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관은 평산(平山). 자는 자경(子敬), 호는 덕곡(德谷). 아버지는 예빈시주부(禮賓寺主簿) 유원영(庾元英)이며, 어머니는 현풍곽씨(玄風郭氏)로 진사 곽림(郭琳)의 딸이다. 충청북도 옥천(沃川)에서 출생, 김장생(金長生)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유식이 8세 되던 해에 왜구가 남쪽 지방에 출현해 소란을 피우자 군대가 출동해 주둔하면서 순찰하고 있었는데, 유식이 대오를 따라다니며 놀다가 갑자기 북을 두드려 진영(陣營)이 비상에 걸리게 되었다. 당시 병사(兵使)로 있던 이시현(李時賢)이 짐짓 군법(軍法)을 적용해 죽이려 시험하는데도 유식이 언행이 태연자약하였다.
이에 이시현은 유식을 대단하게 여기고 공부하는 데 필요한 물건을 상으로 내리면서 칭찬하였다. 1633년(인조 11) 생원시에 급제했으며, 1640년(인조 18) 영창대군(永昌大君)의 사부(師傅)를 지냈다. 이 때 유식은 국가의 기반을 튼튼히 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방법 등 국정 전반에 걸쳐 논한 장문의 대책(對策)을 지어 올렸다.
일찍이 인목대비(仁穆大妃) 폐위론(廢位論)이 일어났을 때, 삼각산(三角山)에서 독서를 하고 있었는데 흉도(凶徒)들이 유식을 유혹하려 들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 곧장 귀향하였다. 후에 군자시주부(軍資寺主簿)·장례원사평(掌禮院司平)·목천현감(木川縣監) 등을 역임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政) 당시 조헌(趙憲)의 추전(追典)을 건의하는 소(疏)를 올려 윤허(允許)를 받았다.
송시열(宋時烈)·김집(金集)·송준길(宋浚吉)·이유태(李惟泰) 등과 교유가 깊었으며, 특히 역서(曆書)와 지리설(地理說)에 조예가 깊었고, 장중한 비평작품(批評作品)을 많이 저술하였다. 한편 덕양서당(德陽書堂)을 건립했으며, 저서로는 『덕곡문집(德谷文集)』 4권 2책이 있다.