사(修德寺) · 정혜사(定慧寺) · 견성암(見性庵), 서산 안면도의 간월암(看月庵) 등을 중창하였다.
1920년대 초에는 선학원(禪學院) 설립운동을 하였으며, 선승들의 결사(結社)이자 경제적 자립을 위한 계(契) 모임의 성격을 지닌 선우공제회운동(禪友共濟會運動)에 참여하였다.
마곡사 주지로 있던 1937년, 31개 본산 주지회의에 참석하여 한국불교를 일본 불교화 하려는 총독부의 종교 정책 방침에 정면으로 반대하였다. 1941년, 선학원에서 개최한 전국고승법회에서 계율을 올바로 지키고 선(禪)을 진작시켜 한국불교의 바른 맥을 이어가자고 설법하였다.
말년에는 덕숭산 상봉 가까이에 전월사(轉月舍)라는 초암을 짓고 생활을 하다가 1946년 10월 20일에 입적하였다. 나이 75세, 법랍 62세였다.
그는 존재의 본체를 마음 · 자성(自性) · 불성(佛性) · 여여불(如如佛) · 허공 · 주인공 · 본래면목(本來面目) · 자심(自心) · 동그라미(○) 등으로 표현하였다. 이것은 개인의 참된 본질이 우주 만물의 본체와 하나임을 뜻한다.
불교의 진수는 이 마음을 깨닫는 데 있고 인간의 가치 있는 삶도 이 깨달음을 성취함으로써 찾아진다고 보았다. 수행을 통하여 현상적인 차별이나 분별의 관념에서 벗어나면 자유롭게 지혜와 자비를 활용할 수 있는데, 그가 바로 부처이며 스승이라고 하였으며, 이를 위한 수행법으로는 참선을 으뜸으로 보았다.
이론과 사변을 철저히 배제하고 무심(無心)의 태도로 화두를 참구(參究)하는 간화선법(看話禪法)을 채택하였고, 제자들에게는 항상 조주(趙州)의 무자 화두를 참구하도록 가르쳤다. 참선의 보조 여건으로는 선지식(善知識)과, 수도(修道)에 적절한 도량, 함께 수도하는 좋은 도반(道伴)의 세 가지를 중시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스승을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보았다.
수도승들에 대한 지도 방법으로 침묵 또는 방망이질〔棒〕, 할(喝), 격외(格外)의 대화와 동그라미 등 여러 가지 방법을 자유자재로 사용하였다. 1927년 그가 지은 「현양매구(懸羊買拘)」라는 글에 ‘임제 32대 사문 만공’이라 적고 있어 그의 지도 방법이 임제종풍(臨濟宗風)을 계승한 것임을 알 수 있다.
제자로는 보월(寶月), 용음(龍吟), 고봉(古峰), 서경(西耕), 혜암(惠庵), 전강(田岡), 금오(金烏), 춘성(春城) 등과 비구니 법희(法喜), 만성(萬性), 일엽(一葉) 등이 있다.
덕숭산에서 다비하여, 유골을 모신 부도 만공탑을 덕숭산금선대 근처에 세웠다. 진영(眞影)은 경허의 진영과 함께 금선대에 봉안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