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전주(全州). 자는 자유(子有), 호는 사호(沙湖). 유세구(柳世龜)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유감(柳堪)이다. 아버지는 관찰사 유영립(柳永立)이며, 어머니는 이기(李夔)의 딸이다.
1582년(선조 15) 사마시에 합격, 1595년 음보(蔭補)로 의금부도사가 되고, 이 해 별시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전설사별좌(典設司別坐)·권지승문원부정자 등을 지냈다. 1601년 형조좌랑·정언(正言)·호조좌랑을 거쳐, 1603년 영변판관으로서 선정을 베풀어 표리(表裏)를 하사받았고, 1606년 배천군수에 제수되었다.
이 때 소북의 영수 유영경(柳永慶)이 권력을 잡고 있었는데, 유영경과 근친으로 전랑(銓郎) 물망에 올랐으나 군수로 있기를 원한다는 소(疏)를 올렸다. 이로 인해 유영경이 물러나고 대북파가 득세하였을 때, 홀로 화를 입지 않았다.
그 뒤 양주목사로 승진되고 예빈시부정(禮賓寺副正)·선천군수를 거쳐, 1614년(광해군 6) 승문원판교(承文院判校)·강계부사가 되었다. 이 때 관직 20여년 만에 처음으로 비단옷[緋衣]을 입었다 한다.
이듬해 호조참의·우승지가 되고, 장단부사에 제수되었다. 1619년 전라도관찰사가 되었을 때 권신이자 대북파인 한찬남(韓纘男)의 동생에 대한 포계(褒啓)를 각하하고 소를 올려, 한찬남을 탄핵하였다.
오랜 외임(外任)으로 병이 많은 끝에 한찬남과의 사이에서 일어난 일로 우울하게 보내다가 전주 감영에서 죽었다. 인조반정 후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